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그따위로 손을 서툴게 놀리고도 살려 달라는 말이 나와? 또 하나는 어딨어? 그년도 끌고 와라.”
그 뒤를 이어 또 한 명의 시녀가 똑같은 모습으로 질질 끌려 나왔다.
이 시녀는 창백해진 모습으로 죽음을 각오한 듯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먼저 끌려 나왔던 시녀가 주수연의 발치에 엎드리며 애타게 빌었다.
“부인, 오부인. 살려 주십시오. 그간 부인을 모셔 온 시간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방금 들려 온 호칭에 세화가 눈을 깜빡거렸다.
‘오부인?’
“모셔 온 시간을 생각하라고?”
더없이 어이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허공을 향해 웃은 주수연이 허리를 굽혔다.
“그렇게 모셔 온 시간이 길었음에도 나를 아직 모르더냐? 내가 각별히 조심하라 했지. 그런데도 그런 실수를 해?”
“부, 부인.”
“내가 지금 이 몸으로 바뀌지만 않았어도 너 같은 건 당장 이 자리에서 영력을 빼앗고 재로 만들어 버리는 건데.”
“살, 살려주십시오. 부인. 제발.”
“하지만 뭐, 그래. 네가 나를 모셔 온 시간을 생각하면 기회를 주지 못할 것도 없으니.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떠냐.”
주수연이 길고 날카롭게 정리된 손톱으로 시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붉은 핏방울이 손톱 끝이 파묻힌 피부에서부터 천천히 맺혀 흘렀다. 시선이 더없는 즐거움을 담고 반짝였다.
“너를 용서한다 해도 실수를 저지른 네 손발과 감히 그러고도 할 말을 가진 네 혀는 용서할 수 없어. 그러니 네가 여기서 그것들을 스스로 잘라 내는 거야.”
“!!”
“마지막 남은 네 손 하나는 내가 친히 잘라 주마. 그러고도 네가 죽지 않으면 그때는 기꺼이 널 살려 주고. 어때? 할 수 있겠어?”
“부인, 부인! 제발 이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한 번만 살려 주세요!”
“못 한단 말이군. 재미는 없네. 끌고 가라!”
그때 그런 주수연의 뒤로 느릿한 발을 끌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만 좀 해. 난 괜찮으니.”
사연주였다.
“저년들에게도 다행이죠. 언니의 피부에 상처가 났거나 혹 피라도 흘렀다면 내가 오늘 저것들을 포를 떠서 죽였어요.”
“됐으니까 시끄럽게 굴지 말라고. 머리 아프니까.”
별다른 말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주수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다급하게 사연주에게 다가가서는 이마를 짚어 보기도 하고 맥을 잡아 보기도 하며 부산하게 굴었다.
“두통이 심해요? 의원을 부를까요?”
“아니야. 좀 자면 나을 것 같아. 그러니 이제 그만 가 봐.”
“아까 병이 깨지는 바람에 놀란 것 아니에요? 당장 약을 준비시킬 테니 좀 먹어 봐요.”
“됐으니 그만 가 보라고.”
“……알겠어요. 대신 이년들은 언니가 지금 드세요. 그러면 갈게요.”
“!!”
“!!”
주수연의 말에 바닥에 꿇려진 시녀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우리가 언니 건강에 얼마나 민감한지 알고 있잖아요. 드세요, 언니.”
“하지 마. 귀찮아.”
“왜요. 저것들이 불쌍해서 그래요?”
“불쌍?”
사연주가 허공을 향해 헛웃음을 토해 냈다.
“저것들이 뭐가 불쌍해. 네깟 것들이 뭐가 불쌍해. 이 환계에서 내가 제일 불쌍해. 너희 때문에 억지로 아등바등 살아 있어야 하는 내가!”
부드럽게 웃은 주수연이 그런 사연주의 어깨를 도닥였다.
“그러니 얼른 드세요. 그러면 더 이상 언니를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
짜증이 가득한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던 사연주가 결국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 말대로 하지 않고서야 이 공방이 끝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부, 부인!”
“부인!”
사연주가 다가올수록 공포에 질린 듯 시녀들이 울부짖었다.
곁에 시립해 있던 다른 시녀들이 그런 두 사람을 바닥에 찍어 눌렀다.
세화가 그 공방을 의문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때였다.
사연주가 한 시녀의 머리를 틀어쥐었다. 시녀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아아악!”
그 비명과 함께 시녀의 몸이 빠르게 노화되어 갔다.
‘!!’
순간 소리를 낼 뻔한 세화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시녀는 마치 오랜 세월을 한순간에 삼킨 듯 점점 주름지고 늙어 가다가 이내 다 타고 남은 장작처럼 하얀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다른 시녀가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세요, 부인! 일부인!”
사연주는 망설임 없이 그 시녀의 머리 역시 틀어쥐었다.
“아악!”
고통이 가득한 비명 소리와 함께 그 시녀의 몸도 빠르게 시들어 갔다.
하얗고 탄력 있던 피부는 순식간에 누렇게 바뀌었고 검버섯과 주름이 온몸을 뒤덮었다.
시녀가 먼저 사라진 다른 시녀처럼 하얗게 재만 남기고 사라지려던 순간이었다.
사연주는 속이 거북한 듯 시녀에게서 손을 떼고 가슴을 짚었다.
“이 정도면 됐지?”
“왜요. 마저 드시지.”
“됐어. 이런 애들 백 명을 먹어 봐야 도움도 안 돼. 먹으려면 질 좋은 걸 하나 먹는 게 낫지.”
“아!”
그 말에 뭔가를 떠올린 주수연이 서둘러 제 소매를 뒤졌다.
꺼내 든 것은 진한 진갈색의 영단이었다.
“깜빡 잊고 있었네요. 그럼 이걸 드세요. 영력의 질이 아주 좋아요. 원래 사슴이 몸에 좋잖아요.”
‘……사슴?’
“귀부인 중에 가장 영력이 높다는 원로 부인의 것이니 드시기에도 나쁘지 않을 거고요.”
‘……!!!’
“조금 아깝긴 하더라고요. 영력도 높고 얼굴도 제법 반반하니. 조금만 젊었어도 몸까지 바꿨을 텐데.”
주수연이 작은 영단을 사연주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됐어. 그렇게 좋은 거면 너나 먹어.”
“내일이면 그 부인이 여기 오잖아요. 그때 나도 먹으면 되죠. 그러니 오늘은 언니 먼저 먹어요.”
“됐다니까.”
“나도 조금 맛을 봤는데 나쁘지 않더라고요. 언니가 아프면 안 되니까 지금은 언니 먼저 먹어요.”
‘…….’
사슴은 천가의 상징이다. 천가 성을 쓰는 원로 부인이라 하면 세화의 어머니 천수아밖에 없었고.
눈앞이 새빨갛게 달궈지는 듯했다.
‘지금 내 어머니를 놓고서.’
분노한 세화가 이를 악물고 몸을 떨었다. 시선은 사연주의 손에 들린 작은 진갈색 영단을 향한 채였다.
‘네가 가지니 내가 가지니, 겸양을 떨고 있다고? 내 어머니의 목숨을 놓고서?’
재가 되어 흩어진 시녀들의 모습은, 처형장에서 한 줄기 핏물로 변해 생명의 빛을 꺼트리던 제 가족의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이 저택 내에 몇 명의 호위가 있는지에 대한 것도, 지금은 변용을 하지 못한 상태라는 것도 세화의 뇌리에서 지워져 버렸다.
그대로 뛰어내리려던 순간이었다. 그런 세화의 허리를 무언가가 잡아챘다.
“!”
“……쉬.”
백기하였다.
“놔요! 저건 어머니의…….”
“참아. 조금만 참아.”
그가 복면 위에서 세화의 입을 막으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참으라고 해서 미안해. 그대 마음 알아. 하지만 내일 장부인께서 여기 오실 거라잖아. 그때를 노려야지.”
백기하가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 역시 조금 전 목격한 상황에 당황하며 한시라도 빨리 장부인을 찾아 구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적진 한복판에 있는데다, 장부인이 아직 어디 계신지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가 아닌가.
“내일 오신다니까 분명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계실 거예요. 무사들의 하루 거리를 계산하여 이 근방을 샅샅이 뒤지면 나올 거고요.”
“영단을 빼내야 하셨던 것은 나도 걱정되지만 일단 여기 모셔 왔을 때 구해 드리는 게 어긋나거나 실패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
백기하가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냉정해야 해. 그대 역시도 백호로 변하지 않기 위해 내단까지 빼낸 상태잖아. 지금은 위험해.”
“…….”
“한 번만 참아. 그리고 내일 털끝 하나 다치시지 않게 장부인을 모셔 오자.”
“…….”
침묵하는 그녀의 몸이 잘게 떨렸다.
그의 말이 옳다는 걸 아는 까닭이었다.
그렇게 세화가 분을 삭이는 사이 사연주는 작은 영단을 입에 넣고 흡수시켰다.
표정이 밝아진 주수연이 그런 사연주를 방 안으로 데려가 침상에 눕혔다.
“좀 쉬고 있어요. 내가 감히 언니를 놀라게 한 저년을 끌고 가서 가죽을 벗겨 버리려니까.”
“…….”
대답도 하기 싫은 것처럼 사연주가 돌아누웠다.
그런 사연주의 어깨 위로 이불을 덮어 준 주수연이 서슬 퍼런 눈을 하고 돌아섰다.
“끌고 와.”
그렇게 주수연이 어딘가로 향했다.
사연주에게 영력을 먹히고 백발로 변한 시녀가 주수연을 따르는 이들의 손에 질질 끌려 사라졌다.
열려있던 방문까지 닫히고 나자 온 복도가 다시금 처음처럼 조용해졌다.
그제야 세화와 백기하도 조용히 저택을 빠져나왔다.
그들은 대화조차 없이 빠르게 숙소로 돌아갔다.
조금 전 상황은 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이해되지 않고 궁금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지금은 그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백기하는 가져온 짐에서 검과 활을 꺼내 들었다. 날카로운 화살촉 하나하나와 시리게 빛나는 검날 위에 영력을 입혔다.
여차하면 신수의 모습을 드러내서라도 일을 확실히 매듭지으려는 의지가 보였다.
세화 역시도 제 영력을 모두 사용해도 백호로 변하지 않기 위해 방 한쪽에 앉아 몸속의 영력을 고르게 진정시켰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몸 안에는 백가의 영력이 너무 많았다.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언제 갑자기 다시 아기 백호로 변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균형이 흐트러지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서 어머니를 구해야 해.’
어머니는 정말 아무 일이 없으신 게 맞을까.
무슨 일로 영단을 빼내셔야 했던 걸까.
혹시 아까 본 시녀처럼 반강제로 영력을 잃고 노쇠한 모습을 하고 계시면 어쩌지.
여러 가지 고민이 세화를 지독히도 괴롭게 했다.
하여 그들은 자정이 되자마자 움직였다.
출발 전, 변용을 권하는 백기하에게 세화가 고개를 저었다.
“모든 영력은 공격에만 사용할 거예요. 변용을 유지하는데 분산시키다가 만에 하나 백호로 변하면 안 되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남자가 세화의 손에 긴 활을 쥐여 주었다.
백가 가주가 사용하는 활이었다.
“가자.”
하늘엔 손톱만 한 달이 걸려 있었다.
자정이 넘어선 시간임에도 거리를 밝히는 불빛들은 마치 해가 떠 있는 듯 밝았다. 별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여 빛이 닿지 않는 곳의 어둠은 더욱 짙었다.
크고 작은 그림자가 창을 통해 조용히 빠져나갔다.
그들은 그 어둠 속에 숨어 다시 한번 저택을 향해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