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원하는 것도 모두 얻었겠다.
초소의 경비병들까지 그들을 어서 보내 버리고 싶어 안달하고 있었으니.
그들이 주가의 영역을 빠져나와 중강을 건너는 것은 금방이었다.
육가 연합의 군사들은 중강에 바싹 밀착하여 진을 치고 있었다.
이미 주가 초소병들에겐 충분히 압박이 되고 있을 텐데도, 일행 모두가 건너올 때까지 육가 연합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궁병들은 조금도 틈을 만들지 않으며 활을 조준했다. 기마병 또한 주가 무사들이 초소에서 나올 수 없도록 중강을 오가며 위협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일행들이 모두 강을 건너자 누군가 말을 탄 채 그들에게 빠르게 가까워졌다.
사슴뿔을 형상화한 투구를 말 옆에 맨 그는 천가의 가주 천수한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주명윤의 인사에 천가주는 고개도 끄덕이는 둥 마는 둥 하며 말에서 내렸다. 그리곤 품 안에서 종이 하나를 급하게 꺼내어 내밀었다.
“어제 우리 병사 하나가 무언갈 발견했는데 거기 적혀 있던 것이네.”
“……?”
주명윤이 접힌 종이를 펼쳤다.
<필요. 그믐. 자정.>
세 단어가 적혀 있었다.
“이게 뭡니까?”
“천가 직계들에게만 전해지는 표식을 해석한 것이네. 주가 영지선, 중강변에서 발견한 것이야.”
“……!”
각 가문의 암호 표식은 오로지 직계혈족 한정으로 가주에게서 전수받을 수 있었다.
이에 대해 다른 이에게 발설하는 것은 영력을 건 맹세로 막혀 있었다.
천가의 성을 단 여성이 다른 가문의 누군가와 혼인해 자식을 낳는다고 해도 자식에게조차 알려 줄 수 없다는 말이었다.
거기다 이런 식으로 정보가 전달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각 가문의 영지선에는 원칙적으로 다른 성을 가진 이들이 합류할 수 없었다.
오로지 주명윤의 아내 천수아만이 의원이라는 직위와 전시 상황을 이끈 주명윤의 아내라는 이유로 예외적으로 합류했을 뿐.
‘……부인.’
주명윤의 턱이 단단해졌다.
하여 이것을 쓸 수 있는 것은 제 아내밖에는 없었다. 천가의 가주도 그것을 안 것이다.
“자네가 백가로 가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기에 알려 주는 것이네.”
“…….”
“자네의 성품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 그랬기에 수아의 혼약자로 자네를 택할 적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주가 자체가 그간의 오랜 문제들로 신망을 많이 잃었어.”
할 말 없이 입을 다무는 아버지의 모습을, 세화는 아기 백호의 모습으로 백기하에게 안긴 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꿀 수 있었다.
어느 순간 깨달은 것이다.
이 제멋대로인 모습이 영력 때문이라면. 이미 신수인 상태지만 제대로 조화를 이루지 못해 이런 모습이 된 거라면.
‘만약 지난번처럼 영단의 형태로 영력을 빼내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영력이 모자라게 되면 신수의 모습도 사라지지 않을까?
완벽한 신수라면 영력을 빼낸다 해도 모습을 잃진 않겠으나 그녀는 그렇지 못했으니 말이다.
추측이 성공하여 그녀는 일부 영력을 영단의 형태로 끄집어내는 방법으로 다시 사람이 되었다.
빼낸 영단을 다시 흡수하면 백호의 모습을 하게 되었고.
‘어머니께서 육가 연합에 도움을 요청하셨다니.’
코끝이 차게 식는 듯했다.
백기하를 올려다보자 그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그녀를 심각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기 백호가 작은 발을 들어 남자의 단단한 팔을 톡톡 건드렸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천가주와 주명윤에게 다가갔다.
“그럼 천가주. 미리 연통을 드린 대로 진행 부탁드립니다.”
“육가의 수장께서 하신 부탁에 차질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제가 잘 호위할 것입니다. 맡겨 주십시오.”
“원로 어른. 재상과 함께 백가로 향하십시오. 그곳에도 서신을 보내 미리 지시해 두었으니 불편하신 일은 전혀 없으실 겁니다.”
차마 제 부인의 위험을 알면서도 직접 움직이지 못하고 남에게 맡겨야 하는 주명윤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염려 마십시오.”
백기하가 장포 안쪽을 슬쩍 내비치며 웃어 보였다.
“이 아가씨도, 원로어른과 아가씨의 가족도. 제가 안전히 지킬 것입니다.”
“……그럼 부디 부탁드립니다.”
그 대답과 동시에 커다란 용오름이 그들 주위로 소용돌이쳤다.
얼마나 제어가 완벽한지 영력의 소용돌이는 가까이 있는 백가의 무사들에게 조금의 타격도 입히지 않았다.
“커헝―!!!”
고막이 찢어질 듯한 소리가 지축을 울리며 거대한 백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위협적인 모습에 반해 조그마한 아기 백호를 제 발등 위에 야무지게 올린 채였다.
하지만 털에 묻힌 작은 신수를 발견한 이는 그저 주명윤의 일행 중 몇몇뿐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한 번도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신수의 위용을 목격한 무사들은 그저 감탄을 흘리기 바빴다.
신수의 커다랗고 짙푸른 눈이 육가 연합의 수장들과 주명윤을.
그와 둘만 떠나갈 아기 백호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세 자매를.
마지막으로 백만용을 응시했다.
‘다녀오십시오.’
그가 세화와 둘만 잠시 떠나겠다는 말을 했을 때, 백가 재상은 더는 아기 백호를 옆에서 지켜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하늘이 무너지는 표정을 한참이나 짓고 있었다.
하지만 백기하를 마주 보는 지금은 더없이 믿음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곳은 제가 상황을 잘 보듬겠습니다. 가주께서야말로 아가씨와 함께 보중하십시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 재상을 아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고개를 끄덕인 신수가 혹시 모를 신영의 추격자에게 위협을 주기 위해 영력을 담은 기파를 내질렀다.
“――!!”
거대한 사자후가 허공을 가득 메웠다.
미리 대비한 육가의 무사들 외에 주가의 무사들은 귀를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신수가 허공으로 나는 듯 뛰어올랐다. 백가로 가는 척하다가 방향을 틀 생각이었기에 방향은 백가를 향해서였다.
‘……드디어.’
정면을 응시하는 백호의 눈이 희열로 반짝였다.
‘드디어!’
드디어 원하는 상황이 왔다는. 이제부터는 둘만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백호의 발걸음은 정말로 나는 듯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그가 멀어졌다.
신수가 지닌 영력의 크기를 그대로 보여 주는 듯한 속도에, 커다란 백호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무사들의 눈에는 감탄과 동경들이 아롱져 있었다.
* * *
사박사박.
부엉이가 스산하게 우는 산길을 가느다란 그림자가 망설이며 걸었다. 이 어둠 속에서도 모자를 쓴 채였다.
좁은 길 위를 노란 달만이 집요하게 따라오며 비추고 있었다.
그림자의 발길이 멈춘 곳은 긴 나무 그늘을 벗어나 만나는 한 적막한 나루터였다.
강과 이어진 발판은 몹시 낡아 있었다.
작은 나룻배 한 척이 발판에 연결된 채 달빛을 요요히 받으며 조용히 머물러 있었다.
불안한 모습을 보이던 그림자가 모자를 벗었다.
누군가를 찾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달을 올려다보았다. 달의 위치가 아직 약속한 시간이 조금 남았음을 알려 주었다.
하. 길게 숨을 내쉬며 나무 그림자 속에 몸을 감추고 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웅크린 채 저를 부른 이가 이곳에 오기를 기다렸다.
때때로 달을 올려다보는 시선만이 약간의 두려움과 초조함을 담고 있었다.
이윽고 달의 위치가 약속된 시간을 알렸을 때였다.
머리 위에서 갑작스레 나뭇잎이 흔들렸다.
깜짝 놀란 그림자가 소리가 나는 곳을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나무의 꼭대기, 나뭇잎으로 모습이 가려지는 가장 어두운 부분에 누군가가 있었다.
존재감을 드러낸 이가 시야를 가로막는 가지를 치웠다.
“기다리게 했군.”
검은 장옷을 걸친 이의 깜빡임도 없는 시선이 곧장 그림자에게로 날아왔다.
“미안하네. 자네가 혹 누군가를 데려오는 건 아닌지 조금 살펴야 했거든.”
가벼운 몸놀림으로 나무 아래로 뛰어내린 세화가 자신을 기다리던 이에게 다가갔다.
“지 행수의 전갈을 받고 온 이가 맞나?”
“……네, 맞습니다.”
“얼굴을 변용시키는 기술을 가졌다는 자가 자네가 맞다는 거지?”
세화가 깨어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지 행수는 저택을 떠나기 전 세 자매에게만 조용히 이런 말을 남겼었다.
“혹, 모습을 감춰야 할 일이 필요하시게 된다면 저를 찾아 주십시오. 밑바닥을 전전하는 이들 중에는 그런 능력을 가진 이가 있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신영의 불에 피해를 입었다.
주가 내부 사정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었지만, 오래도록 주가에 충성을 바쳐 온 명윤의 혈족이 신영의 불로 생사를 넘나들게 되었는데.
그런데도 뭔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행수 일은 그만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모습을 변용한다는 것은 쉬이 누군가에게 알릴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런 일은 보통 각 가문에 쫓기는 범죄자들이 하는 짓이었으니까.
세화는 세 자매가 전달해 준 그 얘기를 흘려듣지 않았다.
백기하와 함께 몰래 다시 주가의 영역에 침투한 직후, 곧장 지 행수를 비밀리에 찾아갔다.
그래서 늦은 밤 이런 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달빛에 드러난 세화의 얼굴에 잠시 눈을 빼앗겼던 변용 능력자는 곧 빠르게 시선을 내렸다.
가문이 있는 환족과 대화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제게 일을 의뢰하러 오는 이들은 거의 다 이런 환족들의 비위를 거스르는 바람에 죽음을 목전에 둔 이들이었으니까.
이런 이들이 자신과 같은 낮은 출신의 환족을 얼마나 경멸하는지, 자신들의 목숨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는지. 자신도 당해 봤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하여 그는 연신 마른침을 삼켜 가며 대답했다.
지 행수가 채찍과 당근을 섞어 가며 오래도록 끈질기게 부탁해왔기에 나온 것이지.
그게 아니라면 가문이 있는 자가 일을 부탁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천 리 바깥으로 달아났을 것이다.
“쩌, ……음, 큼큼. 저, 저가 맞습니다.”
그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뒤를 따랐다.
“얼마나 걸리지?”
‘아이쿠야. 동행이 있었구나. 지체 높은 환족이 둘이나 왔다니.’
그가 입술을 떨며 물었다.
“두 분께서 모두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네.”
“그럼 두 시진 정도면 끝나겠지만, ……행수님께 이미 설명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으나 이 변용술은 만능이 아닙니다.”
능력자가 초조해지는 손을 맞잡아가며 설명했다.
“지니신 영력의 크기에 따라 변용 유지 시간이 늘어나는데, 그렇다 해도 최대 반나절을 넘기지 못합니다.”
“반나절? 그럼 변용이 풀린 후 곧장 다시 사용하면?”
“그건 불가능합니다. 최소 반나절은 본래의 얼굴로 계셔야 합니다. 혹시 아프시거나 다치셔서 영력을 유지하시지 못하실 때도 저절로 풀리게 되고요.”
“…….”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는 이를 마주치게 되면 금방 들킬 거라는 사실입니다.”
“들킨다고? 변용된 상태에서도?”
“네. 환술을 통해 본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가짜의 모습을 덧씌우는 것뿐이라 만능은 아닙니다.”
혹여 들은 말과 다르다며 그를 다그치기라도 할까 봐 변용 능력자 영 씨가 사력을 다해 설명했다.
“아는 사람을 마주친다 해도 서로 주의 깊게 보지 않는 상황이라면 스쳐 지나갈 수 있겠지만, 보통은 조금만 시선이 머물러도 바로 알아차릴 것입니다. 하니 그럴 때는 곧장 자리를 벗어나셔야 합니다. ……그래도 원하십니까?”
“그래.”
“…….”
영 씨가 조금 시선을 들어 제 눈앞에 서 있는 이들을 흘끔 훔쳐봤다.
두 사람 모두 이토록 눈을 홀리도록 아름다운 것을 보니 몸 안에 영력은 차고 넘치도록 들어 있겠고.
지 행수가 완전히 이들 손에 움켜쥐어진 듯한 모습을 보인 것을 보면 뒷배도 제법 있는 게 아닌가 싶고.
영 씨는 이런 높은 사람들과 엮이는 건 딱 질색이었다.
혹 무슨 일이 있을 때 연루되기라도 할까 봐,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결코 이런 이들에게 들키기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달아날 수도 없다.
“……그럼 앉으십시오.”
마지못한 얼굴로 영 씨는 집중에 집중을 가하며 제 앞에 있는 두 명의 환족에게 시술을 마쳤다.
그는 혹 이후 이들이 일이 잘못되었다며 자신을 탓하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며 주의 사항을 다시 한번 신신당부했다.
“말씀드린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최대 반나절이고 그 이상은 유지되지 않습니다. 한번 변용이 풀린 후에는 다시 반나절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알았다.”
일을 마친 영 씨가 떠나가고 백기하와 세화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들의 입술 사이로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와.”
아는 이들은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는 말이 어떤 말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기대 이상이었다.
둘의 외모가 모두 빼어났기에 도무지 주목받지 않고 거리를 걸을 방도가 없었다.
하여 그 부분만이라도 조금 없앨 수 있다면 좋겠다 했던 것이었는데.
“……정말 신기하네요. 당신인데 당신 같지가 않고. 그런데 또 당신이고.”
“그대도 마찬가지야. 이거 정말 괜찮은데.”
“효력이 반나절 동안 지속된다고 했지요? 지금이 자정이니 정오까지는 이 모습으로 다닐 수 있는 걸까요?”
“한번 시험해 볼까?”
“시험이요? 여기서 한번 얼마나 가나 기다려 보는 건가요?”
“무슨 그런 말을.”
고개를 저은 백기하가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장부인이 계시는 영지선까지는 여기서 멀지 않았다.
그곳은 제법 발전한 번화가이기도 했기에, 연회를 좋아하는 주씨들의 특성상 한밤에도 불이 꺼지는 일이 드물었다.
“시간을 아껴야지. 이대로 미리 탐색하는 거야.”
아직 장부인이 서신에 적어 보내셨던 그믐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지 않았던가.
주가의 그런 번화한 장소엔 야시장이 꼭 존재하니 미리 정세를 탐방한다는 핑계로 하룻밤만 잠시 걱정을 내려놓고 즐겨도 괜찮을 것이다.
“탐, 색이요.”
“그렇지, 탐색.”
맞아. 맞아.
미리 분위기를 읽으려는 것뿐이지, 절대로 그대로 둘이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고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