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108/254)

분노를 추스르는 세화의 뒤로 긴 그림자가 늘어졌다.

조용히 다가온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세화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왜 그래. 뭐가 신경 쓰이기라도 해?”

따뜻한 입술이 무표정한 세화의 볼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얘기해 봐. 나도 그대를 위해 뭔가 해 주고 싶으니까.”

혹 조금 전 살인을 신경 쓰기라도 하는 걸까.

백기하의 차고 냉랭한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서월의 시신을 훑고 지나갔다.

그도 원한을 잊지 않았다. 저 자객의 만행으로 세화를 영원히 잃을 뻔한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시신조차 갈가리 찢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듯했다.

하지만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으니 이를 악물고 참아 낼 수밖에.

그의 뜨거운 입술이 계속해서 그녀의 피부 위로 떨어졌다.

밤벌레 소리조차 사라진 비밀스러운 곳에서 단둘이.

매끄러운 얼굴선을 타고 움직이던 그 입술이 목으로 내려가려 할 때였다.

“당신.”

“응?”

“혹시 자리를 조금 오래 비워도 괜찮아요?”

“백가에서 나와 있어도 괜찮냐는 말이야? 얼마나 오래?”

“아직은 정확히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쩌면 어머니와 오빠를 구한 후에도 이곳에서 할 일이 있을 것 같아서요.”

세화의 눈이 다시금 함 위에 찍힌 문양으로 향했다.

“처형하라!”

“처형하라!”

세화의 주먹이 있는 힘껏 말려들었다.

목숨만을 빼앗는 것은 너무 가벼운 처벌이다. 신영이든 소가주든 방계 원로들이든.

기반을 모두 무너뜨리고, 무릎으로 기어와 신발코에 이마를 댄 채 비는 모습을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날카로운 그녀의 시선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저걸 아버지께 보여 드리면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게 돼. 그리고…….’

세화가 백기하를 돌아보았다.

다정한 시선이 한 번도 다른 곳을 향한 적 없는 듯 그녀에게로만 온전히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서월을 홀로 처리하고 돌아가려 했건만 백기하는 당연한 듯 따라와 절대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 마음을 어찌 모를까. 자신도 마찬가지였는데.

세화는 전장으로 떠났던 가족들에게 보낸 서신에 늘 ‘제 걱정은 마시고’라는 말을 적어 넣었다.

괜찮다는 말이 부탁한다는 말보다 더 익숙했다. 혼자 할 수 있다는 말이 도와달라는 말보다 더 익숙했고.

‘하지만 나도 이젠, 떨어지고 싶지 않아. 그로 인해 이 남자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해도. 그가 나를 떠나지 않는 이상, 어딜 가든 함께하고 싶어.’

“함께 가요.”

그렇게 요청하면서도 여전히 시선 한구석엔 미안한 감정이 깊게 들어앉아 있었다.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 그런 마음이 자꾸 그녀를 멈춰 세우려 했다.

그 감정을 읽어 내며 백기하가 조금 웃었다.

어째서 이리 모를까. 이 아가씨는. 정작 그는 그들 둘만 있는 상황을 얼마나 바라고 있는데.

‘단둘만 오래. 그건 혹시 혼인 기념 여행 같은 게 되는 건가?’

아니면 혼인 예약 여행? 약식 혼례 여행?

그의 단단한 가슴 저 안쪽에 뿌듯한 뭔가가 차올랐다.

무슨 단어든 다 마음에 들었다.

뭐가 됐든 아무래도 좋으니 제발 빨리 떠나기나 했으면 좋겠는 백기하가 여러 차례 고개를 끄덕인 후 또 끄덕였다.

“정말 괜찮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람. 그는 지금 당장 여기서부터 일행과 갈라졌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은데.

“그럼 일단 돌아가죠. 아버지께 저걸 보여 드려야 해요.”

그 말에 백기하의 동공이 세로로 빠르게 갈라졌다.

세화의 말에서, 이 일을 어서 처리해야 그들 둘만의 시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를 읽어 낸 것이다.

거대한 백호가 금세 모습을 드러냈다.

서월이 모아 둔 수많은 영단과 재화, 문서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챙긴 세화가 등에 오르자 그대로 하늘로 달리듯 날아올랐다.

인적 드문 곳에 버려진 서월의 시신만이 싸늘하게 식어 가며 그 자리에 영원히 남았다.

* * *

“이게……. 대체 이게 다 무어냐……. 어떻게 이런.”

질문의 형태를 하고 있었으나 질문은 아니었다. 황망함에 저절로 흘러나온 말일 뿐.

눈앞에 놓인 수많은 서신을 집어 드는 무장의 단단한 손이 조금 떨렸다.

오래된 것부터 최근의 것들까지. 신영의 앞으로 보내어진 그것들은 하나같이 내용이 가관이었다.

아마도 중간중간 없어져도 괜찮을 서신만 빼돌려 둔 듯 모든 정황이 낱낱이 적혀 있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오래도록 전장을 누비며 적의 의중을 파악해 내던 무장이 아닌가.

이 단편적인 내용들만 보아도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신영이 이 방계들에게 언제부터 자신에게 가진 불편함을 드러내 왔던 것일까.

가진 재산 목록. 안가의 위치와 그것을 감추고 있는 결계의 파훼법. 전해 들은 대화.

어찌 이리 신영에게 없는 내용 없이 고해바칠 수 있는 것인가.

게다가 그들이 신영의 명으로 실행한 수많은 악행들은 주명윤의 이름을 내걸고 있었다.

방계 원로들이 지금은 이리 나태한 듯 보여도 가문의 결속은 허투루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제가 먼저 그들의 편에 선다면 그들도 반드시 제 편이 될 거라고.

평생을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아왔던 주명윤의 모든 인생이 쓰레기처럼 내던져지는 듯했다.

그 감정을 짐작한 백기하는 가만히 미장이 제 감정을 추스르길 기다렸다.

하지만 의외로 미장에게서 비통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황망한 감정을 한숨으로 털어 내버린 그는 딸과 똑같은 예리한 눈을 하고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을 뿐이었다.

“이들은 내가 처리하마.”

한결 낮아진 목소리가 주명윤의 단단한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세화가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러시면 안 돼요. 제가 처리할게요.”

딸이 그를 동정하는가?

그 배려가 싫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작자들을 위해 바쳐 온 평생의 시간이 아까워도 지금 와서는 되돌릴 수 없었다.

그의 바보 같은 신념이 이런 들쥐 같은 놈들의 배를 불리고 있었던 만큼, 제 자식들의 앞길과 미래를 끊어 놓지 못하도록 뒤처리 또한 제가 하려 할 뿐이었다.

딸이 강하게 말린다 해도 직접 손을 쓰며 처단을 강행해야겠다고, 주명윤이 그렇게 되뇔 때였다.

“제가 더 잘할 수 있다고 드리는 말씀이 아니에요. 아버지는 주가 가주의 자리에 오르셔야 하는데, 혈족들을 학살했다는 오명을 얻으신 채라면 그때 불필요한 시간이 소요될 거예요.”

“뭐?”

주명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아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가주?’

“어설프게 드리는 말씀이 아니에요.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신영은 반드시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해요. 그렇다면 다음 신영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이가 누가 있지요?”

아버지밖에는 없다는 말에, 주명윤이 잠시 굳어졌다.

그런 그를 보며 세화가 말을 이었다.

“다행히 아버지께서 가지신 혈통의 공고함은 신영이 저를 백가로 보내며 증명해 주었죠. 우리 또한 신영의 핏줄이라는 점을요. 그러니 그의 죄상과 행실이 낱낱이 드러나게 되었을 때, 공석이 될 가주의 자리에 앉으셔서 혼란할 가문을 정리하셔야 해요.”

이 백가행 덕에 아버지가 주가 가주의 자리에 앉으셔도 누구도 반대할 수 없을 거라고.

그 말을 듣는 주명윤의 울대가 잠시 움직였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다.

침묵이 길어지자 혹시 그가 그 자리를 맡지 않으려는 건가 염려할 때였다.

주명윤이 고개를 저었다.

“네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하지만 내가 그 자리에 앉지는 않을 것이다.”

“아버지!”

“그렇다고 믿을 수 없는, 검증되지 않은 다른 이를 앉히겠다는 말이 아니다.”

“……다른 이요? 누구를 말씀하시나요? 오라버니들이라면 그들은-.”

“그 녀석들에 대한 것이 아니다.”

다시 한번 고개를 저은 그가 조금 웃으며 덧붙였다.

“너도 무언가를 놓치고 있구나.너. 네가 있지 않으냐.”

“네?”

“주가 가주의 자리에 누가 올라야 한다면 네가 오르라는 말이다.”

세화의 표정이 멍하게 풀려갔다.

“……네?”

“너도 똑같이 신영의 핏줄에서 이어져 나온 정통 주가 혈손인데 어찌하여 나 외엔 아무도 없다고 말하느냐. 네가 올라도 되는 것을.”

딸의 멍한 얼굴을 보며 주명윤이 피식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나는 이리 오래도록 잘못된 충성을 바쳤다. 가지 않아도 되는 길을 갔고 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을 충심으로 포장한 채 벌여 왔지.”

주명윤의 목소리는 회한으로 젖어 있었으나 어둡지만은 않았다.

“나 혼자만의 길이었다면 후회조차 없었을 테지만, 그로 인해 가족들을 힘들게 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런 위험에 빠뜨린 내가 어찌 그런 중임을 맡겠어.”

그나마 이 정도를 헤쳐 오고 있는 것도 저 아이가 이전에 겪었던 잔인하고 무거운 날들 때문이었다.

그걸 알면서 딸의 희생을 거래 삼은 그 무거운 자리에 제가 앉을 수는 없었다.

“하, 하지만 저는 가주의 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처음부터 모든 걸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리고…….”

주명윤의 시선이 흘끗 백기하에게로 향했다.

당사자인 딸 역시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며 당황하고 있는데 이 백가 사내는 그저 태연하기만 했다.

생각해 본 것이다. 백가의 가모가 아니라 주가의 가주가 된 이 아이를.

그때 미장과 백기하의 시선이 잠시 맞닿았다 떨어졌다.

‘내 딸 아이가 쭉 바르고 곧은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부디 도움을 부탁합니다.’

시선만으로 던져진 그 요청에 백기하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 말씀은 틀렸습니다.’

백기하의 짙은 눈이 빛났다.

시선을 강탈하는 완벽한 미형의 남자가 날카로운 표정을 풀어헤치며 웃어 보였다.

‘따님은 이미 완성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기꺼이 모든 일을 돕겠으나 따님은 그런 조력 없이도 모든 것을 현명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진심을 담아 주명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명윤이 안도하듯 긴 숨을 흘려보냈다.

‘이렇게 저 사내를 깊게 믿게 되다니.’

전장에서의 그들은 정말로 서로의 급소와 사혈만을 노리고 달려드는, 완벽한 적의 관계였다.

하여 신기하기만 했다.

저 사내가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에. 저 따뜻하고 다정한 시선이 향하는 곳이 제 딸이라는 사실에.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주명윤이 세화에게 물었다.

당황하고 있던 그녀가 가주의 자리에 대한 생각을 잠깐 던져 버리고 목소리를 낮춘 채 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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