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6/254)

“꺄아아아악!!”

짐승의 몸을 휘감고 있는 빛무리가 주수연에게 닿는 순간 불에 타는 듯한 격통이 찾아왔다.

온몸을 천 갈래로 찢어 놓는 것만 같은 끔찍한 아픔에 주수연이 비명을 질렀다.

고통이 너무나 극심해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산 채로 살이 타고 녹아 가는 상황을 인지할 새도 없었다.

그 모습이 경악스러웠으나 신영은 여전히 달아날 생각도 못 한 채 눈앞의 상황을 멍하니 응시하기만 했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보고 있음에도 자신이 뭘 보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굳어 있던 신영의 눈꺼풀이 천천히 껌뻑였다.

그렇게 다시 시야를 정돈해도 제 앞의 광경은 조금의 변함이 없었다.

저것을 대체 무어라 불러야 할까.

커다란 짐승은 마치 태양이 떨어져 내린 것처럼 몸 깊은 곳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빛을 두르고 있었다.

허리와 등이 이어지는 곳에서부터 퍼져 나가는 빛무리는 마치 날개와도 같았고, 외형은 사슴 같기도 했다.

목을 타고 흐르는 반짝이는 비늘을 가지고 있는 듯했고, 환한 빛 안쪽의 얼굴과 뿔은 용을 닮기도 했다.

노인은 아주 오래 살아왔다.

몸을 바꾸며. 주가를 지배하는 교룡에게 복종하며.

비참한 방법으로 긴 세월 목숨을 이어 오고는 있었으나 그런 노인에게도 이유는 있었다.

그건 아주 오래전, 처음으로 제 아들의 몸을 빼앗아 차지했을 때 꾸었던 꿈이었다.

언젠가 반드시 신수가 되어. 환계의 마지막 적룡이 되어.

죽어 가는 제 세상을 살리고 가장 위대한 신수로써 영원의 시간에 걸쳐 제 존재를 각인시키겠다는.

그리하여 아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그 다짐은, 소득 없이 제 핏줄만을 하염없이 잡아먹게 되는 동안 아주 많이 흐려져 왔다.

하나 일단 신수가 되어야 한다는 명제만은 남아 여전히 노인을 생에 집착하게 했다.

백기하의 등장도 그런 노인의 꿈을 지워 내진 못했다.

유일한 신수는 될 수 없다 해도 환계를 구하는 신수는 제가 될 거라 자신한 것이다.

그랬기에 원대한 꿈을 위한 약간의 희생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하리라 여겼다. 희생 없이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한데 이 순간.

노인의 그런 온 생의 바람이 누군가에 의해 완전히 박살 나는 기분이었다.

‘저것도, 신수인가? 또 다른 신수가 나타났어?’

눈앞에 보이는 것은 환계에 알려진 일곱 신수의 모습 중 어느 것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수임을 의심하지 못하도록 온몸에서 신령스러운 기운이 넘쳐흘렀다.

오색의 빛무리 역시도 생기를 가득 머금어, 허공을 밟고 선 짐승의 긴 다리의 아래로 푸르른 봄풀들이 우수수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노인이 온몸을 떨었다.

등줄기로 차디찬 것이 내달리는 것 같았다.

피가 터질 정도로 강하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럼에도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 어떤 거대한 절망을 막아 낼 수가 없었다.

직감한 것이다. 깨닫고 싶지 않은 어떤 사실을.

아마도……, 죽어 가는 이 세계는 저 존재를 기다려 온 것 아니겠냐고.

오래된 것들은 모두 떠나가고.

이제는 새로운 신수들의 세상이 찾아올 것이라고.

그 역사의 순간에 제 자리는 없을 것이라고.

-어젯밤에 퍼져 나간 그 존재감을 느끼지 못했느냐. 각성의 시기가 도래하고 있는 것을 느끼지 못했느냐! 그것을 막아야 해. 필요하다면 그년을 교룡으로 만들어서라도!

귀를 찢을 듯 세차게 울리던 그 목소리가 지금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아까 그 영력. 백기하가 왔던 것이 아니라 설마. ……설마.’

“너……. 주, 세화……냐?”

그 말에 존재의 눈이 신영에게로 날아왔다.

“!!!!!”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신령한 모습과는 다르게 주수연의 몸을 잔인하게 태우던 존재가 이번엔 신영에게로 날아들었다.

* * *

백기하는 바삐 움직였다.

봉인쇄의 열쇠를 찾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기에, 그는 정신을 잃은 무사들의 몸을 일일이 빠르게 뒤졌다.

너무나 많은 이들 사이를 오가야 했기에 시간이 제법 소요되었다.

때문에 달아나는 사연주와 호위들을 제압하고 간신히 찾은 열쇠를 가지고 불가해한 존재가 달려간 쪽으로 향했을 때는 상황이 모두 종료된 후였다.

눈을 감고 쓰러진 신영의 무사들이 마치 징검다리처럼 길 위에 널려 있었다.

그 흔적을 따라가다가 백기하는 이상한 것을 목격했다.

이 많은 일행이 곳곳을 말발굽으로 다지며 달려간 길이건만.

그 흙길에 마치 발자국처럼 징검다리 모양으로, 막 피어난 듯한 푸릇한 풀과 작은 꽃들이 생생하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빼어나게 아름답지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을 만큼 화려하지도 않은. 그저 소박하고 평범한 작은 꽃과 풀들이었으나 그 어떤 절망과 핍박으로도 짓밟을 수 없을 것처럼 절대 시들지 않을 생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으나 그것을 보는 동안 백기하의 목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어떤 본능적인 환희가 그를 긴장케 했다.

그는 그 흔적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여전히 다른 모습을 한 채 서 있는 세화를 볼 수 있었다.

짐승의 곧은 목은 꼿꼿이 서 있었고 시선은 명징했다.

하지만 빛에 감싸인 몸은 아주 짧은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형체를 유지하지 못한 채 흐트러졌다.

마치 아직 때가 되지 못한 몸체를 억지로 끄집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길게 뻗은 네 개의 다리로 땅 위에서 한 치 정도 떨어진 허공을 밟은 채로, 그녀는 어딘가를 바라보며 낮고 구슬프게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때마다 오색의 빛 사이로 푸른빛이 특별히 더 강하게 일렁였다.

“세화!”

짐승의 시선이 그에게로 날아왔다.

그 순간 짐승의 주위로 폭발하듯 빛이 확산되었다.

“!!”

눈을 뜰 수 없게 만드는 그 현상에 그가 손을 들어 올린 짧은 순간.

밝은 빛무리는 곧 눈을 홀릴 듯이 아름다운 여인의 형체로 변하며 허공으로 흩어져갔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너울지듯 아래로 흘러내리는 동안, 세화가 흐릿한 눈을 그에게 고정한 채로 붉은 입술을 힘겹게 열었다.

“……어머, 니를 부탁, 해요.”

“세화!”

백기하가 허공에서 천천히 떨어지는 그녀를 받아들기 위해 뛰어나갔다.

가까워질수록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녀가 지키던 것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었다.

“장부인!!”

세화를 받아 한쪽에 눕힌 그가 이번엔 쓰러져 있는 천수아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 * *

“아악!”

“부, 부인.”

“이…… 미친, 미친년! 내…… 얼굴을 다…… 태워 먹을 셈이냐!”

고통에 눈이 뒤집힌 주수연이 제 얼굴에 약을 바르는 시녀의 머리채를 힘없는 팔로도 쥐고 흔들었다.

“부, 부인! 부인!”

“당장 ……이년을 끌……고가! 이년의 …얼굴도 불……로 지져버려!”

“부인?! 부인!”

혹시 조금이라도 미적거렸다가 저 분노가 자신에게로 향하기라도 할까 봐.

허겁지겁 달려온 시녀들이 주수연의 얼굴에 약을 바르던 시녀를 끌어냈다.

“부인!! 살려 주십시오. 부인!”

“뭣……들 하는 ……거냐! ……빨, ……빨리 다른 년이 와서 약……을 발라!”

차라리 시녀를 끌고 나가는 것이 낫지.

방금 광경을 보고도 누가 주수연의 얼굴에 약을 바를 수 있을까.

책임을 미루고 싶은 시녀들이 서로를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주가의 비전 약으로도 조금도 회생이 되지 않고 있는데. 그 위에 약을 바르며 고통만 가중하다 보면 다음 희생자는 자신이 되지 않겠는가.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주저하는 시녀들의 모습에, 주수연이 저년들을 다 끌고 가라고 악에 받친 목소리를 내려 할 때였다.

“큰언니는 내팽개치고 홀로 돌아온 주제에 입만 사셨군요. 그분이 들으시기 전에 목소리를 낮추시지 그러세요.”

제 방에 난입하는 불청객을 보며, 고통을 견디느라 입술을 떨고 있던 주수연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네, 네가 뭘…… 알아? 날 구해 주……신 게 그분이니 ……잔소……리 말고, ……빨, 빨리 그, 그분에게 날 데려다……주기나, 해. 몸, ……몸을 어서……바……꿔야 하니……까.”

피부 가죽이 완전히 녹아 곳곳에 근육이 그대로 드러난 주수연의 기억에 그때의 상황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주며 제 몸을 녹이던 것이 어느 순간 다른 곳을 향해 날아갔다는 것과, 그 순간 거센 바람을 동반한 교룡의 영력이 신영과 자신을 구해 왔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

칠부인은 대꾸 없이 주수연을 훑으며 옆에 앉았다.

“뭐야. 할……말이 더 남았……어?”

“언니는 더 이상 몸을 바꿀 수 없다 하셨어요.”

“……? 뭐, ……라고?”

“그분께서 직접 말씀하셨어요. 언니는 더 이상 몸을 바꿀 수 없으니 고통을 줄여 주기 위해 자진을 시키건, ……제 손으로 목숨을 끊어 주건 해 주라고.”

“!”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은 주수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언니를 이렇게 만든 것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영력을 너무 오래 맞아들인 탓에 몸과 혼이 고착되었다고 하시더군요.”

“거, 거짓, 말. 거……짓말!!”

“정말이에요. 언니에 비해 아주 찰나 간 공격당한 신영 역시도 지금 몸을 바꿀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다고 해요.”

“말,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

주수연이 입술을 떨며 부정했다.

하지만 칠부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 반응에서 진실임을 깨달은 주수연이 비명을 질렀다.

“아…… 아악! 아아악!”

* * *

신영 역시도 주수연과 마찬가지로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다만 그가 누워 있는 곳은 등불의 불조차 제대로 장소를 밝히지 못하는 어느 거대한 공동이었다.

그 안에서 습한 바람이 움직였다.

교룡의 숨이 뿜어질 때마다 신영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약으로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는 피부가 더 이상 녹아내리는 것을 제 주인이 간신히 막아주고 있었다.

“모, 몸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

“주인님.”

-조금이라도 더 그것의 영기에 노출되었다면 완벽히 혼이 몸에 붙어 불가능했겠지만.

“그, 그럼 할 수 있으신 겁니까. 괜, 괜찮은 거겠지요?”

-……그래도 성공할 수 있다 장담할 순 없다.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괜찮습니다. 일단 시행하겠습니다. 이, 이 몸으로는 도저히…….”

노인이 고통을 견디기 위해 뼈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흉측한 주먹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새로운 신수의 주위에 일렁이던 오색의 영기는 주변에 산재한 나무와 풀들은 생생히 일깨웠건만.

노인의 몸은 용암을 퍼붓듯 뜨겁게 녹여 버렸다.

“……그것이, 그, 년이 맞습니까?”

노인이 허물어진 잇몸에도 개의치 않고 이를 악물며 물었다.

“그, 년이 주, 세화입니까? 신수로 탈, 피한 것입니까?”

-아니. 아직 하늘이 열리지 않았다!

교룡이 거칠고 갈라진 울음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그때마다 마치 쇠사슬이 바닥에 쓸리는 듯한 듣기 괴로운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니 지금 그년을 잡아야 해! 지금이 아니면 잡을 수 없을지 모르니까!

너도 이제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이라고.

교룡의 목소리를 들은 신영이 시뻘게진 눈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왜 주인이 그토록 명윤의 여식을 잡아 오라고 했는지. 왜 그토록 서둘러야 한다고 했는지 이제야 실감했던 것이다.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결코 네년이 새로운 신수로 거듭나도록 용납하지 않을 것이야!’

피가 터지도록 입술을 깨물어 격통을 견디며 노인이 제 모든 것을 걸고 맹세했다.

그때였다.

두려움이 가득한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신영의 호위 몇몇이 그 공동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중 누군가의 품 안에 무언가가 안겨 있었다.

“……모셔, 왔습니다. 신영.”

살가죽이 다 타버린 신영의 앞에 호위가 안고 온 것을 내려놓았다.

정신을 잃은 주경현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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