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0/254)

* * *

세화는 신수의 모습을 한 기하의 등에 오른 채 날았다.

중강 너머에서 육가 연합의 무사들이 위협을 하거나 말거나. 제 즐거움에만 관심 있는 자들의 유흥의 불빛이 발밑에서 별처럼 반짝였다.

장부인이 머물고 있다는 단사 지방 역시 그러했다.

이곳은 전쟁 당시에는 부상병들을 옮겨 오는 의료초소로 사용되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그때의 암울했던 분위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허공에서도 알아차릴 정도로 풍족하고 흥겨운 음악 소리가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세화와 백기하는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조심히 내려왔다.

의복도 지 행수가 준비해 준 낡은 것으로 미리 갈아입었겠다, 그들은 곧장 거리의 인파 속에 합류했다.

곳곳을 빈틈없이 밝힌 수많은 불빛들은 눈이 아플 정도로 반짝였다.

행인들은 매일 밤 열리는 이곳을 마치 처음인 듯 즐기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본 것이 대체 언제였더라.

아주 오랜만에 보는 광경을 세화는 조금 신기한 마음으로 응시했다.

그런 세화의 옆에서 딱딱하고 부자연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그럼 이곳 분위기는 어떤지, 초소 안 사정에 대해 뭔가를 아는 자는 있는지 탐색을 시작해 볼까.”

“…….”

“이건 탐색이니까. 어쩔 수 없이 우리도 가게 곳곳을 돌아보기도 하고 식당에도 들어가야 하고 술도 좀 마셔 봐야겠네. 그렇지?”

“…….”

아래로 늘어뜨린 그녀의 손을 백기하가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었다.

“혹시 놓칠까 봐.”

붉어진 얼굴을 하고 그렇게 속삭이다가 ‘아, 비밀스러운 임무를 수행하며 이렇게 웃으면 안 되지.’ 자각하고 표정을 수정했다.

“가자.”

백기하가 부드럽게 손을 이끌었다. 세화도 그런 그를 따라 화려한 등불들 속을 걸었다.

* * *

우린 지금 적진을 탐색 중이니까.

하여 놓치는 곳 없이 세세하게 다녀봐야 하니까.

지금 우리가 외형을 바꾸고 있지만 기운이 완전히 감춰졌는지도 봐야 하는 거고.

이건 어디까지나 탐색이니까.

백기하는 묻지도 않은 설명을 말끝마다 붙이며 그녀를 이끌고 거리 곳곳을 다녔다.

“저 포목점도 꼭 가 봐야 해. 저런 곳엔 지체 높은 가문의 사용인들이 많이 오잖아. 뭘 알아보기 좋을 거야.”

포목점에 들어가서는 주가 사람들의 취향을 파악해야 한다는 이유로 전시된 장신구들을 샅샅이 훑었다.

“이 비녀가 참 예쁘네.”

그가 일일이 세화의 옆에 비녀를 대보며 물건을 살피자 주인이 황급히 달려왔다.

행색은 조금 초라했으나 금액을 묻지 않는 모습에서 익숙한 돈 냄새를 맡은 것이다.

“아유. 원체 아름다우셔서 뭘 가져다 대어도 장신구가 빛이 바래네요. 어쩌면 이렇게 안 어울리는 것 없이 다 잘 받으실까.”

지금 세화는 평범하디 평범한 모습으로 변용하고 있으니 저 말은 그저 물건을 팔려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백기하의 만면엔 흡족한 기색이 한가득이었다.

“그도 그렇지. 그녀는 소화해 내지 못하는 색이 없으니.”

“어머머. 금슬이 좋은 부부시네. 아주 보기 좋아요. 그보다 제가 보기엔 귀걸이가 더 좋으실 것 같은데 저쪽 함도 한번 살펴…….”

“부부?”

“……부부가 아니신 건가요?”

“아니. 맞지, 부부. 부부가 맞지. 하하. 귀걸이뿐인가. 이곳에서 가장 값비싼 것들을 모두 가져-.”

갑자기 흥분해 가게의 물건들을 모두 털어 갈 기세인 백기하의 입을 세화의 손이 빠르게 막았다.

“조금 더 둘러보고 다시 오겠네.”

“네. 꼭 다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쉬워하는 주인을 뒤로하고 세화가 백기하를 억지로 가게 밖으로 끌어냈다.

그는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지 계속해서 허물어진 얼굴이었다.

들뜬 마음이 숨겨지지 않고 태도에서도 엿보였다.

한 시진 만에 입버릇이 된 듯한 “이건 탐색이니까.”라는 말을 연신 끄집어내며, 제가 먼저 경험하고 즐거웠던 것, 맛있었던 것, 좋았던 것은 꼭 그녀에게도 경험하게 해 주었다.

“아, 저거. 저거 맛있지.”

많은 곳을 걸었으니 다리가 아플지도 모른다고.

잠시 어딘가에 앉게 해 주기 위해 가게들을 둘러보고 있던 그가 이번엔 세화를 데리고 한 노점으로 다가갔다.

제 손안에 쥐어진 작은 손은 여전히 꼭 잡은 상태였다.

“이거 두 그릇만 주시게.”

작은 그릇에 덜어 파는 청포묵 형태의 차가운 간식을 가리키며 주문했다.

“아이고. 딱 맞춰 잘 오셨네요. 이게 마지막이거든요. 마지막이니 많이 드리겠습니다.”

주인이 그들을 반기며 두 그릇을 덜어 내밀었다.

“마지막이라고? 그럼 지금부턴 다른 것을 파나?”

“아니죠. 다 팔았으니 얼른 집에 가 봐야죠.”

그릇을 받아 드느라 잡은 손을 잠시 놓으며 백기하가 피식 웃었다.

“밤은 이제 시작인데 벌써 집에 간다니. 주인이 배가 불렀구만.”

“하하. 신혼이니 그렇지요. 손님은 색시랑 같이 나오셨다고 아쉬운 게 없으신 모양인데 저도 색시 보러 집에 빨리 가렵니다. 토끼 같은 색시가 저를 엄청 기다리고 있거든요.”

“…….”

밝은 목소리를 낸 주인은 그래도 천천히 드시라며 웃어 보였다.

그들이 노점 옆에 준비된 탁자에 앉았다.

“방금 그거 들었어?”

듣는 이도 없건만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저 주인도 우리가 부부래.”

심각한 목소리는 신기하다는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주가 혈족들이 그렇게 오래도록 지배자의 위치를 지켜 온 이유를 알겠군. 주가 영지에 사는 모두가 이토록 눈썰미가 좋을 줄이야.”

세화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조금 흘렀다.

‘눈썰미가 좋다니. 우린 아직 실제로 혼인하지도 않았는데.’

게다가 개방적인 주가 혈족들이라 해도 혼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외출할 때는 항상 측근 시녀나 호위 무사 등 동행인을 대동한다.

자신들은 동행인도 없이 손을 잡고 있었으니 당연히 혼인한 사이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 말이 뭐라고 저렇게 즐거워하고.’

하지만 세화는 오누이처럼 보이지 않은 게 그렇게 좋으냐고 핀잔주는 대신 가만히 있었다.

좋은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그가 제법 귀여웠던 것이다.

“세화야, 너는 가지고 싶은 게 없느냐. 먹고 싶은 건?”

“우리 세화. 뭐든 말해 봐. 이 오라버니가 다 사 줄게!”

“너무 북적이는데. 세화야, 이리 큰 오라비에게 오렴. 오라버니가 안아 줄게.”

식구들이 모두 함께 외출했던 것은 세화가 아주 어렸을 때뿐이었다.

그때가 전쟁이 터지기 전이니, 과거의 일들까지 합치면 거의 스물다섯 해나 전의 일이었고.

그녀가 백가에 있을 때 늘 그리던 평화로운 시간의 한 단락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면 또 볼 수 있을 거라고.

어떤 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립게, 그립게 고향을 그리워하던 그때의 마음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바라던 고향은 그녀를 진창에 처넣었고, 벗어나고 싶던 곳은 이제 그녀가 돌아갈 곳이 되었다니.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 그건 아니에요. 그냥 좀. 좀 이상해서요.”

“뭐가?”

……모든 게요.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가 다른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당신 같지가 않아서요.”

변용한 얼굴은 평소의 그의 모습을 전혀 떠올릴 수 없는 아주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이 어떻게 이렇게 바뀔 수 있지.

자세히 보면 그가 맞는데. 신기하게도 또 다른 사람 같다.

“내가 너무 낯설어?”

“조금요.”

그 대답에 커다란 남자의 몸이 자리를 바꿔 그녀의 옆으로 돌아왔다.

단단한 팔이 세화의 가녀린 몸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귀에서 볼로 이어지는 얼굴선에 살짝 입을 맞췄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귓가가 귀여워 도무지 그곳에 입을 맞추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낯설어하지 마. 나 맞으니까.”

“모르는 건 아니에요.”

“그대도 지금껏 쉬는 날 없이 달려왔으니까.”

아직은 장부인과 형님들도 무사하시니 오늘 밤만은 어깨의 짐을 잠시 내려놓으라고.

세화가 달려나갈 모든 길을 미리 닦아 내고 싶은 백기하가 그렇게 속삭였다.

‘그래. 하룻밤이니까.’

오늘 하룻밤쯤은 그의 말대로 어깨의 짐을 조금 내려놓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제법 편안한 얼굴로 웃음을 흘리는 세화를 보며 백기하는 진정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아무튼 숙부처럼은 보이지 않아 정말 다행이야.’

그는 신수가 되며 젊은 나이에서 노화가 멈추었다.

영력의 작용으로 인한 미형의 외모까지 지니고 있으니 그를 제 나이로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나이 차가 있는 신부를 맞이하려다 보니 이런저런 것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입맛엔 맞아?”

“응. 맛있어요. 나만 챙겨 주지 말고 당신도 어서 먹어요.”

당신.

귓가를 붉힌 백기하가 그 호칭을 곱씹었다.

그녀가 그를 당신이라고 부르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건만.

‘왜 지금은 이토록 다른 때와 다르게 들리는 거지. 부부라는 말을 듣고난 이후여서 그런가?’

“내가 먹여 줄까?”

“네?”

“내가 떠서 그대에게 이렇게.”

“…….”

“이렇게.”

마음 같아서야 제 무릎에 앉힌 채로 먹여 주고 싶지만 그렇게까지 한다면 분명 싫어할 것이다.

그것을 알고 많이 참아 숟가락만 내밀어 본 것이지만 세화의 차가운 시선만이 대답처럼 돌아왔다.

“…….”

……이건 너무 간 건가.

있지도 않은 백호의 귀가 아래로 처지는 순간이었다.

작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싶더니 붉은 입술이 그가 내민 숟가락을 입으로 물었다.

“!”

“오늘만이에요. 밖에서 이러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 말은 안에서 하는 건 완전 괜찮다는 건가?’

“그리고 당신도 먹어요. ……여기.”

“!!”

그녀가 내민 것을 입으로 받아먹으며, 그는 간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아. 빨리 혼인했으면 좋겠다. 당장 내일 혼인했으면 좋겠다.’

미리 겪어 보는 듯한 부부 생활에 백기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이후엔 세화도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그 밤을 즐겼다.

때로는 주위의 정경보다 손에 닿은 온기를 더 신경 쓰고, 재미있는 것을 보면 옆 사람의 반응을 더 살피기도 하면서.

북적이는 거리는 제대로 신경 쓰지 않으면 누군가와 부딪치기 일쑤였지만 세화는 백기하가 단단히 어깨를 끌어안고 있는 통에 그럴 일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걸어가던 순간이었다.

큰 소리로 웃으며 뒷걸음질 치던 누군가가 세화의 팔을 건드렸다.

“아, 미안해요.”

맑은 목소리가 사과를 건네 왔다.

세화가 괜찮다고 대답하려 돌아서던 순간이었다.

“……!!”

‘어떻게.’

지금 제가 보는 것이 맞는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 아이가 여기에…….’

눈앞에 있는 이는 분명 지하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할 제 동생.

사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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