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254)

* * *

세화가 깨어난 이후로는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기에 행렬은 그날 저녁 즈음엔 경계초소에 도착했다.

저 멀리, 이제는 영지선이 되어 버린 중강 너머로 육가 연합의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재상과 백기하를 발견한 이들이 미리 정한 신호에 따라 다시 공격태세를 갖췄다.

육가의 무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창으로 땅을 치며 발을 굴렀다.

쩌렁쩌렁하게 들려오는 구호가 위협적이었다.

당장이라도 이쪽으로 돌격할 듯이 기마한 채 활을 조준하며 주가의 초소병들을 압박했다.

덕분에 일행을 확인받고 영지선을 넘는 과정도 어렵지 않을 듯했다.

백기하 역시 초소 관리자와 이야기를 나눈 후 곧장 주가 영역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때였다.

몸속의 영력을 진정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안고 있어야 했던. 미장 어른껜 그렇게 말해 두며 안고 있던 아기 백호가 백기하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까닥이며 뭐라 입을 열었다.

“히. 햐.”

그녀의 말을 들은 백기하의 눈썹이 슬쩍 찌푸려졌다.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작은 백호가 내는 소리를 듣는 동안, 옆에서 백만용은 또다시 코피를 흘릴 듯한 얼굴로 입술만 바르르 떨었다.

“그러면 어떻게?”

“햐, 큐, 큥.”

“알겠어. 그대로 말씀드릴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주명윤이 먼저 다가왔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이곳에 진을 쳤으면 합니다. 그녀가 오늘 하룻밤만 더 이곳에 머물자 하는군요.”

“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주명윤이 땅을 울리며 압박을 넣고 있는 육가의 무사들과 표정을 구긴 주가의 무사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주가 초소병들은 백가 일행들이 당장이라도 여길 떠나 줬으면 좋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야 저 꼴도 보기 싫은 육가 무사들도 함께 사라질 테니 말이다.

“중강을 넘기만 하면 되는데, 여기서 말입니까?”

“따님의 말로는 그렇습니다.”

주명윤이 백호를 내려다보았으나 백호 역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백기하의 품에 안긴 아기 백호는 그 상태로 그들이 달려온 주가 영지의 긴 길을 먼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고향을 아쉬워하는 것도 같았다.

넘겨짚은 것이지만 정말 그렇다 해도 그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주명윤 역시 제 인생을 돌아보듯 긴 길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일행을 초소 옆, 평지에 진을 치도록 명령했다.

이유는 물어봐서 무엇하겠는가.

오래도록 마음고생했던 제 딸의 어렵지 않은 이런 부탁쯤이야 몇 번이고 들어줄 수 있는 것을.

그사이 세 자매도 주명윤과 아기 백호의 아련한 시선을 발견하고는 조금 마음이 울적해졌다.

원로 어른께서 지금까지 가문을 위해 얼마나 노력해 오셨는데.

그로 인해 늘 외로움을 홀로 견뎌 내야 했던 아가씨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다른 주가 일족들에 비해 어린 나이부터 감내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한데 그 모든 시간이 다 부질없어진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백가에 가게 된다면, 이전 백가행을 계획했을 때와는 또 다르게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런 이유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아가씨가 저리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도 백번 이해가 갔다.

그런 아가씨를 위해 뭔가를 해 드리고 싶던 영선이 망설이다 물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 좋아하시는 생선탕을 해 드릴까요?”

그 말을 들은 백호의 새파란 눈동자가 반짝하는 듯했다.

옆에서 영채가 “저도요.” 하고 말을 보탰다.

“아가씨 좋아하시는 매운 양념을 발라서 산적을 맛있게 구워 드릴게요.”

“큥! 캬!”

한 번도 보지 못한 백호의 밝은 반응에 백기하는 저도 모르게 제가 들은 단어들을 되뇌었다.

‘……매운 양념을 바른 산적. 생선탕.’

“아. 그나저나 신수도 양념이 된 음식을 먹어도 되나? 혹시 백가주께선 신수의 모습일 때 음식을 드셔 본 적 있으신가요?”

영채의 물음에 잠시 망설이던 그가 아마 괜찮을 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수란 영력으로 보호받는 존재니 음식 정도로 탈이 나진 않을 거다.”

그 말에 세 자매가 팔을 걷어붙였다.

당장 불 위로 솥이 오르고 따로 챙겨 온 식재료들 위로 맛있는 냄새가 가득한 양념들이 발라졌다.

주가의 초소 옆에 진을 친 탓에 서로를 의식한 각 가문의 무사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였다.

하나 식사 준비로 분주한 그 순간만은 경직된 분위기도 조금 풀어졌다.

* * *

서월은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렸다.

영력을 계속 사용한 탓에 시간이 갈수록 숨이 턱 끝까지 찼다.

팔에 힘을 주고 있을수록 제대로 치유되지 못한 어깨가 점점 더 아려왔다.

하지만 그것을 신경 쓸 정신은 지금 없었다.

‘어떻게 그년을 데려가야 할까. 살려서 데려오라는 말씀이시겠지?’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신호탄을 조준하던 영선의 모습이 타들어 간 볼 위에 박제된 듯 선명하기만 했다.

그년의 일행은 많았고 그 안엔 제 어깨를 박살 내 놓은 백가의 재상도 있었다. 신수 백기하와 주명윤 역시 그곳에 있다.

이 시도는 무모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이 아니라면 나는 평생 이런 몰골로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데. ……끔찍해. 평생이라니, 평생이 언제까지지?’

이 꼴을 하고서 늙어 가기까지 하라는 건가?

‘절대로 그럴 순 없어.’

서월의 얼굴이 다시금 일그러졌다. 쪼그라든 채 눌어붙은 왼쪽 얼굴 위의 피부들이 구겨지자, 끔찍하게 흉측한 모습이 만들어졌다.

‘살려서 데려가야 할 테지만 반병신을 만들지 말라는 말은 없었으니.’

뭐가 됐든 제 얼굴을 이따위로 만들어 놓은 그 계집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 자매들 역시 용서할 수 없으니 부인에게 바칠 땐, 팔다리를 자른 다음 끌고 가도 좋을 것이다.

혀도 뽑아 버리고 싶은데. 얼굴도 난자해 버리고 싶은데. 그래도 부인이 용납해 주실까?

‘저 시녀들 자체가 목적은 아니신 듯했으니 숨만 붙여 놓는다면 괜찮지 않을까?’

살이 녹아내리던 순간의 끔찍한 고통을 그년에게도 맛보여 주어야 한다.

이를 간 서월이 속도를 높였다.

어디로 가도 따라가겠지만 이왕이면 주가의 영역에서 잡을 수 있기를.

그렇다면 일이 더 수월해질테니.

* * *

그런 서월이 주명윤 일행을 따라잡은 것은 막 식사 준비가 끝나 갈 무렵이었다.

어둑해진 하늘 아래로 식욕을 자극하는 고소한 냄새들이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발걸음이 멈춰 섰다.

서월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저것들이 혹시 이미 영지선을 넘어간 것은 아닐까 내내 걱정한 탓이었다.

저 많은 일행과 짐을 끌고 어쩌면 이렇게도 신속하게 움직여 여기까지 왔는지.

다시 한번 이를 간 서월이 가쁜 호흡을 가라앉히며 품 안에서 침을 꺼내 들었다.

긴 침을 먼저 어깨에 꽂아 잠시나마 망가진 어깨에 기능을 돌려놓았다.

얼굴에도 곳곳에 침을 꽂았다. 지난번과는 또 다른 형태로 밀려난 근육들이 침을 빼내자 그대로 고정됐다.

왜소한 몸에 축 처진 눈. 비뚜름하게 아래로 내려간 입매.

영락없이 불쌍하고 안쓰러운, 가문 없이 떠도는 환계 최하층 환족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모습을 바꿨다고 안심할 순 없었다. 얼굴의 일그러진 피부는 침을 사용한 변용으로는 가릴 수 없었으니까.

게다가 그 씹어 먹어도 후련치 않을 영선이라는 계집은 지난번에도 불쌍한 모습을 하고 있던 자신에게 가차 없이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던가.

하여 서월은 무언가를 하나 더 실행해야 했다.

눈을 꾹 감은 서월이 제 영력을 반이 훨씬 넘게 영단으로 만들어 밖으로 꺼냈다.

그러다가 원신이 상하기라도 할까 봐 손이 얼마나 벌벌 떨리던지.

이만큼을 빼낸 것만으로도 그녀의 몸은 벌써 균형을 잃고 있었다.

어지럼증을 간신히 참아내며, 서월은 이 귀한 영단을 잃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다리 부분 옷을 길게 찢어 제 허리에 영단을 꽁꽁 싸맸다.

다행히 찢어진 옷이 서월의 모습을 더욱 불쌍하고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물론 저런 백가의 일반 무사들 따위, 영력을 빼내지 않고도 속여 넘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 상태로 만약 백가의 재상을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신수인 백기하를 만나기라도 한다면?

진을 친 행렬을 살펴보니, 보초 무리마다 높은 영력의 무사 두셋이 꼭 끼어 있었다.

저렇듯 무리마다 능력 있는 무사들을 끼워 넣은 조심성을 보면 그녀의 능력을 알아챌 인물들을 만나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가 없었다.

영단이 혹 빠지거나 흘러내릴 가능성이 있지는 않은지, 서월은 몇 번이고 확인했다.

그럴 가능성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나서야 조심스레 수풀 사이로 들어갔다.

중강에서 이어진 물줄기를 따라 순찰하며 백가의 무사들이 멀지 않은 곳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고 있었다.

가만히 그들을 주시하던 서월이 가지고 있던 침으로 손목과 팔뚝 여기저기에 상처를 만들었다.

오래지 않아 그들이 피 냄새를 감지했다. 서월의 의도대로.

단번에 서월을 발견한 그들이 작은 몸을 단단히 결박했다.

“살,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사로잡힌 서월이 애처롭게 울었다.

영지선을 넘어가려 한 것이 아니라고. 주가의 영역에서 달아나려 한 것은 결코 아니라며 온 얼굴을 적신 채 그들에게 빌었다.

주가에서는 최하층의 환족들에 대한 대우가 매우 좋지 않았다.

그들은 보통 종속 계약 문서를 써서 살아 있는 동안 제 주인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때문에 그런 이들은 주가 영역을 몰래 탈출하여 육가 연합으로 달아나곤 했다.

상황을 파악한 무사들이 난감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봤다.

꼬르륵.

그리고 대체 얼마나 굶었는지, 울며 애원하는 중에도 서월의 배에선 끊임없이 동정심을 자극하는 소리가 울려 왔다.

하여 무사들은 일단 서월을 끌고 진지로 돌아갔다.

단단히 줄을 매어 놓았으니 달아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테고, 일단 막 완성된 밥이라도 조금 먹이려 한 것이다.

조금의 여유도 없이 살을 파고드는 포승줄과 그녀를 끌고 가는 손놀림은 거칠기 그지없었으나 서월은 젖은 얼굴을 아래로 숙인 채 미소지었다.

잘 숨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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