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제가 들은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던 세화가 잠시 멍해졌다.
‘몸을 빼앗겼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한데?
그녀가 눈을 깜빡일 동안 백기하의 미간은 조용히 일그러졌다.
단단하고 커다란 손이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세차게 움켜쥐어졌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그건 얼마 전 주가의 연회를 끝내고 신영의 저택에 숨어들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는 복도 사이를 조심히 오가며 신영이 행방불명된 아이들을 끌고 가 살해했을 밀실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그 저택 안에서 귀한 옷을 입고 있는 누군가를 보게 되었었다.
그 누군가는 백가에서 어렸을 때 행방불명된 아이 중 하나와 대단히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혹시 그 아이인가 의심해 보려 해도 그럴 여지가 없었다.
그는 이미 전생에서 신영이 아이들의 영력을 바닥까지 취해 살해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 아이는 백가의 영력의 기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주가의 영력으로만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그저 닮은 아이인 줄로만 생각하고 돌아섰지만.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백기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신수의 영역에서는,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판단에 생각조차 해 보지 않은 아주 많은 일들을.
한데 누군가는 그 일을 시도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장부인을 보며 백기하가 물었다.
“그러면 그 몸의 주인은, 혼은 완벽히 사라진 겁니까?”
“그것까지는 알 수가 없지. 하지만 몸의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긴 이상 자력으로 혼이 회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 않을까.”
“……그렇군요.”
서늘하게 식은 눈매를 한 백기하가 단단한 표정을 하고 되뇌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적룡이, 신수가 아직 주가에 남아 있었던 거군요.”
“!!”
깜짝 놀란 세화가 눈을 동그랗게 뜰 때 백기하가 한마디를 더욱 무겁게 덧붙였다.
“그리고 그 신수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이고요.”
천수아가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한번 생각은커녕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이야기들이 들려오자 세화는 어안이 벙벙했다.
주가에 신수가 남아 있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신수가 남아 있다면 대체 왜 그 오랜 시간 동안 모습을 감추고 있는데?
게다가 신수가 되면 다른 이의 몸을 빼앗을 수가 있다고?
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었으나 그게 말이 되냐고 하기에는 제 어머니와 저 남자의 태도가 너무 진지했다.
그들의 기준에서는 저 믿을 수 없는 말들이 절대로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의미일 터였다.
“어머니는 그걸 어떻게 아셨는데요? 신수는 그게 가능하다는 것들이요.”
“환계의 역사에서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니까.”
천수아는 주명윤과 혼인해 주가에 오기 전 보았던 기록들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오래전 환계에 신수들이 가득할 때만 해도 혼인은 피가 섞이지 않도록 혈족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불사의 몸을 가진 신수들은 어떤 신체적 이상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신수들이 사라지고 남은 환족들은 약간의 능력과 조금 더 긴 수명을 제외하면 인간과 그리 다른 점이 없었다.
그들은 근친혼에 따르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다른 가문과 피를 섞기 시작했다.
주가는 타 가문의 영력이 섞이며 적룡의 상징인 붉은빛이 흐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적갈색 영력을 지닌 천가와만 혼인해 왔다.
하여 천가에는 타 가문보다 주가에 대한 기록들이 많았고, 천가의 가주는 혼인을 위해 주가로 떠나는 아이들에게 그것을 공개하고 주의를 당부해 왔다.
그중에는 아주 오래된 의혹들이 몇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가 성격부터 영력까지 갑자기 완전히 다른 이가 되어 버린 듯하던 혈족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 상황을 되풀이해 겪는 동안, 천가 원로 중 누군가는 그것이 혹 혼을 바꿔치기 당한 것은 아닐까 추측하기도 했단다. 그게 아니라면 영력까지 바뀌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
“만약 사실이라면 환계 전체가 뒤집힐 만한 무서운 의혹이었지만, 그때는 더 자세한 진실을 파헤쳐 볼 경황이 없었지. 그즈음 신수들이 사라져 가기 시작했거든.”
천수아가 제가 읽었던 문서들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그 이후에는 그런 일도 사라졌으니 그것이 신수들이 한 짓은 아니었을까. 신수는 불사이건만 그들이 이렇듯 하나같이 사라져 간 것은 관련된 일로 뭔가가 잘못되어 그리된 것은 아닐까 추측해볼 뿐.”
“하지만 이상합니다. 만약 주가를 지키는 신수가 있다면 왜 전면으로 나서지 않는 걸까요?”
“나도 그게 이상하네. 특히 신영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백 서방 자네가 환계 유일의 신수로 존경받도록 놔두지 않을 텐데. 어째서 그 굴욕을 견디면서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건지.”
“……백 서방.”
심각한 얘기를 하다말고 백기하가 호칭을 곱씹으며 귓불을 붉혔다.
스스로도 그 모습이 이상하게 비칠 거란 생각은 하는지 그가 곧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갈무리했다.
“몸을 바꾸는 것 외에도, 반드시 비밀로 해야 하는 어떤 중대하고 지저분한 이유가 또 있을 겁니다.”
“그거에 대해서 말인데, 백 서방.”
“……백 서방.”
백기하가 다시금 눈가를 붉히며 호칭을 곱씹었다.
“신영 주변의 이들이 몸을 바꾸는데, 신영은? 신영은 한 번도 바꾼 적이 없을까?”
“…….”
백기하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굳어졌다.
“우리의 신영이 희생적이고 자애로우며 불의에 맞서는 성격이었다면 이런 추측도 필요 없겠지만.”
“그렇지만 장부인. 신영은-.”
“어머니라 부르라니까.”
“……어머니.”
백기하가 목까지 붉힌 채로 천수아를 불렀다.
“하지만 신영은 매우 노쇠하였습니다. 만약 몸을 바꿀 수 있다면 그 전에 벌써 바꾸지 않았을까요?”
“기다렸을 수도 있지.”
“무엇을요?”
“그가 신영의 위를 계승하려면 바꿀 몸은 신영의 후계자여야만 해. 그 후계자는 아직 탈피하지 못한 몸이지.”
“!!”
백기하가 멍하니 굳어졌다.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건. ……아무리 그래도 자기 친아들을. ……그건 아닐 겁니다.”
“그럴까? 나는 혼이 먹히고 몸이 바뀐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소가주가 곧장 생각났는데.”
천수아가 어두운 얼굴로 덧붙였다.
“그가 영력에 집착하는 것이야 별다른 비밀도 아니지. 예전부터 자기 이외의 누군가가 본인의 것이 아닌 영단을 소유하는 것조차 대단히 경계해 왔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서도 제 아들에게는 영단을 아끼지 않았어. 왜 그랬을까?”
“그야. ……주가의 후계자이고 차기 신영이니까.”
“하지만 소가주에게 준 영단들을 모두 자기가 먹었다면 몸이 지금처럼 노쇠할 일도 없었을 것이네. 실종된 육가의 아이들도 살해된 거라며. 그 영력을 흡수했는데도 왜 저렇게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지?”
“…….”
“아무리 몸에 어떤 문제가 있어 효과를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많은 영력을 가져가면서 저리 변화가 없을 수는 없어. 그러니 자신의 현재 몸에는 조금도 영력을 흡수시키지 않은 것은 아닐까.”
“…….”
“하여 아마도. 소가주가 그의 다음 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네.”
천수아가 세화를 보며 물었다.
“혹시 네가 신영을 다치게 했던 것은 기억이 나니?”
“그럼요. 죽일 생각이기도 했던걸요. 하지만 누군가가 구해 갔잖아요?”
“신영을 누군가 구해 갔다고?”
“당신이 오기 조금 전일 거예요. 갑자기 거대한 영력의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싶더니 신영과 주수연이 눈앞에서 사라졌어요.”
“나도 곧 정신을 잃는 바람에 자세히 생각나지는 않지만,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 오부인이란 여자와 똑같은 꼴이 되어 있던 신영의 모습이었지. 그 몸으로는 약을 먹는다 한들 회복이 쉽지 않을 거야.”
천수아가 신수의 영력에 몸이 타들어 가던 노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덧붙였다.
“그러니 두고 보면 알겠지. 그 신영은 자신의 숨이 붙어 있는 한 양위를 할 성격은 아니니 혹여 곧 소가주가 신영의 위에 오르기라도 한다면…….”
“…….”
“…….”
아직도 둘의 대화가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세화를 차치하고서도, 백기하도 이번만큼은 무어라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심성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으나 영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신영이 그런 식으로 제 생을 늘릴 생각이라면……. 늘려왔다면.”
무섭게 표정을 일그러뜨린 백기하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덧붙였다.
“한시라도 빨리 그 목을 꺾어 놓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 * *
그믐이 가까운 하늘은 어두웠으나, 구름이 거의 보이지 않은 덕에 부스스한 달빛만으로도 충분히 땅이 밝았다.
세화도 깨어났겠다, 시간을 끌 필요 없이 그들은 곧장 그녀의 오빠들이 머무는 이강 지방의 초소로 향하려 했다.
하지만 봉인쇄를 찬 채 오랫동안 끌려다닌 어머니는 보이는 것만큼 상태가 좋진 않았다.
곳곳의 혈도가 강제로 봉인됐던 탓에 시간마다 뭉쳐진 영력을 풀어 주지 않으면 봉인쇄를 찼던 때와 다르지 않은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여 본의는 아니지만, 하룻밤 유예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약을 제대로 구할 수가 없어 천수아는 스스로 침을 꽂아 힘겹게 영력을 안정시켜야 했다.
그런 어머니가 지친 듯 눈을 감은 것을 확인한 세화와 백기하는, 그녀가 편히 잠을 잘 수 있도록 어둠을 틈타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지붕 위에 올라서는 푸르게 빛나는 정경들을 함께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그대. 짐승의 모습으로 변했던 것은 혹시 기억이 나?”
“나죠. 하지만 어떤 모습인지는 못 봤는데. 나 백호가 됐던 거예요? 다리가 있었던 걸 보면 용은 확실히 아니었는데.”
“…….”
“왜요?”
그가 입을 다물고 있자 세화의 눈동자가 조금 떨렸다.
“……혹시 더 이상한 모습이 된 거예요? 이번엔 또 뭐였는데요?”
“음…….”
“…….”
그 모습을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던 백기하가 잠시 망설였다.
세화가 참담하게 눈을 감았다.
‘……내가 영단을 좀 섞어 먹었어야지.’
스스로도 제 상태가 짐작되었던 것이다.
‘높아진 시야와 속도를 생각하면 거북이가 됐던 것은 아닌 것 같지만.’
백호도 아니고 용도 아니고.
거북이도 사슴도 아니라면.
색이 온통 뒤섞여 버린 영력처럼 짐승의 여러 가지 모습이 다 섞여 발현되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세화의 머릿속에선 이미 사슴의 머리에 거북이의 등딱지, 백호의 다리와 용의 꼬리를 가진 끔찍한 짐승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이제 영력을 개방하고 살긴 틀렸나 봐요.”
다른 이들의 험담이야 아무래도 좋지만, 그런 비난이 괜히 제 부모님에게 향할 것을 염려한 세화가 가라앉은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그런 그녀를 신경 쓰듯, 백기하의 단단한 팔이 풀 죽은 듯한 어깨를 조심히 감싸 안았다.
새하얀 관자놀이 위로, 위로하듯 따뜻한 입술이 와서 닿았다.
그를 돌아보자 흐린 달빛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염려의 시선과 맞닿았다.
“…….”
녹을 듯 다정한 시선에서, 그가 제게 가진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부드럽게 아래로 향한 그의 마른 입술이 도톰한 그녀의 것을 가볍게 물었다.
같은 장소에 한 번 더 입술이 와 닿고, 그리고 또 한 번 더.
눈가가 붉어진 그녀가 그의 목 뒤로 손을 뻗었다.
두 개의 입술이 더욱 깊숙이 서로의 것에 파고들었다.
살짝 열린 틈 사이로 습기 어린 호흡이 뒤엉켰다.
의지가 되는, 행복하게 하는.
언제 이렇게 깊게 들어왔는지 이제는 알 수가 없는.
놓치고 싶지 않고 더는 떨어지고 싶지도 않은.
그런 남자의 단단한 등을 세화는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겨 힘주어 안았다.
그래. 뭘 더 욕심낼까.
하늘은 이미 그녀에게 너무나 큰 행운을 안겨 주셨는데.
다시는 만나지 못했을 가족들을 한 번 더 만나게 해 주시고, 이 남자까지 그녀에게 주셨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