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254)

콰앙!!

“!!”

가까스로 남은 영력을 모두 꺼내 제 앞을 방어했으나, 화살에 실린 영력이 훨씬 강했다.

일장이나 뒤로 날아간 서월이 흙바닥에 강하게 처박혔다.

퍽!

“흐으…… 으.”

침으로 간신히 기능을 돌려놓은 어깨는 다시금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화살을 막기 위해 남은 영력까지 모두 끄집어낸 터라 원신이 망가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 안 돼. 이, 이렇게는…….’

그 순간 다가온 발이 서월의 잘린 손목을 세차게 밟았다.

콰직!

“아악!”

영력으로 간신히 지혈만 해 두었던 손목에서 선혈이 튀었다.

그런 서월의 위로 긴 검은 머리카락이 폭포처럼 늘어졌다. 달빛을 가린 머리카락의 틈으로 적의 눈동자가 번뜩이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서월이 입술을 떨며 물었다.

“내, 내가 올 줄 알았다고? 어, 어떻게?”

반백 년도 살지 못한 이 어린 년이 내 행동을 예측했다고? 대체 어떻게?

이년은 행방불명되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럼 몸을 숨긴 채 지금껏 날 기다리며 몰래 따라오고 있었다는 건가?

“그야 그 늙은이가 임무에 실패하고 온 널 용서할 리 없으니까 그렇지. 넌 뭐라도 해야 했을 테니까.”

세화가 발끝에 힘을 주었다. 잘린 손목 위를 짓이기듯 비비며 더욱 세게 짓밟았다.

“아아악!!!”

그 상태로 서월의 머리채를 잡아 뜯듯 손에 감았다. 억지로 끌고 들어 올리며 흉하게 녹아 버린 흉터를 확인했다.

“그간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동안, 의문점이 생겼었거든. 너는 분명 날 데려가려 하는 것 같은데 그런 네가 왜 그 안가에까지 따라갔을까. 나는 영역 안의 저택에 있건만 왜 애꿎은 안가를 태워 내 자매들을 죽이려 했었는지.”

“흐윽, 큭!”

마치 더러운 것을 만지기라도 한 듯 양손에 쥔 머리카락을 털어 낸 세화가 다른 발로 서월의 명치를 걷어찼다.

퍽!

“커억! 컥!”

“아무래도 개인적인 원한 같더라고. 그래서 우리가 여기 있으면 네가 한 번 더 쑤시고 들어올 거라 예감했지. 너 같은 년은 쉬이 포기하지 않으니까.”

폐를 조여 오는 고통 속에서도 서월은 경험 많은 자신이, 어떤 위험 속에서도 빠져나갈 수 있었던 자신이 이런 꼴이 되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아, 안 돼. 어떻게든 살아서 나가야 해. 내가 고작 이런 년한테 당해서 이런 곳에서 죽을 순 없어.’

결국 제 특기인 눈물을 뽑아내며 애처롭게 빌었다.

“살, 살려 줘. 목숨만 살려 줘.”

여기서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의도하지 않았건만 입술이 떨리고 목이 메었다.

“그렇게만 해 주면 뭐든 할게. 내가 아는 건 다 말할게. 누가 날 보냈는지, 왜 보냈는지. 무슨 목적인지. 다 말할게. 응? 내가 전부 얘기할게.”

제 몸 안에 이토록 영력이 비어 있는 상황도, 이렇게 온몸이 망가진 상황도 처음이었다.

죽음이 목전에 놓인 상황에 생전 처음으로 지대한 공포가 서월을 덮쳤다.

“응? 제발 살려 줘. 살려 주세요. 잘못했습니다. 뭘 어떻게 하셔도 좋으니 제발 목숨만 살려 주세요. 뭐든지 할게요.”

서월이 얼굴을 온통 적시도록 울며 서럽게 애원했다.

“어, 어쩔 수 없이 한 거예요. 안 하면 나도 죽으니까. 주씨 혈족도 아닌 내가 살아남으려면 그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애처롭게 우는 서월을 세화가 무슨 생각인지 모를 표정으로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조금 웃었다.

“정말 뭐든지 할 수 있어? 내가 시키는 건 뭐든?”

“그, 그럼요! 그럴게요. 그럴 수 있어요.”

“그럼 내가 권속 계약을 맺자고 해도?”

“!!!”

서월의 표정이 잠시 멈췄다.

‘이, 이년이.’

권속 계약은 누군가에게 완전히 묶인 완전한 노예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목숨이 붙어 있어야 훗날을 도모할 수 있으니, 풀려날 수만 있다면 권속 계약도 나쁜 얘기는 아니었다.

게다가 권속 계약 때에는 주인에게 영력까지 넘겨받을 수 있으니 지금처럼 영력이 고갈된 상태에서는 더더욱.

하지만 그렇게 되면 신영에게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게 된다. 몸을 바꿀 가능성은 완벽히 사라지는 것이다.

평생 이런 몰골로 살아야 한다니. 끔찍한 미래가 너무나도 아찔하도록 선명하게 서월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하지만…… 일단 살아 있어야 해. 그래야 뭘 해도 할 수 있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짧은 순간에 판단을 마친 서월은 마치 그 말만을 기다린 양 고개를 끄덕였다.

“당, 당연하죠. 얼마든지요.”

세화의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그녀가 잠시 눈을 감자, 가느다란 몸 주위로 불꽃 같은 영력이 넘실거렸다.

어둠을 가르고 피워 올린 커다란 봉화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흣. 큿!”

영력이 넘치도록 실린 손가락이 다가와 마치 인장처럼 서월의 이마 한가운데를 눌렀다.

그곳을 통해 뜨거운 영력이 서월의 안으로 스며들었다.

불에 지지는 듯한 통증이 끝나자 서월은 온통 기진맥진해졌다.

그런 와중에도 눈물이 차올랐다.

이따위 노예 인장을 이마 한가운데 찍다니,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널, 기필코 가만두지 않을 거야.’

속이 뒤집혀 미칠 것 같았다.

손발이 다 잘린 듯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아니야.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이거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어차피 아까 같은 상황으로는 달아나기도 힘들어.’

서월의 눈이 보이지 않게 빛났다.

‘그래. 이대로 신영에게 가서, 이년이 계약 때문에 나를 믿을 테니 이 상태로 이년을 꼬여서 데려오겠다고 하자. 그러며 신영의 자비를 사는 거야.’

“그, 그럼 이제 저를 풀어 주시는 건가요?”

세화가 천천히 서월을 짓누르던 발을 치웠다.

세화의 몸을 휘감고 있던 불꽃 같은 영력 또한 조용히 가라앉았다.

손을 벌벌 떨면서도 서월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때마다 근육이 비명을 질렀으나 그래도 영력이 조금 들어왔다고 아까보다 몸 상태가 훨씬 나았다.

몸의 회복이 가속화되고 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지금보다 더 좋아질 것이다.

“권속 계약으로 인해 전달된 영력은 언제든 내가 다시 회수할 수 있다는 걸 알지?”

“그, 그럼요.”

“오늘 한 번은 그냥 보내 주지만 앞으로는 내 신호를 느끼면 곧장 내게로 달려와야 할 거야. 뭐든 하겠다는 말, 절대 잊지 말도록 해. 앞으로 넌 내 노예니까.”

‘이, 미, 친년이. 영력도 개똥만큼 나눠 준 주제에 저따위 말을…….’

울화가 치밀었으나 일단 이 자리를 피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그럼 가 봐.”

“정, 정말…… 가도 되는 거지요?”

“그래.”

“뒤, ……뒤를 쫓지 않으실 거지요?”

“왜. 쫓아 줘?”

“아, 아닙니다. 전 혹시 약조를 지키지 않으실까 봐.”

주춤주춤 서월의 다리가 뒤로 빠졌다.

“정, 정말로 가 봐도 되는 거지요?”

“그렇다니까.”

“……그럼.”

신중해야 했다. 저 미친년이 언제 마음을 바꿔 달려들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서월이 계속해서 뒤로 물러서는 동안에도 세화는 그저 서있기만 했다.

가만히 달을 올려다보는 모습에선 쫓아오려는 의도 따윈 보이지 않아서, 망설이던 서월이 뒤를 돌았다.

젖먹던 힘까지 끌어 올려 전속력으로 앞으로 달려나갔다.

추적이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끝까지 염두에 두며 몇 번이고 길과 방향을 바꾸었다.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추격자를 그렇게 모든 영력을 사용해 교란하며 하루를 꼬박 달렸을 참이었다.

“허억허억.”

서월은 제 앞에 놓인 벼랑의 입구를 보며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누군가 쫓는 이는 없는지. 신중에 신중을 기해 수백 번을 확인하고 나서야 이 방향으로 몸을 틀어 이제야 여기 온 것이다.

그녀가 준비해 둔 비밀 장소가 여기 있었다.

이제 더는 체력도 없고, 그년이 넣어 준 영력도 여기까지가 한계인 듯했다.

형세가 험한 산속으로 조심히 숨어들었다.

손목이 하나 없어진 탓에 균형이 잘 맞지 않았다. 영력이라도 조금 더 있어야 뭔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찢어질 듯 아픈 목을 부여잡고,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서월은 일반인들은 절대로 오지 않을 아주 깊은 곳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제가 준비해 뒀던 장소가 여전히 아무런 위험도 없이 잘 있는 것을 확인하고 몇 겹이나 되는 결계를 풀었다.

짧은 시간 후에 안에 든 것들이 모습을 보였다.

신영 곁에서 몸을 바꾸는 동안에는 흡수할 수 없었던. 신수를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의 양을 갖추고 나서 한꺼번에 흡수하려 했던 수십 함의 영단들과 패물들.

금전과 궤짝 가득한 비밀문서들.

그녀가 살아왔던 인생이 이곳에 모습을 보였다.

“죽여 버릴 거야.”

피투성이가 된 입술을 씹으며 서월이 울화 가득한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감히 이 서월의 이마에 노예 인장을 찍다니. 곱게 죽을 생각은 말아라. 살점 하나하나를 포를 떠서 갈가리 찢어 죽일 테니까.”

그때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런 말 안 할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 이제 하네.”

“……!!!!!!!!”

사색이 된 서월이 반사적으로 뒤를 돌았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모습을 한 세화가 나뭇가지 위에 마치 그네를 타듯 앉아 있었다.

“왜 그렇게 조심성이 많은 거야. 반나절이면 올 줄 알았더니 하루가 꼬박 걸렸잖아.”

“……너, 너! 어, 어떻게……. 대체 어떻게?!”

“어떻게 널 따라왔냐. 아니면 어떻게 이런 곳에 올 줄 알았냐. 뭐 이런 거 묻는 건가?”

가느다란 몸이 무게가 없는 듯 훌쩍 높은 가지 위에서 뛰어내렸다.

소리도 나지 않게 착지한 세화가 굳어진 서월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런 일을 하는 건 원하는 게 있다는 건데. 살수 노릇도 마다하지 않는 걸 보니 권력을 노리는 건 아니고.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며 비렁뱅이처럼 다니기도 하는 것을 보면 돈을 노리는 것도 아닌 것 같고.”

“……!”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영력을 노리는 것 같은데. 그럼 신영 몰래 빼돌린 영단쯤은 제법 있겠지. 그런 생각을 했거든, 내가.”

서월의 등 뒤로 쌓여 있는 영단을 본 세화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헌데 부지런하기도 하지. 내 생각보다 더 많았네?”

“너……, 너!!!!!”

‘이년! 저 영단들을 노린 것뿐 아니라, 처음부터 날 살려 줄 생각이 없었어!’

쾅!

서월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드는가 싶더니 몸에 얼마 남지 않은 영력이 일제히 폭발하듯 서월의 몸을 감쌌다

이곳이 털리고 나면 자신은 정말로 살아도 산 몸이 아니다. 죽음보다 못한 벌레 같은 삶만이 남을 것이다.

더 이상 달아날 수 없음을 직감한 서월이 죽음을 각오하며 달려들었다.

원신조차 돌보지 않고 깎아 내며 어떻게든 저 악귀 같은 년에게 조금의 타격이라도 입히려 노력했다. 잠깐의 틈이라도 낼 수 있기를 바라며.

그리하여 작은 함 한 개 분량의 영단만이라도 가지고 도망칠 수 있기를 바라며.

그 열망을 읽어낸 세화의 입매가 비틀렸다.

들고 있던 활을 시위도 걸지 않은 채 그대로 휘둘러 목을 후려쳤다.

퍽!!

“아악!”

“감히 내 자매를 죽이려 한 주제에.”

우우웅!!

세화의 영력이 활대를 타고 직선으로 서며, 거친 울림을 내뿜었다.

적자줏빛 광휘가 땅에 내린 노을처럼 끓어올랐다.

“아직도 감히 삶을 바라?”

이를 문 세화가 그것을 마치 검처럼 쥐고 휘둘렀다. 춤을 추듯 부드러운 움직임이었으나 활대에 실린 기세는 그렇지 않았다.

콰앙!!

폭풍처럼 사납고 짐승처럼 거친 영력의 존재감이 서월을 사방에서 압박했다.

“커억! 컥!”

흙바닥이 터져 나가고 서월의 몸 역시 피투성이로 터져 나갔다.

“흐으, 흐.”

서월의 입술이 분노와 공포로 벌벌 떨렸다.

……살아날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도망칠 틈 따위도 결코 찾을 수 없을 듯싶었다. 하지만-.

‘결코 너도 살려두지 않을테다.’

화르륵!

입술을 문 서월이 결국 제 몸 위에 영력의 업화를 덧씌웠다.

‘혼자 죽지 않겠어. 내가 오늘 죽어야 한다면 반드시 네년도 데리고 갈 것이다!’

그러나 그 결심도 하늘과 땅 사이로 벌어진 영력의 차이 앞에서는 부질없었다.

콰득!!

영력으로 벼려진 세화의 활이 검처럼 서월의 목을 통과했다.

“……ㄴ. ……ㄴ.”

뭔가 말을 하려는 것 같았으나 세화의 손이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 목이 떨어져 더는 나오는 소리가 없었다.

그 신음 같은 몇 마디를 끝으로 서월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머리를 잃은 몸 역시 땅으로 무너져 내렸다.

하나 세화의 시선은 그런 서월을 지나 저 먼 곳에 쌓여 있는 함들 위, 어떤 문양으로 향해 있었다.

함 위에 찍힌 선명한 문장은 방계 원로들만 사용하는 직인이었다.

‘처음부터 신영과 결탁하고 있었던 건가. 저 쓰레기들은.’

헛웃음이 흘러나왔지만 증좌까지 발견된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

그녀의 입매가 사납게 비틀렸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