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화가 볼 때 제 어머니의 저런 행동은 뒤를 생각하고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자신이 전생, 처형장의 마지막에서 천신주가 올려진 쟁반을 쳐낼 때의 상황과 동일했다.
자진할 각오를 한 것이다. 여기서 죽을 거라고 생각해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더 타격을 입히려 한 것이다.
‘안 돼.’
행동에 거침이 없는 어머니이니 그들이 당황한 이 순간 혀를 씹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찔했던 전생의 일이, 피 분수를 뿜어내며 목이 잘려 나가던 부모님의 환상이 다시금 그녀의 눈앞을 새빨갛게 잠식하는 듯했다.
‘안 돼!’
그렇다고 자신이 여기 온 것을 먼저 드러낼 순 없었다.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당연히 감수할 생각이었으나 아직 오라버니들을 찾기 전인데 주가의 공적으로 먼저 알려질 순 없었다.
그리하여 세화는 제 어머니를 호송해 온 무사의 머리를 눈앞에 두고, 살도 걸지 않은 활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뻐억―!!
마치 바윗돌로 찍은 듯한 소리를 내며 피가 터졌다.
무사가 억 소리도 내지 못하고 무너져내렸다.
* * *
독분은 안개처럼 빠르게 시야를 가로막으며 퍼져 나갔다.
허나 그 모습을 보면서도 마당을 가득 메운 무사들 중 크게 위기감을 느낀 이는 사실 없었다.
이런 독분 자체는 무사들에게 그리 큰일이 아닌 것이다.
잠시 호흡을 참고 눈을 감은 채, 영력을 휘둘러 독분을 허공으로 날려 버리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뻐억―!
휘오오!!
돌이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난데없이 강한 바람 소리가 이어졌다.
갑작스레 나타난 낯선 기척에 반사적으로 눈을 떴던 이들이 자신들에게로 덮쳐오는 흙바람과 독분의 회오리를 확인하고 비명을 질렀다.
“아악!”
“으아악!”
내력을 끌어 올리기도 전에 눈에 독분이 닿은 무사들이 두 눈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맙소사! 누군가 있다! 신영을 지켜라!”
채앵!
뿌연 연무를 가르며 예리한 검날들이 사방을 겨눈 채 뻗어져 나왔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도 무사들이 신영을 보호한 채 진을 짜 검을 앞으로 빼 들었다.
“부인! 이리 오십시오!”
호위들이 신영을 끌어당겼고, 오 부인의 시녀들 역시도 주수연을 둥글게 감싸 지켰다.
“너도 이리 와!”
주수연은 시녀들 사이로 숨으면서도 제 앞에 있던 천수아를 놓치지 않고 끌어당겼다.
“이런 제길! 독이 흩어지지 않습니다!”
“비켜!”
상급자인 듯 보이는 무사가 제 앞에 선 자를 밀어내고 영력을 폭발시켰다.
진한 붉은색의 힘이 터져 나오며 그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독분이 빠르게 흩어져갔다.
하나 그것뿐이었다. 뿌연 안개 같은 독분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다시 그들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허억!”
“컥!”
흩어지는 연기에 방심했던 몇몇이 목을 부여잡으며 피를 쏟았다.
퍼억! 뻑!
그 사이에도 천수아를 호송했던 무사들 사이로 돌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계속 터져 나왔다.
“동남쪽이다!”
“아니, 서쪽에!”
그 사이 천수아를 호송한 상급관 역시도 기감을 돋우다가 흠칫했다.
분명 제 기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건만 무언가가 그의 옆구리를 걷어찬 것이다.
퍼억!
“컥!”
내장이 터져 나가는 듯한 격통에 순간 숨이 막혔다.
정신이 날아가는 것처럼 혼미해지는 순간 이번엔 목 뒤로 무언가가 내리쳐졌다.
“!!”
“흐……억.”
소리가 점점 자신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자 신영의 고목 같은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이 독분이 있는 힘껏 영력을 가해도 도무지 흩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미친…….’
신영의 영력으로도 흩어지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그걸 할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백기하다! 백기하가 온 거야!’
“뭣들 하느냐! 어서 나를 보호하며 철수해라. 어서!”
‘백기하! 이 개새끼가!’
백가로 돌아간 줄 알았던 그놈이 왜 여기까지 온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허나 만약 소란을 틈타 자신을 암살하려 하는 것이라면.
‘지금 이렇게 우왕좌왕하면서는 그를 당해 낼 재간이 없어!’
“신영! 이쪽으로 오십시오! 제가 모시겠습니다!”
목소리를 내느라 조금 숨을 삼키고 말았기에 목구멍이 불에 지진 듯 타들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호위 무사가 실명될 각오를 하며 안력을 돋웠다.
“너희들은 뒤를 지켜라! 절대로 추적이 따라붙게 해선 안 된다. 알겠느냐!”
그때 오부인이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황급히 달려왔다.
“나를 데려가세요, 신영! 나를 데려가요!”
천수아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 날 듯이 달려온 그녀가 신영의 무사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몸을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영력이 부족해 대응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른 데로 갈 것이지. 저까지 챙기라고.’
신영이 시야가 막힌 틈을 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이 여자가 여기서 확실히 죽을 거라는 확신이 있지 않고서야 그런 제 마음을 드러낼 순 없었다.
“당연히 함께 가셔야지요. 이리 오십시오!”
일단 독분 사이를 빠져나가야 한다고 판단한 이들이 헐레벌떡 뒤로 물러섰다.
“말에 올라라!”
“나머지는 뒤를 지켜!”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린 그곳에서 초조하게 짓씹힌 세화의 입술 사이로는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독분이 적들의 시야를 막고 있었지만 동시에 세화 그녀의 시야 역시도 막아서고 있었던 것이다.
바람을 조종해 앞을 보거나 숨을 쉬는 데는 지장이 없게 만들었으니 적들보다는 상황이 나았으나 그뿐이었다.
주가의 봉인쇄는 걸려 있는 것만으로도 착용자의 목숨을 갉아 먹는 악랄한 신기였고, 열쇠가 없이는 절대 훼손시킬 수 없었다.
만약 여기서 저들을 놓친다면 어머니를 구해도 곧 다시 그녀를 잃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화가 저를 따라 이 난장으로 뛰어든 채 정신을 잃은 이들의 옷을 빠르게 뒤지는 백기하에게 물었다.
“있어요?!”
“없어!”
열쇠를 아직 찾지 못했다는 대답에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참수하라!”
“집행하라!”
귀를 울리며 그들의 죽음을 부르짖던 그 무력한 상황을 다시 맞닥뜨리기라도 한 듯 분노가 치솟았다.
“목소리가 들렸다! 저쪽이다!”
저택의 바깥에 있다가 소란을 듣고 몰려온 이들이 끊임없이 뒤엉키고 있었다.
‘이렇게는 안 돼.’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치들 사이에 섞여 봉인쇄도 찾지 못하고 어머니도 잃어버릴 수 있었다.
이를 악문 세화가 백호로 변할 걱정 따위도 관계치 않고 제 몸 안에 있는 힘을 모조리 끌어 올렸다.
그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이것저것 모두 뒤섞인 제 영력을 내보일 수 없다는 생각에 한 번도 이렇듯 모든 영력을 끌어 올린 적이 없었으니까.
새빨간 영력의 불꽃과 푸른 영력의 파도가 생겨났다.
하얀 영력의 회오리와 황금색 영력의 빗방울이 그녀의 주위에서 휘몰아쳤다.
‘아…….’
세화가 제 주변을 둘러싼 힘을 받아들이며 잠시 신음했다.
이건 대체 뭐지?
이 느낌을 뭐라 말해야 할까.
제 몸을 중심으로 하늘과 땅으로 이어진 기둥이 세워지는 듯했다.
아찔한 고양감.
자칫 잘못하면 이 거대한 힘 속에서 자신의 존재조차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
그리고 어느 순간 세화는 한 줄기 빛처럼 변해 앞으로 튀어 나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주변을 메우고 있던 뿌연 흙먼지와 독분은 어느새 파도가 갈라지듯 주변으로 흩어졌다.
빛의 강처럼 반짝이는 힘의 궤적이 주변의 모든 것을 몰아냈다.
저택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신영의 무사들 또한 거센 힘에 밀리며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 힘을 쏟아 내는 세화의 모습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백기하는 저도 모르게 그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세화일 텐데. 분명 그녀일 텐데 저 모습을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었다.
사람의 모습인 듯, 짐승의 모습인 듯.
용과 닮은 듯도 했고, 백호의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사슴처럼 보이기도 했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완벽히 새로운 존재 같기도 했다.
그 존재가 저를 가로막는 것들을 모두 밀어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원하는 것을 응시하는 존재의 눈이 새하얗게 빛났다.
* * *
오부인은 천수아를 제 앞에 태운 채 정신없이 말을 달렸다.
이 순간에는 제가 사연주를 보살피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것도.
이대로 홀로 돌아간다면 제 남편이자 주인인 존재에게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끌고 오기 전 강하게 목덜미를 내리쳐 기절시킨 원로 부인이 짐이 되고 있었지만, 주수연은 천수아를 버릴 마음이 없었다.
직감한 것이다.
갑작스레 저택을 습격한 무언가가 이 부인을 노리고 왔다는 것을.
‘젠장, 내가 몸만 바꾸지 않았어도. 내가 영력만 제대로 쓸 수 있었어도.’
오부인은 때가 아닌 시기에 몸을 바꿨던 것을 자책하며 계속 앞으로 달려나갔다.
한데 어째서일까.
“허억. 허억.”
무사들이 뒤를 막고 있었고 비명이 뒤엉키던 저택은 멀어져만 가고 있는데.
이렇게 빠르게 달아나고 있건만 왜 이렇게 안심이 되지 않는 것일까.
‘내가 이 원로 부인 년을 데리고 있어서 그런가? 저 무언가가 나를 쫓아올 거라고 생각해서?’
그때였다.
“오, 옵니다! 옵니다!”
신영의 행렬 뒤에서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아악!”
“컥!”
검을 뽑는 소리가 날 새도 없이 비명 소리가 이어졌다.
뭐지? 대체 뭐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도대체 몇 명이나 쫓아오는 것인지. 얼마나 강한 이가, 대체 누가 쫓아오는 것인지 궁금했으나 오부인은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내달렸다.
그 잠깐의 미적임에 습격이 제게까지 닿을까 봐 염려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였다.
정신없이 말을 재촉하던 그녀는 저 멀리 신영이 멈춰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노인은 마치 달아날 생각도 하지 못한 것처럼 오부인의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고목 같은 눈꺼풀을 껌뻑이고 있었다.
그것이 이상해 오부인이 자기도 모르게 뒤를 살폈다.
“!!!!”
속도가 늦어진 것은 아주 찰나였다.
하지만 그 방심이 그녀의 명운을 바꿨다.
“뭐, 뭐야?!!!”
갖가지 색으로 빛나며 무서운 속도로 오부인을 쫓아온 것이 그 순간 그녀를 덮쳐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