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11/254)

한데 사연주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시선이 완전히 정면으로 부딪혔는데도 불구하고.

세화가 잠시 굳어진 채 눈을 깜빡거렸다.

그때 사연주의 곁에 서 있던 시녀들이 사색이 되며 앞으로 나섰다.

“비켜라! 감히 이분이 누구신줄 알고 이리도 방종하게 길을 막고 서는 것이냐!”

“어서 잘못했다고 고두하고 빌지 못해? 당장 여기서 사지가 잘려 죽고 싶기라도 한 거냐?!”

낮은 웃음소리를 흘린 사연주가 그런 시녀들을 막았다.

“되었다. 그렇게 호들갑들 떨 것 없어.”

“하지만 부인.”

그 호칭을 놓치지 않은 세화의 귀가 쫑긋 섰다.

‘부인?’

“그렇게 세게 부딪친 것 같지는 않은데. 어디가 안 좋은 거면 우리 저택에 있는 의원이라도 보내 줄까요?”

사연주가 그렇게 물을 때마다 시녀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해갔다.

그들은 지금 사연주를 누군가와 부딪히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죽을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백기하가 세화의 앞을 막아서며 나섰다.

“아닙니다. 저희 부인이 오늘 몸이 좋지 않아 잠시 현기증이 인 것 같습니다.”

“그래요? 괜찮겠어요?”

“네. 지체 높으신 분 같은데 저희가 몰라 그런 것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사연주가 웃는 얼굴을 한 채 세화에게 권했다.

“어디가 아픈 거면 꼭 지금 얘기해요. 나중에 가서 후회하지 말고.”

“괜찮, 습니다. 그냥 가셔도 됩니다.”

“그래요?”

잠시 세화를 훑어본 사연주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그리고는 제 시녀와 호위들과 함께 또다시 즐거운 얼굴로 걸어갔다.

뒤에 남은 백기하와 세화는 잠시 그 모습을 응시하다 서로에게 물었다.

“못 알아본 것 같지?”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어요. 그런데도 못 알아봤다니.”

“그 변용 능력자가 자기 능력을 축소해 말한 것일 수도 있잖아?”

“그렇다고 해도 뭔가, 뭔가 이상해요. 저 시녀와 호위는 어디서 난 거지요?”

세화의 시선이 이미 사연주의 일행이 사라지고 없는 길 끝을 응시했다.

‘게다가 부인이라니…….’

“저 아이가 밀실로 끌려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사이 갑자기 혼인을 했다고요? 게다가 여기는 왜 와 있는 거죠?”

“…….”

“전부 다 이상해 보여요. 저 아이와 헤어진 지 일 년, 아니 최소 반년이라도 지났으면 어떻게 일이 진행됐나 보다 할 테지만.”

“그럼 어찌하려고?”

“따라가요. 다른 일을 차치하고라도 저 아이가 왜 여기 있는 건지는 알아봐야 하니까.”

신영이 풀어 주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그들은 혹시 사연주의 근처에 몰려 있을지 모르는 신영의 무사들을 염려해 신수로 변용해 하늘을 나는 방식으로 따라붙었다.

사연주는 마치 이 단사 지방이 자기 앞마당인 마냥 이 가게 저 가게를 전전했다.

옷이나 장신구를 사기도 하고 불현듯 아무 자리에나 앉아 술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볼수록 세화의 의구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간엔 주명윤에게 용돈을 받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사연주의 씀씀이는 은근 인색한 구석이 있었다.

한정된 금액 안에서 소비를 해야 했기에 무언가를 구매할 때는 한두 번 더 생각하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한데 지금의 사연주에게서 그런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비싼 물건을 사건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 사연주가 저택으로 향하기 시작한 건 아침이 밝아 오면서였다.

밤새 환하게 반짝이던 거리도 하나둘씩 불이 꺼지는 곳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연주는 가게가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서야 일어섰다. 그런 후,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어딘가로 걸어갔다.

도착한 곳은 어떤 커다란 저택이었다. 호위가 한발 앞서 문을 열기도 전에 마치 제집인 양 문을 박차고 열며 안으로 들어섰다.

누군가 어깨를 드러낸 침의 차림으로 달려 나와 사연주를 맞아들였다.

“언니! 또 이렇게 마시고 돌아오다니.”

“그럼 그럼. 술을 마셔도 되는 몸이 되었는데. 당연히 술을 마셔야지.”

“세상에. 이 술 냄새 좀 봐. 오늘은 대체 얼마나 마셨길래 이래요. 영력이라도 써서 술기운을 좀 날려 봐요.”

“흥. 그럴 거면 술을 왜 마시니? 나 지금 기분 너무 좋으니까 잔소리할 거면 그만 가.”

“아유. 알았어요. 일단 방으로 가요.”

그 누군가는 싫은 표정이 역력한 사연주를 불쾌한 기색도 없이 부축했다.

“언니. 기껏 여기까지 왔건만 이렇게 방만하게 구시면 들킬 수가 있어요. 조심 좀 해요.”

“알았어, 알았어.”

“그리고 아무리 건강해졌다고는 해도 매일매일 이렇게 마시면 금세 탈이 날 거고요. 술도 좀 줄여요.”

“알았다고.”

“정말 내가 언니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네요.”

사연주를 핀잔주면서도 누군가의 시선엔 숨길 수 없는 염려의 기색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 시선은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는 순간 순식간에 얼어붙은 듯 냉랭해졌다.

“뭣들 하는 것이야! 발목이 부러지도록 달려가 당장 소셋물과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지 않고!”

뒤를 따르던 시녀들이 일시에 사색이 되었다. 그들은 변명조차 꺼내 놓지 못하고 급히 방으로 달려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따라붙는 시선엔 못마땅한 기색이 그득 담겨 있었다.

못마땅한 기색뿐일까. 어떤 잔인한 살기마저 배어 있었다.

“소셋물은 됐으니까 술이나 좀 더 가져와 봐. 글쎄 가게 주인이 이제 문을 닫아야 한다고 나보고 가라는 거 있지.”

“어휴. 나 같아도 이렇게 취했으면서 더 마시겠다는 손님 있으면 문 닫겠다고 하겠네요.”

“그러니 너라도 나한테 술을 줘 봐. 내가 너희 아니면 누굴 믿고 사니.”

“알았어요. 일단 걷기나 해요. 방으로 돌아가야 뭘 하든지 하지.”

누군가는 단단하게 사연주를 부축한 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도란도란한 말소리가 한참이나 끊기지 않았다.

그 모습을 허공에서 지켜보고 있던 세화는 기가 막혔다.

“주수연?”

방금 사연주를 부축해 저택 안으로 들어선 이는 분명 자윤 원로의 여식인 주수연이었다.

“한데 주수연은 분명 나이가…….”

시간이 돌아오고 나서 제일 처음 참가한 연회. 분명 그곳의 주최자가 주수연이었다.

“어, 언니. 그 자리는 연회의 주최자이신 수연 언니의 자리이니 이쪽으로 오셔요.”

그리고 분명 사연주는 그곳에서 주수연을 언니라고 불렀었고.

한데 이제는 주수연이 사연주에게 언니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때의 주수연은 세화가 사연주에게 망신을 주어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즐거워하는 듯 보였는데.

이제는 마치 제 혈육인 양 사연주를 챙기고 있었고 말이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진상을 알아보러 온 것이지만 볼수록 더욱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 * *

변용이 풀릴 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일단 철수하여 숙소를 잡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마음이 불안해진 세화는 들어서자마자 방 안의 창문을 모두 꽁꽁 닫아걸었다.

그 불안한 기색에 백기하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다독이듯 말했다.

“우릴 따라온 건 아닌 것 같았어. 찾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그래도 뭔가 이상해요.”

“뭐가?”

“…….”

이상한 것이 너무 많아 뭐가 제일 이상한지조차 꼽을 수가 없었다.

일단, 사연주는 대체 어떻게 그 밀실에서 빠져나온 것인지.

누가 그 아이를 빼내 준 것이고, 지금 쓰고 입는 돈은 다 어디서 난 것인지.

그 ‘부인’이라는 호칭은 뭐고, 주수연과는 무슨 관계인 건지.

왜 이제 와서는 서로의 호칭을 다르게 부르는지.

마지막으로 어떤 연유로 이 단사 지방까지 오게 된 것인지. 혹시.

‘신영이 날 찾기 위해 일부러 보낸 건가?’

그녀는 백호로 변하며 본의 아니게 계속 행방불명된 상태였던 데다가 주명윤마저 백가로 떠났으니.

‘어머니와 오빠는 억류된 상태인 듯하니, 내가 어머니를 데리러 나타날 거라 생각해서?’

덧창까지 닫힌 덕에 방 안이 온통 어두웠다.

방 안에 비치된 등마다 불을 켠 백기하가 여태껏 앉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세화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녀를 침상에 앉히고 그 앞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불안해?”

“……그래요.”

“뭐가 제일 불안한데?”

“…….”

“응? 말해 봐.”

“…….”

“어서.”

다정한 재촉에 세화가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아직까진 어머니와 오라버니들이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던 게. 내 착각일까 봐서요.”

“아니야, 그건.”

다정하게 웃은 백기하가 무릎 위에 올려진 그녀의 찬 손을 잡았다.

“장부인께서 중강에 서신을 띄우셨었잖아. 아직 움직임에 여유가 있는 것이고 그믐이라 날을 특정하셨으니 위험한 상황은 아니야.”

“사연주가 이곳에 올 줄은 모르셨을 거예요. 그 아이가 또 착한 척, 염려하는 척 접근해 어머니가 서신을 띄운 걸 알아냈다거나 하면 어쩌지요?”

백기하가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나직이 끄덕였다.

“그러면 아직 변용된 상태니 지금이라도…….”

그 순간. 어느새 반나절이 흘렀는지 그의 모습이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눈에 스쳐 지나가듯 평범한 인상은 어디 가고 시선을 빼앗는 완벽한 비율의 얼굴이 수려함을 드러내며 나타났다.

그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적보랏빛 영력이 은하수처럼 펼쳐지는가 싶더니 백기하의 눈앞에서 그녀의 얼굴선이 움직였다.

날카로움과 부드러움을 균형 있게 모두 품은 긴 눈꼬리와 하얀 콧대가. 어두운 방 안에서도 선명한 붉은 입술이 모습을 드러냈다.

집요하게 저를 응시하는 남자의 시선을 마주하며 세화가 물었다.

“지금 이라도, 다음에 뭐예요?”

“……지금이라도?”

“당신이 그렇게 말했잖아요.”

그녀의 아주 작은 움직임까지 핥듯이 응시하던 그의 울대가 거세게 출렁였다.

그를 매순간 갈증나게 하는 것은 단순한 애욕의 감정이 아니었다.

그는 시간이 돌아오기 전에도 그녀에게 구애하였지만, 그때는 활을 가르쳐준다는 등의 구실이 아니라면 가까이 서는 것조차 어려운 사이였다.

허나 지금은 어떤가. 그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형태로 진전되었다.

그녀의 손이 제 것을 동일한 힘으로 맞잡아 주었을 때의 희열이란.

그럼에도 앞으로 그들이 넘어야 할 산은 한두개가 아니었으며, 그 어떤 산도 수월해 보이는 것이 없었다.

삶이란 아무리 본인의 의지가 강하다 한들 원하는 방향으로만 길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중에는 만에 하나 그들이 타의로 헤어지는 미래가 존재할지도 몰랐다.

그녀는 모든 복수를 제 손으로 이루고자 하니 그것을 방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녀가 밀실 감옥으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게 됐던 이전 생처럼, 절절 끓는 통한으로 가슴 치는 일만은 없었으면 했다.

하여 언제 성사될지 요원해 보이는 구두혼약만으로는 계속해서 마음이 조급했다.

그녀가 명계로 떨어진다 하더라도 보듬어 품에 안고 함께 추락할 수 있도록.

방해꾼들, 아니 일행들과 멀어진 지금. 조금이라도 더 깊은 사이가 되어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헤어지지 못할 관계를 만들길 바랐다.

대놓고 그녀를 비호하고 제 모든 것을 걸어 돕더라도 아무도 의문을 가지지 않을 그런 관계가 되길 바랐다.

그 마음이 너무 강했을까. 백기하는 아주 가까이에서 저를 응시하는 세화를 마주하는 이 순간.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눈앞의 붉은 입술을 삼켜 버렸다.

“!”

그래도 해야 하는 말은 잊지 않았었는데, 잔뜩 가라앉은 채 간신히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는 본래 하려던 것과는 다른 문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우리는 앞으로 반나절은.”

말을 하면서도 연신 물 듯이 그녀의 입술을 핥고 적신 그가 세화의 아랫입술을 강하게 빨아 당기며 입술을 맞댄 채 속삭였다.

“반나절은, 못 움직이니까.”

변용 능력자는 분명 한번 변용이 풀리면 반나절 동안은 다시 얼굴을 바꿀 수 없다고 당부했다.

반나절의 시간이. 어쩔 수 없이 생겨 버렸다.

무슨 고민을 하더라도. 어떤 걱정이 있더라도 이 방 안에서 나갈 수 없는 반나절이.

백기하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가느다란 몸을 끌어안고 붉은 입술을 힘주어 빨아들이려던 순간이었다.

“아, 우리가 나갈 수 없으면 누군가를 부르면 되잖아요. 왜 그 생각을 못 했죠? 일단 여기 점원을 좀 불러 봐요. 저택에 대해서 좀 물어보게.”

“…….”

“왜요?”

“아, 아니야.”

맞닿은 채 움직이던 입술이 조용히 떨어졌다.

“그러네. 점원 정도면 불을 끄고 불러도 될 테니…….”

미적미적 그녀에게서 떨어진 남자가 천천히 문가로 걸어갔다.

그러면서도 혹시 그녀가 지금이라도 저를 잡지 않을까 뒤돌아보았다가 어서 하지 않고 뭐하냐는 듯한 시선과 마주치고 다시 멀어졌다.

“그래. ……지금 부르지 뭐.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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