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 밤의 저택은 어제와는 다르게 소란스러웠다.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던 지난밤과는 달리 지금은 무장한 무사들이 저택 곳곳에 서 있었다.
그랬기에 숨어드는 것은 더욱 신중해야 했다.
하나 곧 바라던 상황이 시작되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손톱만 한 달이 하늘의 중심을 넘어가는 그 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너른 저택의 지붕 위에서 몸을 낮춘 채 세화는 바짝 긴장해 있었다.
그런 그녀를 백기하가 염려스러운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바라던 시간이 저택의 측문을 통해 찾아왔다.
잔뜩 높여 둔 그들의 기감에 어떤 소란스러움이 잡혀 든 것이다.
동시에 일어선 세화와 백기하가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측문으로 굳은 표정의 무사들이 말을 탄 채 들어서고 있었다.
소속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인장도 달지 않은 채였다.
그들의 뒤로 똑같이 인장이 제거된 투박한 마차가 들어서고 있었다.
어떤 사실을 예감한 세화의 시선이 그 마차에 고정됐다.
그 사이 그들이 몸을 숨긴 저택에서 느른한 목소리가 먼저 흘러나왔다.
“데려왔어?”
주수연이었다.
새빨간 의복의 목깃을 어깨까지 젖힌 선정적인 차림이었다.
그걸 보면서도 무사는 드러난 하얀 목선에 눈을 빼앗기기는커녕 두려움이 역력한 시선으로 조용히 대답했다.
“예. 하지만 부인. 신영께서 저택으로 데려오라 명하셨는데…….”
“지금 신영의 명이 내 말보다 중요하다 이건가?”
무사가 서둘러 부인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부인. 다만…….”
그는 무어라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으나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제 뒤에 선 이를 향해 눈짓했다.
그의 뒤를 따라온 병사 하나가 투박한 나무 마차의 문을 열고 안에 타고 온 이를 끌어 내렸다.
초췌한 모습의 천수아가 두 손이 묶인 채 모습을 드러냈다.
‘!’
마차에서 내리는 어머니의 표정은 마치 처형장에서의 그때를 생각하게 했다.
눈빛도 태도도 의연하기 그지없었으나 감출 수 없는 피로감이 온몸에 깊게 배어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인내심이 강한 이였으니 저렇듯 초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데까지는 많은 일이 있었을 터였다.
당장에라도 튀어 나가려던 세화를 이번에도 백기하가 잡아당겼다.
“왜요.”
“어머님의 목 부분을 봐 봐.”
세화의 시선이 그의 말을 따라 황급히 움직였다.
‘……!’
옷깃으로 가려진 목 사이로 가느다랗게 보이는 것은 주가에서 죄인에게 채우는 영력 봉인쇄였다.
분노가 너무나 강하게 치밀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의 말대로 몸을 낮출 수밖에 없었다.
저것을 푸는 열쇠를 누가 가지고 있는지 지금으로써는 알 수가 없었으니까.
하얀 이에 짓씹힌 입술 위로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강하게 틀어쥔 주먹 안쪽도 마찬가지였다.
몸을 떠는 그녀의 어깨를 백기하가 제 손으로 감싸 안던 순간, 비스듬한 자세로 서 있는 주수연에게 천수아가 담담히 물었다.
“쓸데없이 나를 부른 게 너냐.”
그 평온한 태도만 보면 손목이 묶였다는 것도, 목에 봉인쇄를 차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주수연이 그런 천수아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싸늘하게 내뱉었다.
“내가 누군지를 이제 알게 됐으면서도 그따위 말투를 쓰는 거야? ‘저를 찾으셨습니까’라고 해야지.”
피식 웃음을 흘린 천수아가 주수연을 비웃듯 응시했다.
“네가 뭔데 존대를 해 주어야 하지? 남의 몸에 기생해 벌레처럼 살면서도 존대는 받고 싶더냐?”
“……뭐?”
천수아도 주수연이 그런 것처럼 그녀의 위아래를 성의 없이 훑으며 대답했다.
“남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신이 나 염병을 하고 있구나. 굳이 사실을 감출 생각도 없는 것 같은데 내가 어쩌다 그 사실을 알아챈 게 뭐가 그리 대수라고 날 이토록 피곤하게 끌고 다녀.”
거침없는 천수아의 말투에,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들어본 적 없는 오부인의 얼굴이 황당하게 일그러졌다.
“이년이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했구나. 너희들은 뭘 하느냐. 꿇려라!”
무사들이 달려와 천수아의 어깨를 찍어 눌렀다.
비릿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린 주수연이 천수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하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걸 알고 있다면 내 화라도 돋구고 싶겠지. 그 마음 모르는 건 아니야. 너 같은 년이 많았거든.”
“하하.”
천수아의 눈매가 가늘게 휘었다.
“굳이 내 경멸에 이유를 찾고 싶어? 그럴 필요 없어. 난 그저 네가 너무 같잖아서 비웃는 거니까.”
천수아는 마치 노래를 하듯 덧붙였다.
“빼앗은 몸으로 살아야 하니 제대로 드러난 채 살지도 못했겠지. 그럼 그 긴 세월 대체 뭘 했을까. 먹고 자고 분뇨나 쏟아 내는 나날 아니겠냐. 그게 짐승과 다를 바 뭐가 있지?”
“……이년이 그래도 입조심을 안 하고!”
짜악―!
거칠게 내리쳐진 천수아의 얼굴이 옆으로 팽개쳐지듯 돌아갔다.
순식간에 새빨개진 한쪽 볼이 빠르게 부어올랐다.
하지만 천수아는 아픔도 모르는 듯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다른 이들이 네네 하며 복종하니 세상이 네 발밑에 놓인 것 같아? 우쭐할 것 없어. 너도 알고 있겠지. 너 같은 것을 속까지 존중하고 받들 이는 아무도 없다는 걸.”
“…….”
“뭐. 말귀를 알아들을 머리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리 오랜 세월 어린아이들을 잡아먹고, 가치라곤 없는 생을 구질구질하게 이어 가고 있진 않겠지. 말해 봐야 내 입만 아플 테니 너 같은 것과 더는 말을 나누지 않겠다.”
주수연의 뒤에 시립해 있던 시녀들과 주위를 둘러싼 무사들이 더 사색이 되었다.
혹여 시선이 마주쳐 주인의 분노를 사기라도 할까 봐, 그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석상처럼 굳어진 채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
그리고 주수연의 얼굴에선 표정이 모두 지워져 있었다.
더없이 서늘하게 천수아를 내려다보던 주수연이 높낮이가 사라진 목소리로 명령했다.
“이년의 족쇄를 풀어. 내가 지금 이년의 간장을 다 끄집어내야겠으니.”
음산하고 탁한 살기가 주수연의 눈 안에서 요동쳤다.
“그것은…….”
책임자인 듯 보이는 무사가 반드시 살려 데려와야 한다는 신영의 명을 떠올리며 찰나 망설였다.
하지만 지금 제가 죽으면 그 명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결국 “알겠습니다.” 하고 무겁게 대답한 뒤 천수아에게 다가갔다.
세화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 봉인쇄만 풀리면 곧장 어머니를 구하러 뛰쳐나갈 생각이었으니까.
한데 그때였다.
“문을 열어라! 신영께서 오셨다! 문을 열어라!”
바깥이 소란스러워진다 싶더니 한발 앞서 달려온 연락병이 거칠게 대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주수연의 신경질적인 눈동자가 문으로 향했다.
연락병이 얼마나 빨리 달려왔던지, 하인들이 측문을 개방하고도 한참 만에야 신영이 도착했다.
노쇠한 이후 외출 시엔 항시 마차를 사용하던 그였는데 오늘은 말을 타고 있었다.
“오부인. 이 여자는 아직 죽일 수 없습니다.”
신영이 호위의 부축을 받으며 내려와 말했다. 근육의 떨림이 그대로 보이는 데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오래 기다리시게 하지 않을 겁니다. 이유는 금방 만들어 낼 수 있으니 그때까지만 양해해 주시죠.”
“내가 왜 그래야 하죠? 이유 같은 거야 죽이고 공표해도 늦지 않을 텐데?”
신영이 고목 같은 얼굴을 저었다.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전쟁 동안 명윤의 인망이 높아졌고, 저택을 정리해 배상을 끝낸 것과 실종 사건을 책임지기 위해 백가로 떠난 일로 상황이 조금 복잡해졌습니다.”
“…….”
“하시는 일을 막으려는 것이 아니니 잠시 말미를 주십시오.”
오부인의 호흡이 조금 거칠어졌다.
신영이 그 본의 아닌 침묵에서 수긍의 가능성을 읽어 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자신이라고 명윤의 부인을 구하고 싶겠는가? 하지만 명윤의 여식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저 여자가 아직 필요했다.
하여 오부인이 명윤의 부인을 데려간다는 말에 허겁지겁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다. 제가 아니고서야 아무도 막을 수 없을 테니까.
“그럼 저 여자는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아니. 그냥은 갈 수 없어요.”
이를 사리문 주수연이 새빨간 입술을 물며 내뱉었다.
“죽일 수 없다면 혀라도 뽑아야 해요. 주제를 모르고 나불대는 저 혀를 뽑아 다시는 함부로 지껄이지 못하게 하려니까.”
신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외형만 다치지 않는다면 그런 일이야 마음껏 하십시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천수아가 목을 울렸다.
“신영. 대체 꼴이 그게 무엇입니까.”
도무지 참으려야 참을 수가 없는 것처럼 쉬이 멈추지 못하고 낮게 웃었다.
“아무리 욕망을 위해 양심도 책임감도 내팽개쳤다 해도 그렇지. 최소한의 자존심은 챙기셔야죠. 이 많은 무사들을 세워 두고 그리 비굴하게 굽신거리실 생각이십니까?”
“곧 뽑힐 혓바닥이지만 그대로 말아 놓거라. 널 여기서 데려간다는 것이 널 살린다는 뜻은 아니니까.”
신영이 이를 갈듯 음산하게 내뱉었다.
“모르는 사이 제가 명을 달리하기라도 할까 봐 겁먹은 개처럼 헐레벌떡 달려오신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니죠.”
천수아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신망이라고는 없는 신영을 향해 제 남편을 따르는 이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라도 할까 봐, 다리까지 떨며 바쁘게 먼 길 오신 분이 지금 무슨 말씀을.”
천수아의 시선이 주변을 한번 돌아보고, 다시 신영에게로 돌아와 고목 같은 노인의 위아래를 훑었다.
“헌데 지금 보니 굽실거리시는 모습이 아주 천성인 양 자연스럽습니다. 허니 비밀스럽게 조언 드리건대 차라리 그 여잘 신영으로 부르세요. 그러면 보는 이들이 신영의 위가 바뀌었구나, 상황이라도 이해하지 않겠습니까.”
“……너!”
“그래서 신영이라는 호칭에는 먹칠하시지 마셔야죠. 가주 자신의 체면이야 길바닥 개똥보다 못한 처지로 버리셨어도, 주씨 혈족의 피마저 그리 여겨지게 하시면 안 되니까요.”
“이, 이년이.”
이를 악문 노인의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
분기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것처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잘 생각해 보니.”
신영이 살기등등한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사지는 없어도 되겠습니다. 팔다리야 솜을 달아 옷으로 가려놓으면 달려 있는지 아닌지 다른 이들은 모를 테니 말입니다.”
“신영이 이제야 바른 판단을 하는군요.”
그 대답 한번 마음에 든다는 듯이 주수연이 소리를 내며 웃었다.
“네년이 제법이구나. 입만 열면 누군가의 분노를 살 수 있으니 말이다.”
“숨이 붙어 있는 것만으로 분노를 살 수 있는 네년만 하겠느냐. 지금 이곳에서도 네년이 당장 여기서 고꾸라지길 바라는 이가 한둘이 아닐 텐데 생각을 좀 하면서 지껄여야지.”
“…….”
“설마 주가 가주가 네게 존대를 하고 청을 넣는다고 하여 그는 안 그럴 것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내 장담하건대 네 명줄이 한시라도 빨리 끊어지길 그가 제일 바랄 것이다. 저리 굴욕적으로 네게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데, 아니라면 그게 더 이상하지.”
“…….”
“…….”
지극히 모욕적인 말에 신영의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괜히 한마디를 덧붙였다가 열 마디를 듣고 난 오부인 역시도 이런 미친년은 처음 본다는 기막힘을 담아 허공에 황망히 숨을 뱉었다.
“칼을…… 갖고 와라. 내가 직접 저 혀를 난도질해 잘라 내지 않고는 성이 차지 않을 듯하니.”
살기등등한 주수연의 모습에 창백하게 질려 있던 시녀 중 하나가 급히 단검 하나를 꺼내 들고 달려왔다.
새빨간 검집을 보지도 않고 빼내 땅바닥에 팽개친 주수연이 이를 뿌득 갈며 걸어갔다.
천수아는 그 모습을 조금의 동요도 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네년이 자초한 일이니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날 원망하지 말아라.”
“하하.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 원망받는 일은 또 두렵더냐? 벌레처럼 사는 네 인생사에 아쉽고 꺼려질 게 뭐가 있다고 하라 하지 말라 참견을 해.”
“……이 미친년이 끝까지! 잡아! 이 독살스러운 주둥이를 벌리고 혀를 잡아 빼!”
단검의 손잡이를 세차게 움켜쥔 주수연이 천수아의 어깨를 잡아 누르는 무사들을 향해 소리칠 때였다.
시선이 잠시 옮겨간 그때를 놓치지 않고 천수아가 발을 차올렸다.
발목 부분을 찢어 놓았던 버선이 신발과 함께 날아가며 뿌연 분이 흩어졌다.
“맙소사! 숨을 멈춰! 독이다!”
누군가 경악하던 그 순간이었다.
마치 활을 쏜 듯 날렵하게 세화가 튀어 나갔다.
거침없이 날아 안개처럼 허공으로 퍼지는 독분 사이를 가르며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