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254)

백기하의 울대가 조용히 움직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녀가 생사를 넘나들다 깨어난 것임을 알면서도 어째서 자꾸 이리 헛생각이 들려 하는 것인지.

게다가 이리 마음 아프게 우는 그녀를 보고 말이다.

“…….”

열기가 스미는 제 목을 다스린 그가 조심히 그녀의 등 뒤로 팔을 둘렀다.

그녀에겐 보살핌이 필요했다.

아무리 송곳니에 담겼던 거대한 영력이 치유를 도왔다 해도, 그 영력이 정착하기 위해 몸에는 많은 무리가 따랐을 것이다.

“왜 울어.”

그가 부드럽게 세화의 마른 어깨를 토닥이며 물었다.

“왜 그래. 너무 놀라서 그래?”

우는 그녀의 몸을 다독이며 그는 같은 말을 천천히 반복했다.

“그런데 안 봤어. 정말이야. ……내가 미안해.”

“…….”

“혹시 그것 때문이 아니면 꿈이라도 생각났어? 뭔가가 그대를 슬프게 했어?”

“…….”

“만약 그런 거면 내게 얘기하면 돼. 뭐든 내가 해결해 줄게. 그러니 다 얘기해. 이리 울지만 말고.”

“…….”

“말해 봐. 응?”

제 귓가를 천천히 감싸는 그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녀는 조금 애가 탔다.

하지 말라는데. 제발 이젠 날 위해 손해 보지 말라는데.

‘그런데도 뭘 그렇게 다 해 주겠다고.’

입술을 힘주어 깨문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

백기하는 잠시 말을 잊었다.

눈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 투명한 눈물로 젖어있었다.

그 모습이 그에겐 마치 꽃잎을 띄운 호수처럼 보였다.

힘껏 깨물어 붉어진 입술 역시 평소보다 훨씬 달콤해 보였고, 저를 올려다보는 조금 억울해 보이는 시선마저도 그저 그의 시야를 멍하게 만들 뿐이라.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울대가 다시 한번 요동치며 움직였다.

세화가 불쑥 물었다.

“내가 정말 백호가 되었었어요?”

그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응.”

“신수가 되려고 했다는 말이에요?”

“사실 난 이미 그대가 신수로 거듭난 것은 아닌가 해.”

“예?”

지금 뭐라고.

“신수? 내가, ……이미 신수라고요?”

“응. 그 전에 그대가 용의 모습으로도 변했던 것도 그렇고.”

“하지만 신수라기엔-.”

“응. 크기도 그렇고 힘의 운용도 그렇고 뭔가 문제가 있지. 내가 보기엔 영력 때문인 것 같아.”

영력?

“이미 그대의 몸속엔 능히 완벽한 신수가 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제대로 섞이지 못한 거지.”

“…….”

“그러니 그대 몸 안에 담긴 영력들 중 가장 큰 두 가지 영력을 하나로 섞을 방법을 찾거나, 그도 아니라면 한 가지 영력을 키워 다른 영력들을 누르거나 해야 할 것 같아.”

“…….”

“얘기가 길어질지도 모르는데 일단 잠시 좀 앉는 게 어때. 그대도 몸이 힘들 거고.”

뭐가 됐든 일단 그는 그녀와 좀 떨어져야 했다.

더 이상 이 굴곡이 완벽한 몸을 품 안에 안고 있으면 그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올 것 같았으니까.

한데.

‘아, 아뿔싸!’

천막 안엔 가구는커녕 두꺼운 모포 한 장만 달랑 바닥에 깔려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가 사람의 모습으로 변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 했던 것이다.

신수로 변용한 제 몸 크기를 생각해, 조금이라도 더 공간을 확보하고자 일체의 가구를 제외한 탓이었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천막 안엔 그녀의 체향이 가득 번지고 있었다.

거기다 바닥에 깔린 두툼한 모포. 체온이 전해질 정도로 얇디얇은 서로의 차림.

매달리듯 그를 잡아당기는 여린 팔. 붉은 입술. 눈가.

강하게 시험받는 기분이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시선과 마주하니 누군가가 등줄기를 긁어내리는 듯했다.

“자리가 없는, 없는데. 그러면 저 모포, 위에 내가. 내가 먼저 앉고 그대는 내 무릎에 앉으면…….”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을 내뱉다가 헉 소리를 내며 정신을 차렸다.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건가. 그녀를 떨어뜨려 놓으려고 한 거면서 어디에 앉힌다고? 이런 미친놈을 봤나.’

한데 황급히 말을 정정하기도 전에 젖은 눈가를 닦아 낸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그, 래요.”

“…….”

그는 바람을 다스리는 호족이었다.

태어나 한 번도 더위를 느껴 본 적 없다는 말이었다.

헌데도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왜 이리 몸에서 열이 치솟고 체온이 쉬이 다스려지지 않는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목이 마른데.’

당장 저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추지 않으면…….

볼을 적시며 흐르는 저 투명한 것들을 낱낱이 삼키지 않으면 그의 목을 태우는 이 갈증이 영원히 식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머리를 거치지 않은 대사가 어느 순간 불쑥 튀어나왔다.

“그대에게 입 맞춰도 될까?”

“네?”

“아,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러니까.”

“…….”

“지금 영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 영력을 넣어 주기도 하고. 얼마나 안정됐는지도 한번 보겠다는 그런…….”

그래.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확인을 굳이 손목을 잡고 살피지 않아도 되잖아.

“그래서 혹시 아직 회복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내가 조금 돕기도 하고. 그래서 몸이 더 좋아지면 좋은 거고…….”

어차피 밤새 그녀에게 영력을 쏟아부으려 하지 않았던가.

그거라면 결코 흑심이 아니고 그녀의 회복을 돕는 일이었다.

생각이 거듭될수록 어쩐지 양심을 자극하는 방향으로 길이 나는 듯하긴 했으나 그게 무슨 상관일까.

마주친 시선에 심장이 이리도 구르듯 뛰고 있는데.

그때였다.

그녀가 먼저 뒤꿈치를 들었다.

지난번처럼, 닿기만 하는 입맞춤이 마치 부딪치듯 마주했다 떨어지며 짧은 소리를 냈다.

촉!

“!”

“하, 고 싶으면 그냥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도톰하고 붉은 입술에서, 부끄러움 가득한 목소리가 망설이듯 흘러나왔다.

“그걸 왜 물어본담.”

많은 변명도 망설임도, 그 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마치 도화선이 당겨지기라도 한 것처럼, 이번엔 그가 그녀를 끌어당겼다.

잇자국이 난 빨간 입술을 단번에 삼켰다.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작은 몸을 제 품 안으로 밀어 넣었다.

“! 읏……!”

그것으로도 모자라 신음이 샌 그녀의 작은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새빨간 혀를 찾아 제 것에 감았다. 물기 어린 호흡을 남김없이 빨아들이자 팔 안의 가는 몸이 잘게 떨렸다.

“읏…… 흐.”

그에게도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천천히, 그녀의 속도에 맞춰 모든 걸 진행하고 싶은 마음이.

하지만 그는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기다려 왔고 바로 얼마 전엔 그들이 혼인할 것이라는 약속까지 받아 내지 않았던가.

그 이후엔 미장과의 대화를 마치느라 기쁨조차 얼마간 잊어야 했었으니.

오래도록 반강제로 제어해야 했던 욕망이 짧은 접촉에 날뛰게 되는 것 역시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그녀가 오래도록 아팠다가 막 깨어났다는 사실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고. 본래의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고. 영력을 나누어 주고 놓아줘야 한다고.

그렇게 되뇌는 그의 목 뒤로 가느다란 팔이 올라왔다.

그의 겉옷은 그녀에겐 너무 컸기에 팔을 들어 올리자 소매가 한참 내려갔다.

때문에 그의 목을 끌어안은 그녀의 팔은 새하얀 피부가 드러난 맨살이었다.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애처로운 체온이 그의 가슴 속 저 아래 뜨끈한 감정을 자극했다.

어쩌면 이렇게도 그녀의 모든 것에 행복해질 수 있는 걸까.

이럴 수도 있는 건가?

그녀를 만난 이후 살아온 시간보다 그녀를 모르는 채 살아온 시간이 더 길건만. 이제는 그날들이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과거는 온통 회색빛이고 미래 역시 어떤 것도 뚜렷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현재만은 이토록 어두운 밤, 어두운 천막 안에서도 아주 적은 변화의 색들마저도 모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목숨을 돌볼 수 없는 것이다.

영원의 삶 따위. 두 번째 목숨 따위.

그가 그녀와 함께하는 이 순간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에.

백기하는 누구도 그의 품 안의 것을 빼앗아 갈 수 없도록 다시금 그녀를 세차게 끌어안았다.

풍만한 가슴이 또다시 얇은 홑옷만 걸친 그의 가슴을 자극하며 짓눌렸다.

빠르게 뜨거워지는 서로의 체온이 선명했으나 그들의 몸은 더더욱 한 치의 틈도 없이 가까워졌다.

“흐으, 흐…….”

그의 손이 그녀의 옷깃 사이로 침범했다.

놀랍도록 매끄럽게 녹아드는 피부의 감촉을 느끼며 위로 올라갔다.

도톰하게 솟은, 그리하여 그를 계속 목마르게 한 둔덕을 감싸 쥐자 그녀의 몸이 잔뜩 긴장하며 옅은 신음을 흘렸다.

“흐으…….”

모든 감각들이 깨어나듯 선명해지는 듯했다.

입 안쪽 미끈한 점막들이 뒤엉킨 혀에 스칠 때마다 머리가 어지러워질 정도로 온몸이 긴장했다.

힘이 풀리는 그녀의 다리를 따라 그도 무릎을 굽혔다.

작은 백호가 누워 있던 모포 위에 몸을 눕힌 그녀를 보며, 백기하의 머리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제 영력을 담고, 영력의 특성에 맞춰 변해 백호가 된 그녀라니.

전혀 의도치 못한 일일뿐더러 여전히 염려가 많긴 했다.

허나 만약 그녀의 몸에 전혀 이상이 없고 오히려 그로 인해 완벽한 신수로 탈바꿈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녀가 어떤 색을 가진 어떤 신수여도 기뻐했겠지만 만약…….’

한 쌍의 백호를 떠올리는 그의 시선이 완연히 더욱 짙어졌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는 처음부터 하늘이 내려 주신 짝이 아닐는지.’

내 짝. 내 반려.

그의 생에 한 번도 존재해 본 적 없던 그 단어들에 사나운 욕심이 솟아올랐다.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고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파르르 떨리다 힘 있게 감기는 속눈썹을 지켜보며 배 속에 열이 오르고 목이 바싹 탔다.

“세화. 주세화.”

타는 듯이 뜨거워진 목소리가 제가 듣기에도 여유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그녀가 그의 품 안에 있는데.

전생에서는 그를 밀어내기만 하고 조금의 여지조차 주지 않아서. 너무나 틈이 없어서.

티끌만 한 가능성마저 없어서.

애써 소식조차 끊어 내지 않고는 잠조차 제대로 이룰 수 없게 하던 그녀였는데.

한데 이번 생에서는 이리 가까이 있다.

그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들을 보여 주면서.

스르륵.

눕혀진 그녀가 무릎을 세우자, 그녀의 맨살을 가리고 있던 얇은 장포가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다.

그녀는 아까처럼 서둘러 제 몸을 가리지 않았다.

그가 어둠 속에서도 새하얗게 빛나는 그녀의 나신을 향해 몸을 굽혔다.

현기증이 일 정도로 달콤한 향을 품기는 맨살을 입에 담았다.

밭은 숨을 헐떡이는 그녀의 폐가 생생히 느껴졌다.

그 숨마저 모두 삼키고 싶은 백기하가 입술 사이에 문 것을 강하게 빨아들였다. 설원 같은 피부에 놀랍도록 집요하게 흔적을 남겼다.

그럼에도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거면 됐다. 싫어하지 않는다면. 그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그것 하나면 그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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