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새벽이 다가오며 밤하늘을 반짝이던 별빛도 점차 사라져 갔다.
하늘 끝부터 물을 탄 듯 색이 흐려지기 시작하자 백기하는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불침번을 서는 이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조용히 움직이며 천막 사이를 움직여 누군가를 불러냈다.
세화가 눈을 떴다는 말에, 주명윤과 세 시녀가 당장 그를 따라 움직였다.
부르고 싶지는 않았으나 이쪽에 지대하게 신경을 쓰고 있던 탓에 금세 이 움직임을 알아챈 백만용까지도.
어제 백기하가 천막 안으로 아기 백호를 데리고 들어가며 결계를 쳐 두었었다.
하여 안의 상황을 알 수가 없어 다들 밤새 궁금해했던 것이다.
“세화야!”
“아가씨!”
“아가씨, 깨어나셨군요!”
모습이야 어쨌건 간에 눈을 뜨고 있는 작은 백호의 모습을 본 이들이 하나같이 기뻐하며 다가왔다.
“세화야, 어디 아픈 데는 없는 것이냐. 몸은 다 괜찮은 게야?”
주명윤의 걱정스러운 말을 들은 작은 백호가 세차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걱정하실 것 하나도 없다는 듯이.
“어젯밤엔 잠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도 했었습니다. 아직 영력이 고정되지 않아 다시 이 모습이 된 듯한데 이것도 곧 회복할 것입니다.”
백기하의 설명을 듣자 주명윤의 마음이 그제야 풀어지는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이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감사를 전했다.
“백가주, 고생하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미장 어른. 당연히 제가 할 일입니다.”
“아닙니다. 백가주가 아니었다면 딸아이는 이미 며칠 전 유명을 달리했을 것입니다. 말로는 다 갚지 못할 큰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우린 이제 다 한 가족이 아닙니까.”
백가주가 난감한 얼굴로 마주 허리를 굽히고 있을 때 구르듯 다가온 아기 백호가 그의 다리를 툭툭 쳤다.
“…….”
“휴.”
“…….”
“큥 큐.”
“허미…….”
아기 백호의 목소리를 들은 백만용의 코 평수가 단번에 넓어졌다.
태어나 처음 보는 작은 신수가 움직이고 소리 내고 있었다.
‘마, 맙소사. 어찌 저런 사랑스러운 생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조그마한 분홍 귀에 분홍 코. 앙증맞은 발가락과 분홍 발바닥. 깜빡일 때마다 보석처럼 빛나는 새파란 눈동자.
저 아기 신수가 그의 다리 사이를 활로 겨냥하던 원로댁 아가씨라는 것을 알고야 있지만.
“허억, 허억.”
백만용의 얼굴이 마치 코피라도 흘릴 듯 붉어졌다.
밭은 호흡을 뱉던 그가 간신히 제 떨리는 손을 맞잡아 진정시키며 감탄했다.
“제가, 제가 대체 무슨 공덕을 쌓았기에 어떻게 이토록 큰 복을 받을 수 있는 걸까요. 신성하고 상서로운 신수의 모습을 이토록 어릴 때부터 볼 수 있다니. 하늘께서 정말로 백가를, 저를 크게 쓰시려고 작정을 하시지 않고서야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 연유로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아가씨의 발바닥을 한 번만 만져 볼 수 있을까요.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이 백만용이 아가씨를 위해- 읍읍!”
영채가 그의 입을 조용히 틀어막았다.
서월이 세화를 납치하려 할 때 도와준 일로 백만용을 보는 세 자매의 시선은 더 이상 차갑거나 날카롭진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눈치는 챙겨야지. 모처럼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고 있는데 혼자 이리 찬물을 끼얹을 생각인가.
“히, 큐. 큥.”
“……엄마야.”
하지만 그런 세 자매의 입가도 백호의 입에서 나는 온갖 이상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들으며 흐물흐물 풀어져 버렸다.
모두의 시선이 제게로 쏠리자 아기 백호는 답답한 듯 한숨을 쉬기도 하고 뒤로 주저앉기도 했다.
그 모습조차 ‘털썩’이 아니라 ‘탈싹’, ‘찰팍’ 같은 의태어가 어울릴 만한 모습이라.
‘미친. 귀여워! 귀여워. 귀여워!’
백만용의 입을 틀어막은 영채의 시선마저도 일렁일렁했다.
작은 신수를 다정하게 내려다보며 백기하가 조언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영력이 안정되기 전까지는 제대로 소리를 내기 힘들 거야. 그러니 그냥 나오는 대로 편하게 얘기해.”
“히. 큐.”
“괜찮아. 나는 다 알아들을 수 있잖아. 내가 전해 드리면 되지.”
같은 백호 신수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 몸속에 담긴 그의 영력 때문인지, 그녀가 하는 말을 그는 모두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어젯밤, 세화도 그것을 알아채긴 했으나 알아챈 시점이 조금 늦었다.
단단한 근육을 그대로 내보인 채 바뀐 모습의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허탈하고 멍한 표정을 발견한 탓이었다.
얼마나 당황스럽고 미안하던지. 뭐라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데 짐승의 모습으로는 그조차 여의치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그에게 제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며 필사적이었다.
“큐. 휴휴. 햐.”
한번 사람이 되었었으니 곧 또 그렇게 될 거라고. 당장 조금 후에 다시 모습이 변할지 모른다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지만 백기하의 표정은 점점 딱딱해지기만 했다.
커다란 손으로 눈 아래를 가리는 모습마저 한숨을 감추려는 것 같아 그녀를 초조하게 했다.
미안한 나머지 조용히 다가가 그의 다리를 감싸 안았는데,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다.
바로 아래에선 볼 수 있는, 잔뜩 허물어진 채 웃음을 참고 있던 그의 입가를.
그녀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마치 정말 짐승이라도 된 양 그의 다리를 물어 버렸다.
근육이 꽉 짜인 다리는 그래 봤자 이빨 자국도 나지 않았지만.
어쨌건 간에 일이 그렇게 되어.
그렇게 말해도 나는 알아들을 수 있지 않냐고.
제일 말하고 싶은 부분을 은근슬쩍 강조한 백기하가 우쭐해지려는 제 입매를 억지로 가라앉히며 그녀에게 손을 뻗던 때였다.
작은 백호가 움찔하며 몸을 멈췄다. 그 움직임에 백기하의 손도 허공에서 멈칫거렸다.
“…….”
“…….”
찰나의 어색함을 천막 안에 모여든 모두가 보고 있었다.
표정을 서둘러 갈무리한 백기하가 아무렇지 않은 척 상황을 수습했다.
“흠흠. 아무리 지금 신수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해도, 귀한 아가씨께 제가 너무 허물없이 손을 내밀었군요. 죄송합니다.”
영선이 “시선이 맞지 않아 답답하시지요?” 하며 세화를 안아 들었다.
“…….”
그 모습이 어찌나 마음에 들지 않던지. 백기하의 눈썹이 잠시 비뚜름히 솟았다.
이전에는 잘만 보아 넘기던 광경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지금은 다른 이의 품에 안겨 있는 세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차가워지는 듯했다.
“아가씨를 이리 다오. 지난밤 그랬던 것처럼 내가 아가씨께 영력을 넣어 드리마.”
차분하게 목소리를 내리깐 그가 영선을 보며 말했다.
주명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자마자 영선이 세화를 내밀었다.
세화가 얌전히 백기하의 팔로 넘어가며 그를 불렀다.
“……냐.”
“음?”
“냥냐.”
“아, 그렇군. 미장 어른, 잠시 앉으시지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백만용이 서둘러 의자를 준비했다.
백기하는 대화가 시작되기 전 천막 안에 결계를 꼼꼼히 둘러쳤다.
당연한 듯 아기 백호를 제 무릎에 앉힌 채였다.
“먼저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저의 의견이 아닙니다. 그녀의 의견입니다.”
“뭔데 그러십니까.”
“음. 그러니까.”
백기하가 답지 않게 뜸을 들이자 아기 백호가 다시 그를 올려다보며 햐- 하고 울었다.
재촉받은 백기하가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저희가 할 일이 있어, 부득이 백가에는 다른 분들만 먼저 가셨으면 합니다.”
“……네?”
주명윤이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저희는, 그러니까 따님과 저는 잠시 주가 영역에 남았다가 가겠다는 말입니다.”
* * *
새벽, 백기하가 제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걸 알고 난 이후.
어색한 분위기 사이로 세화는 제가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전해 들었다.
일련의 일들에 대한 정보를 전해 들은 조그만 백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저택을 정리해 움직이신 거라 한다면 가족들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아마도 오라버니들과 어머니껜 아버지께서 미리 서신을 넣으셨을 거예요.
생각을 거듭하는 동안 아기 백호의 꼬리가 바닥을 탁탁 쳤다.
-신영은 날 끌고 가야 하는데 나는 모습을 감추었고, 아버지마저 백가로 가셔야 하니 다른 인질을 찾아야 하죠.
“하면?”
-내 생각엔 아마도 신영이 어머니와 오빠들을 감시하거나 억류하고 있을 거예요. 물론 아버지가 얻은 민심을 고려하고 당장 상황을 극단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는 걸 생각할 때 그들에게 위해를 끼치진 않았을 듯하지만요.
“…….”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으실 각오까지 하신 이상 그들이 영역에 남아 있으면 일이 어려워져요. 먼저 데려와야 해요.
“초소에는 벌써 우리 일행의 숫자와 짐의 목록이 세부적인 것까지 모두 전달됐을 거야. 나가지 않고 여기 남을 수는 없어.”
-일단 한 번 나가죠. 그래야 신영도 다른 이변이 없다 여길 테니.
“나간 이후엔 어떻게 하려고?”
-당신이 내가 이미 신수가 된 것 같다고 말해 주었잖아요. 뭐, 아직 반쪽짜리긴 하지만요. 신수의 모습을 한 당신은 주가의 결계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으니, 신수가 된 것이 맞다면 나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그대의 이야긴, 일단 한 번 영지를 나가 결계를 통과했다가 나와 그대만, 그러니까 둘만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자는 거지?”
-바로 그거예요.
* * *
“부인과 아들들에겐 제가 이미 영지 경계선 밖으로 나가라 서신을 보내 두었습니다. 셋 다 늘 영지 경계선을 직접 순찰하곤 하니 서신대로 따르는 것이 어렵진 않았을 겁니다.”
“따님의 말로는 아마도 신영의 수하 누군가가 가까이에 있을 거랍니다. 위해를 끼치진 않겠지만 영지 밖을 나가거나 몸을 감추려 할 때는 아마도 조언을 가장해 제재가 가해질 거라고.”
“…….”
십 년 넘게 가까이 지냈던 수하가 신영의 수족이었다는, 그 상황을 이미 며칠 전 겪어 본 주명윤은 무슨 의미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제 옆에도 그런 자가 있었는데, 아들들의 곁에 없으란 법이 없지요. 아들들의 지위가 아직 낮아 그 부분을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신영의 목적은 원로 어른을 옥죄고 감시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이 일행도 감시받고 있을 테니 함께하고 싶어도 저는 불가능하겠군요.”
“백가로 돌아가는 척하다가 신수의 모습으로 주가 영지 경계선을 넘어와야 하는 터라, 어차피 저와 따님밖에는 갈 수가 없습니다. 원로 어른께서는 저희 가문 재상과 함께 백가로 가 주십시오.”
“…….”
“따님을 잘 지키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원로 어른을 다시 뵐 때는 영력이 안정되어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주명윤이 다시 한번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이자 백기하가 손을 내저었다.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원로 어른.”
“아닙니다. 딸의 목숨을 구해 주신 것으로도 모자라 제 가족의 목숨을 구하러 가 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나눌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모두 저를 위한 일입니다.”
당연히 그러했다.
이대로만 된다면 그는 그녀와 단둘이. 둘만. 둘이서만! 비밀스럽게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방해꾼들, 아니, 일행과 본의 아니게. 정말 본의 아니게 떨어져서 말이다.
게다가 작은 아기 신수는 걸음조차 빠르지 못하니 어쩔 수 없이 그는 내도록 그녀를 안아 품에 넣고 옮겨야 할 것이다.
영력이 진정되게끔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며 제힘을 넣어 줘야 할 테고.
‘그러다 다시 그녀가 사람의 모습으로 바뀐다면.’
당장 내일, 아니 오늘 밤이라도 모습이 바뀔지 모르는데.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그녀와 오직 둘만이 남은 상황에서 그렇게 된다면…….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는 그런 상황이 온다면…….
빠르게 풀어지는 제 입매를 자각한 백기하가 서둘러 커다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
손 위로 드러난 나머지 부분들이 온통 붉어져 가고 있는 것은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