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7/254)

* * *

세화는 제 앞으로 쏟아지는 빛의 폭포를 아연한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주변은 하늘과 땅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새하얗기만 했다.

눈앞에 존재하는,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시작해 아득히 깊은 곳으로 사라지는 폭포는 그녀 안의 원초적인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다가가고 싶지 않은데.

혹시 떨어지는 빛의 물결에 쓸려 보이지 않는 저 끝으로 함께 추락해 버릴까 봐 두려운데도 발이 주춤주춤 앞으로 움직였다.

누군가 저 폭포를 통과하라고 등을 떠미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막상 폭포와 가까워지기 전엔 그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벽에 막혀 버렸다.

투명하면서도 견고한 벽은 그녀가 폭포에 접근하는 것을 완강히 막고 있었다.

그 벽을 조심스레 관찰할 때였다.

세화는 저를 주시하는 어떤 강렬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저 먼 곳에서, 허공을 밟고 선 어떤 것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빛으로 감싸여 제대로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몸을 떨게 만드는 위엄과 존재감이 아주 먼 곳에서도 확실했다.

시선을 서로 마주하고 있는 동안 다리에서 힘이 풀리는 것만 같았다. 당장 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런 그녀가 존재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제 몸을 숙일 때였다.

마치 땅에 떨어진 빗방울이 흩어지듯 존재가 사라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어떤 깨달음이 찾아왔다.

“……아.”

그녀의 시선이 빛나는 폭포로 향했다.

‘저 폭포 속에 떨어지고 나면 ……난 더 이상 사람으로 남을 수 없겠구나.’

어떻게 그런 걸 알 수 있었을까.

그건 어쩌면 조금 전 사라진 존재가 가르쳐 준 것일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네가 저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싫어.’

그날을 대비하고 있으라고.

‘그러고 싶지 않아.’

두려워진 그녀가 제가 몸을 기댄 투명한 벽에서 황급히 물러섰다.

마른침을 삼키고는 몸을 돌렸다.

그녀가 챙겨야 하는 또 다른 이들을 위해. 이곳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려 걸음을 서둘렀다.

한번 뒤돌아보지 않은 채 종종걸음으로 달리듯 걸어 나갔다.

* * *

세화는 한참 만에야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이며 깨어났다.

차가운 그녀의 작은 손이 단단한 누군가의 손 사이에 잡혀 있었다.

그가 옆에 있을 것 같았다.

온기가 이어져 있는 곳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걱정을 가득 담은 부드러운 눈빛과 마주쳤다.

“나, 오래 잤어요?”

“……아니. 빨리 깼어.”

고작 하루하고 반나절밖에 되지 않았다고.

언제 깨어나든 깨어나기만 해 준다면 빨리 깨어나 주는 것이라고. 나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그 말을 전하는 그의 낮은 목소리가 제법 떨리고 있었다.

사실 너무 많이 걱정했다고.

당신이 깨어나지 않을까 봐 너무 불안해 어찌할 바를 알 수가 없었다고.

숨겨진 의미가 가득한 목소리를 몰라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그의 손에 잡히지 않은 팔을 들어 남자의 목을 감싸 안았다.

아주 적은 힘만으로 그는 손쉽게 그녀에게 끌려 내려왔다.

근육이 단단한 몸이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압박하며 굽어졌다.

안은 듯 안지 않은 듯 몸을 겹친 채로 그녀가 제 입가로 다가온 그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이려 할 때였다.

“뭘 해도 좋은데, 어미가 여기 있다는 것만 알아 주렴.”

“!!!!!!”

“나도 굳이 방해할 생각은 아니다만 네가 나중에 창피해할 것 같아서.”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세화가 제 위에 겹쳐진 남자의 몸을 세차게 밀어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언제 초췌한 모습을 보였냐는 듯 혈색 좋은 얼굴을 한 어머니가 커다란 방 안의 탁자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

“미안하구나. 나도 백 서방과 너의 애틋한 사이에 끼어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식사를 하다 말고 자리를 뜰 수는 없지 않니.”

“??”

제 어머니의 입에서 평온하게 흘러나온 말에 세화가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잠시 껌뻑였다.

그러다 되물었다.

“……백, 서방이요?”

* * *

“그래서 원로 어른께서는 먼저 저희 가문의 재상과 육가 연합의 무사들과 함께…….”

백기하의 목소리를 듣던 천수아가 고개를 저었다.

“원로 어른이라니. 장인어른이라고 불러야지. 아버님이라고 불러도 되고.”

“……장부인께서는.”

“장부인은 무슨. 어머니라고 불러 보시게.”

“어머님.”

백기하가 사양도 하지 않고 천수아가 정해 준 호칭을 사용하며 눈가를 붉혔다.

세화가 그런 어머니의 행동을 이상하게 바라보자 천수아가 어깨만 으쓱했다.

“조금이라도 싫거나 꺼려졌다면 동행할 네가 아니잖니? 내가 방해하지 않고 허락한다는데 눈빛이 왜 그러니.”

“아뇨. 그게 아니라.”

저 남자가 이제야 상황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제가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둘 사이에 대화가 오갔던 것도 아닌 듯한데.

‘그런데 갑자기 백 서방?’

하지만 백기하에게 마음을 준 것은 맞으니 갑작스런 호칭을 지적해 봐야 자신의 꼴만 이상해질 것이다.

‘……사실 전혀 싫지 않기도 하니.’

그녀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백 서방’이라는 호칭을 곱씹으며 눈가를 붉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백기하의 귓불도 더더욱 붉어졌다.

천수아의 시선이 그런 둘 사이를 번갈아 오가자 이를 눈치챈 세화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흠. 그런데 그 뒤엔 어떻게 됐어요? 나는 어머니를 구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는…….”

“아, 그 이후엔…….”

“잠시만 백 서방. 세화도 깨어났으니 내가 먼저 말해도 될까.”

백기하의 말을 자르며 천수아가 끼어들었다.

“네게 먼저 말해 줘야 할 급한 일이 하나 있단다. 내가 갑작스레 신영에게 붙잡혀 죽을 위기에 처했던 이유에 대해서 말이야.”

천수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녀는 제가 육가 연합의 무사들에게 비밀리에 암호가 적힌 서신을 보냈을 때를 기점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경계 받는 것을 눈치채고 그들이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 어떻게 움직였는지 하는 것들을.

“행동반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루에 한 번씩 초소를 나가 무료로 누군가를 치료해 주는 것이 좋았지. 한데 그러던 중 마주치게 되었단다. 연주 그 아이와.”

세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 아일 봤어요. 혼인을 한 것 같더라고요. 일부인이라고 불리며-.”

“아니. 그 아이가 혼인을 한 게 아니야.”

천수아가 눈빛을 가라앉히며 부정했다.

“정확히는 이미 혼인을 한 누군가에게 혼을 먹히고 몸을 빼앗긴 것이지.”

* * *

“으흐흑. 으흑. ……흑흑.”

너른 저택 안, 커다란 방 안엔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어제보다 상태가 더욱 악화된 주수연은 머리 가죽이 녹아내린 덕에 흰 천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외형이야 어쨌건 간에. 멈추지 않고 흘러나오는 울음소리에 시녀들의 안색은 이미 새하얗게 질린 지 오래였다.

주인의 화풀이 표적이 되기라도 할까 봐 그들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흘리지 못했다.

그때 종종걸음을 걸어 나타난 시녀 하나가 급히 방안으로 들어섰다.

살갗이 녹아 근육이 다 드러난 주수연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시녀가 다가오는 짧은 시간도 참지 못해, 힘없는 팔로 바닥을 기며 빠르게 다가갔다.

“거, ……거짓말, 이……었다고 하지? 어때? 내가. ……내가 큰, 큰언니를 ……놔두고 와서. 그래서 ……화, 화가 나신 거 맞아?”

시녀가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주수연이 고함을 쳤다.

“빨……리, 말해!”

결국 시녀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턱을 덜덜 떨며 대답했다.

“……삼, 삼부인께서 이르시기를. ……미안한 말이지만, 너는 그 모습으로도 큰언니가 무사하길 바라야 할 거다. 큰언니가 잘못되면 너는 분명 그분께 더 큰 고통을 당할 테니까. 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끝이야? 다른…… 다른 말은?”

“…….”

주수연이 참지 못하고 다시금 눈물을 터뜨렸다.

“으아악!! 아악!!”

어떻게 버텨 온 목숨이던가. 어떻게 잡고 여기까지 온 생인데 여기서 이런 꼴로 막을 내릴 수 있겠는가.

아무리 사연주의 몸을 한 일부인이 무도한 작자들에게 납치당해 행방을 알 수 없다 해도 그렇지.

“그……게 왜…… 내 탓인……데! ……갑, 갑자기 습……격당한 걸…… 나보고…… 어쩌라……고!”

하지만 정말로 더 이상 몸을 바꿀 수 없다는 현실이 자각되니 피부가 온통 녹아내릴 때보다 더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그녀가 아픔도 잠시 잊고 입술을 떨며 물었다.

“……그럼 ……큰……언니 소식……은 ……아직 모르……는 거래? ……찾으러 누군가를 ……보냈다……거나. 그런 말……은 못 들었……어?”

“그런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시녀가 고개를 젓자 주수연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시녀의 손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손목이 틀어 잡힌 시녀가 소스라치게 놀랐다가 이내 눈을 꼭 감으며 참아 냈다.

“찾, ……찾으라고…… 해.”

“……네, 네?”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무……사들을 다…… 끌어모아서. 큰……언니를 찾으라고.”

아니어야 한다.

몸을 바꿀 수 없다는 말은 거짓이어야 한다.

남편은 분명 제게 화가 나서 그런 말을 한 걸 것이다.

큰언니만 구해 온다면 화가 풀릴 거고. 그러면 다시 제 몸을 바꿔 줄 것이라고.

그것만이 희망인 주수연이 끊어낼 듯 시녀의 손목을 틀어쥔 채 살벌하게 눈을 빛냈다.

“반……드시 큰, 언니를 ……찾아오라고 해.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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