소설리스트

119화 (119/254)

“세화. 주세화.”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그 역시 그녀와 다르지 않은 마음이라는 점일 것이다.

그가 뱉어 내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몸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피가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세화가 다시 한번 남자의 단단한 몸을 바투 끌어안자 불같은 열기를 지닌 살덩이가 그녀의 입술 사이를 밀고 들어왔다.

“……!”

절박하게 그녀의 것을 제 것에 얽고, 입속에 남은 숨뿐 아니라 얽혀진 호흡 사이의 타액 역시도 조금도 남기지 않은 채 빨아 마셨다.

그녀가 뒤로 물러설 수 없도록, 단단한 팔로 가는 몸을 고정한 그가 벅찰 정도로 강하게 자신을 밀어붙였다.

그 사나운 움직임에 세화의 머리가 급격히 어지러워졌다.

행위도 행위이거니와, 여유 따위는 조금도 부릴 수 없다는 그의 초조가 열감을 증폭시켰다.

몇 겹이나 되는 거추장스러운 옷들을 모두 풀어 헤치고 백호의 모습으로 그랬을 때처럼 서로를 맨몸으로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어, 어머니가.”

여기엔 제 어머니가 있었다.

그녀가 어렵게 말을 꺼내자 어느새 옷 속의 아찔한 곳까지 파고들어 그녀를 자극하던 단단한 손이 멈칫했다.

“…….”

“…….”

그의 실망스러운 표정을 마냥 볼 수가 없어 그녀가 시선을 내렸다.

“우리, 언제 혼인하지?”

흐트러진 옷차림을 정리해 주고, 밤공기 위로 드러난 하얀 피부에 아쉬움이 가득한 입맞춤을 남기던 백기하가 갈라진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빨리 하고 싶다.”

“……나도요.”

“다행이야.”

“뭐가요?”

“나 혼자만 그런 게 아니어서.”

뜨거운 입술 사이로 그녀의 귓불을 잘근잘근 물며 그가 다시 한번 속삭였다.

“빨리 혼인하고 싶다.”

“그런데, ……혼인했는데 내가 백가에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뭐?”

“지금 난 영력도 이상한 상태고. 혹시 이대로 신수가 된다 해도 흉……물스러운 모습이 될 수 있으니까요.”

“…….”

“당신만 괜찮다면야 나는 상관없지만. 나는 나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지는 건…… 못 할 것 같아서 한번 물어봐요.”

그녀의 그런 자신감 없는 말엔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 달라는, 답지 않은 어리광이 섞여 있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그녀의 그런 모습이 귀여웠던 그가 목을 울리며 웃었다.

그녀를 제 품으로 바투 끌어안고 장난치듯 강하게 그녀의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만용이가 아버님께 하는 말을 듣고도 그래? 제발 아가씨가 이대로 백가로 가서 백가의 신수가 되어 주셨으면 한다는 소리 못 들었어?”

“그때는 내가 백호의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이제는 그런 모습조차 되지 않을지 모르고.”

“나는 오히려 그대가 너무 바빠서 혼인은 못 하겠다고. 내 조건이 그대에 비해 부족해서, 혈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안 되겠다고, 그런 이유들로 나를 차 버릴까 봐. 그게 정말 걱정인데.”

“……? 내가 왜 바빠요? 복수 때문에? 신영 때문에?”

“그것 말고도 하나 더 있잖아. 아버님이 말씀하신 거.”

“?”

“어째서 나 외엔 아무도 가주의 자리에 앉을 수 없다 말하느냐. 네가 있지 않느냐. 누군가 주가 가주의 자리에 올라야 한다면 네가 오르라는 말이다.”

제 아버지의 말이 떠오르자 그녀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 더 어두워졌다.

“그거라면 더 문제 아닌가요. 신영의 위는 주가 피의 정통성을 증명하며 올라야 하는 자리인데 이런 영력을 어찌 내보이겠어요.”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아.”

길 위에 피어난 작은 풀과 꽃을 발견했을 때의 희열을 기억해 내며 백기하가 부인했다.

세화는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영력과 외형이 이렇게 되기까지 어떤 거대한 질서가 확고한 목적을 두고 움직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신영이 느낀 예감과 비슷한 종류의 것이었다.

이 세상이 기다려 온 무언가가 지금 그녀를 통해 이곳에 구현되고 있다는 그런 예감.

왜 그녀일까.

어떻게 해서 저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런 것을 따지는 건 의미가 없었다.

세상이 바라온 신수는 그녀가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준비되어 있던 수많은 우연들은 이미 톱니바퀴처럼 강하게 맞물려 버렸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그때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가정들조차 소용이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하여 꿈을 꾸게 되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 색색의 신수들이 가득하던 무렵의 일들을.

환계와 인간계를 넘나들며 이제는 이야기 속에서나 볼 수 있게 된 선한 기적을 행하고.

풍성한 생명력으로 가득 찬 세상을 누비며. 아무도 영력을 다투지 않고. 누구도 지금처럼 날카롭게 굴지 않던. 그런 세상이 다시 찾아오지 않겠냐고.

너른 지붕 아래로 펼쳐진,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경관 위로 그 모습들이 겹쳐지는 듯했다.

비록 이 가느다란 아가씨는.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한없이 약하고, 스스로에겐 가차 없고, 잔걱정이 많으면서도 결단은 빠르고.

실행에도 망설임 없으면서 그로 인해 제가 아는 사람들이 상처받기라도 할까 봐 겁을 내는.

그래서 전생에도 눈이 갔고 현재에도 자꾸만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이 아가씨는, 아직 자신에게 반강제로 주어진 듯한 운명을 완전히 읽어 내지 못하고 있는 듯 보여도 말이다.

어려운 길을 가게 될 세화가 걱정스럽기는 하여, 백기하는 다시금 그녀의 얼굴 곳곳에 입술을 떨어뜨렸다.

부드러운 피부 위에 뜨거운 호흡이 녹아난 입술을 낙인처럼 꾹꾹 눌러 제 온기를 전했다.

반드시 제가 지켜 낼 거라고.

그리하여 맞이할 새로운 미래를.

모두가 놀라움과 감동으로 가득 차 기뻐할 그 머지않은 미래를 꼭 그녀와 둘이 손을 잡은 채 맞이하겠다고.

그리 다짐하면서.

* * *

다음날 이강 지방으로 향하는 그들의 태도는 전보다 훨씬 조심스러웠다.

어머니를 구하는 과정에서 신영과 잡음이 있지 않았던가.

오빠들의 안위가 이전보다 위험해졌다 생각해서였다.

한데 주가윤과 주가한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머리를 맞대고 그들을 구출할 계획을 다방면으로 세워 놓은 것이 무색할 정도로 완벽히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됐네. 지금 와서 찾긴 힘들 테니 여기서 더 시간을 버릴 것 없이 우린 일단 백가로 가세나.”

천수아가 아들들은 지금 애써 찾을 필요는 없다는 식으로 손을 내저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만약 두 분 형님께서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라도 한 거라면-.”

“그랬다면 저 초소병들이 탈영이니 뭐니 하며 저리 다급하게 그 아이들을 찾고 있지는 않겠지.”

숙소의 삼 층 창가에 앉아 있던 천수아가 가볍게 턱짓했다.

그곳엔 무서운 표정으로 주변 가게와 민가를 뒤지는 초소병들이 있었다.

“다소 융통성이 없지만 생각이 없는 아이들이 아니고. 능력도 제법 있으니 제 한 몸 정도는 충분히 지킬 수 있을 것이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천수아 역시 아들들을 깊게 염려하는 모습이었다.

“허니 지금은 백가로 가세나. 만약 우리의 이 모든 추측이 명백한 사실이라면, 신영에게 시간을 주는 일이 더 위험할 수도 있어.”

천수아의 단호한 시선이 주명윤과 혼인해 주가로 넘어왔을 때를 되짚었다.

많은 기대를 품고 도착한 곳에서, 그녀는 제가 살아온 지난 시간들과는 너무나 다른 주가의 분위기에 대단히 충격을 받았었다.

주씨 혈족들은 지배와 나태, 향락에 너무 오래 길들어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조차 다른 가문의 이들과 완벽히 달랐던 것이다.

주씨들에게, 가문을 갖지 못한 환족들은 같은 환족이 아니었다.

언제든 죽여도 되는. 하등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되는.

그런 오만한 사고방식은 육가를 대할 때라고 그리 다르지 않았다.

책임과 의무는 행하지 않으려 하면서 권리는 조금도 놓치지 않고 누리는 모습이 놀라웠다.

어찌 이런 자들이 환계를 지탱한다 말하는가.

이 거대한 가문이 고작 제 남편과 같은 뜻 있고 생각이 바른 몇몇에 의해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후의 황망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죄 없는 아이들을 살해한 죄도. 신영이란 자리에 앉아 있음에도 천명을 거스르고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제 생을 늘이고 있던 죄도!”

천수아가 단단한 시선을 한 채 강하게 목소리를 냈다.

“그로 인해 환계 전체의 질서가 어그러지고 칠문이 서로 분열되게 만든 죄도, 반드시! 받도록 만들어야 할걸세.”

그리하여 새로운 시대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것이라고.

그 말을 듣는 세화와 백기하의 머리도 뜨거워지는 듯했다.

“…….”

“…….”

백기하와 세화가 서로를 자연스럽게 응시했다.

전생에 백기하는 신영의 지위에 앉았으나 그것이 주가가 그랬듯 그가 진정한 환계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어떤 불만을 품는다 해도 그간 환계를 통치해 온 주씨의 위치는 섣불리 들쑤실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십 년 이십 년을 다스려 온 것이 아니었기에, 백 년 이백 년을 통치한 것이 아니었기에.

‘이 세상은 주가 적룡의 발아래 놓여 있다’는 명제는 환족들의 뇌리에 아주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라 바뀔 수 있다는 생각조차 갖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신영이 해 온 저런 부도덕한 일들을 모두에게 알릴 수만 있다면.

그럴 리 없다고 믿지 못할 이들에게 사실을 증명하는 일은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할 수만 있다면.

‘그때는 육가에서도 명분을 얻을 수 있어!’

하늘을 끌어내리고 세상을 뒤집어엎으면서도. 모든 이가 이 거사에 참가하게 만들 수 있는 명분을!

“가세. 큰일을 준비하려면 서둘러야 하니까.”

“오라버니들이 찾을 수 있도록 표식 같은 것을 남기지 않아도 될까요?”

“그 아이들도 제 아버지가 저택까지 정리해 백가로 간 사실을 듣지 못할 리 없으니 일단 백가로 가서 기다려 보세.”

세화와 백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오라버니들의 행방은 알 길이 없었고 소득 없이 돌아서야 하는 길이었으나 셋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생각지 못한 일을 계획하고 기대하는 눈들이 반짝였다.

침을 놓아 기절시켜 두었던 인질까지 야무지게 챙긴 채. 그렇게 그들은 일단 백가를 향해 빠르게 행로를 바꿨다.

많은 일을 준비해야 했으나 시간은 많지 않았다. 서둘러야 했다.

하늘길을 날아서 돌아가는 백호의 발걸음이 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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