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101/254)

* * *

세화는 꿈을 꾸고 있었다.

십오 년간 그녀를 따라다닌 악몽들을.

시간을 되돌리고부터는 더욱 강하고 고통스럽게 발목을 붙잡는 그 기억들을 다시 보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조금도 흐려지지 않는 그것들은 언제고 그녀를 과거에 데려다 놓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둠이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사방을 꼼꼼히 둘러싸고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비참하게 죽어 버린 이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코끝까지 밀어닥친 피 냄새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계속해서 끔찍한 비명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제 것인지 그들의 것인지 그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눈에 익은 백호가 나타난 것은.

“커허엉―!”

커다란 울음소리를 내며 달려온 백호는 마치 그녀를 지키듯 어둠을 향해 입을 벌렸다.

“―――!!”

그와 동시에 세차게 뿜어져 나온 백호의 영력이 주변의 어둠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바람을 이기지 못한 새까만 어둠이 천천히 흐려져 갔다.

피 냄새도, 비명 소리도. 어둠과 함께 점차 멀어져 갔다.

안도감에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풀썩 주저앉고 나서도, 그녀는 곧바로 저를 지켜 주는 백호에게 다가가 몸을 기댔다.

부드러운 털의 감촉과 청량한 향내가 그녀의 마음을 더없이 안심시켜 주는 듯했다.

‘……이 향. 분명 어딘가에서. 그러니까…….’

눈을 뜬 것은 향이 아닌 무언가에 제가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깨달아서였다.

꿈이 물러간 자리가 막 잠에서 깨어난 그녀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뭐지? 여기가 어디지?’

보이는 것은 천막의 지붕. 그리고 자신을 둥글게 둘러싼 신수 하나.

심해 같은 새파란 눈이 동그랗게 뜨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화의 까만 동공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잠시 깜빡거렸다.

지금까지 보고 있었던 것이 꿈이라는 것도 알겠고, 지금은 자신이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도 알겠는데…….

왜 그와 자신이 이런 곳에서 둘만 있는 것인지. 왜 그는 신수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신 왜 여기 있어요?”

짐승의 모습임에도 어쩐지 붉어진 얼굴을 하고 있던 백호가 시선을 피한 채 모습을 변용했다.

지탱할 곳을 잃은 그녀가 휘청이자, 그가 다른 곳에 눈을 둔 채로 서둘러 세화의 몸을 붙잡았다.

그러다 맨살의 감촉에 화들짝 놀라 손을 떼며 황급히 겉옷을 벗어 내밀었다.

“이, 일단 이거부터 걸치고…….”

“……!”

그제야 제 상태를 자각한 세화가 한순간에 새빨개진 얼굴로 입만 뻐끔거렸다.

‘마, 맙소사.’

어째서 바로 눈치채지 못했을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인 제 모습에 비명을 지를 뻔한 세화가 서둘러 목소리를 삼켰다.

백기하의 손에서 겉옷을 낚아채고는 서둘러 허리춤을 꽁꽁 잡아 묶었다.

그녀가 입술을 떨며 물었다.

“이, 이게 뭐예요? 당, 당신 혹시 내 옷을…….”

숨 뒤로 삼킨 세화의 말에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 있는지.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핏기가 빠져나가듯 창백해진 얼굴을 한 그가 황급히 변명했다.

“절대 아니야.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게 아니고 그러니까 그대가 신수의 모습으로 변했었는데 그 모습이 변용할 때…….”

“거짓말하지 말아요! 당신은 변용할 때마다 옷을 그대로 차려입은 채면서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게 말이 돼요?”

신수로 변화한다는 것은 또 다른 세계의 제 모습을 불러오는 것과 같았다.

때문에 신수의 모습에서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변용한다 하여 나신을 그대로 드러낸다거나 하는 경우는 없었던 것이다.

여전히 그녀와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백기하가 침착하게, ……는 아니고, 침착을 가장하며 변명했다.

“아니야, 들어 봐. 그러니까 내가 본 것은. 그대가 작은 아기 백호가 되었는데-.”

“예?”

‘백호? 이 남자, 지금 백룡을 잘못 말한 건가?’

“도통 눈을 뜨지 못하고 있어서 내가 밤새 영력을 불어넣기 위해 그대를 이곳에 데려온 거야. 절대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내 새하얀 양심에 대고 맹세하건대 조금의 흑심도 없었고 그저 그대의 몸을 걱정한 것뿐이고…….”

“…….”

얼마나 당황했는지 그는 마치 백만용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엄청난 속도로 쉴 새 없이 상황을 설명했다.

“그랬는데 갑자기 어느 순간 백가의 영력에 감싸진 그대의 몸이 허공에 떠오르더니 약한 회오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겠어? 나는 혹 그 힘이 그대를 다치게 하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뿐인데…… 그대가 모습을 변용할 때 날카로운 영력의 바람이 옷을……. 그러니까 옷이…….”

“…….”

“절대로 나는 그대에게 손가락 하나도…….”

변명 아닌 변명의 말에 세화가 목까지 새빨개진 얼굴로 입술을 물며 그를 노려봤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지난한 고통 속에서도 제대로 울어 본 적 없던 그녀의 눈가가 그렁그렁해졌다.

“내가 그렇게 옷이 다 날아간 채로 모습을 바꾸고 있을 때 당신은 그걸 다 보고 있었다는 거네요?”

“!”

백기하의 창백해졌던 얼굴에 다시 빨갛게 피가 몰렸다.

그 반응에서 대답을 짐작한 그녀가 빠르게 옆으로 달렸다.

“잠깐!”

천막을 나가려 하는 그녀의 몸을 단단한 팔이 뒤에서 끌어안았다.

“이거 놓……!”

“쉬, 쉬. 깊은 밤이야. 모두 자고 있어.”

“…….”

“그리고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로 그대의 모습이 백호로 변했었어.”

남자가 진지한 목소리에 염려를 가득 담아 말했다.

“아마도 위급한 상황에서 내 송곳니를 사용해 치료한 탓인 듯하니, 조금만 더 살펴보게 해 줘.”

“송, 곳니요?”

“응. 그래서 혹시 내부에서 힘의 흐름이 뒤틀리기라도 한 것일까 봐. 그래서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 정말 걱정되니까.”

거짓이라고는 한 점 느껴지지 않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얼마나 많은 안타까움과 애틋함, 염려가 담긴 것인지.

‘게다가 송곳니라니.’

그의 말에 그녀의 몸에서 힘이 풀렸다.

머뭇거리며 돌아선 그녀가 그를 올려다봤다.

입술을 꾹 물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조금 전의 그처럼 창백해졌다.

“송곳니라면……. 당신. 혹시 또 내게…….”

세화가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내게 혹시.”

차마 내가 알고 있는 그것을 사용한 것이냐고. 그걸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백기하는 이미 그 질문을 알고 있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별것 아냐. 그보다 강한 백가 영력이 흡수되며 당신에게 해가 되었을까 봐 그게 걱정이야.”

“…….”

“그러니 내가 조금 더 영력을 나눠 주며 살펴보게 해 줘. 그것 외에는 절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을 테니.”

그러고 보면 제 몸은 신영의 불길에 온통 뭉그러졌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었다.

수많은 약을 마시고 발라도 몸을 태우는 열기는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었는데…….

그럼에도 이렇게 멀쩡해진 채로 눈을 떴으니. 이를 위해 그가 또 어떤 일들을 했을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시금 그렁해지는 세화의 눈가를 보며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왜. 어디 아파? 또 어디가 안 좋아?”

자신의 귀물을 아낌없이 사용해 놓고는 당신이 아플까 봐 그것만이 너무 걱정된다고.

그것 하나만을 염려하는 이런 남자에게 어떻게 더 화를 낼 수 있을까.

질책하듯 내뱉고 말았던 물음마저도 미안해질 지경이라 세화가 입술만 물었다.

생각해 보면 이런 몸뚱이 따위.

전생에선 살가죽이 도려내지던 때에도, 끊임없이 불에 지져지던 때에도, 이미 신영의 호위들에게 모두 보였던 것을.

제 은인에게 불의의 사고로 조금 보인 것이 뭐 그리 대수고 큰일이라고 이 남자를 질책한 것인지.

더없이 미안해진 그녀가 천천히 다가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왜 울어.”

내가 어떻게 하다가 당신 같은 이의 마음을 얻는 행운을 가지게 되었을까.

나도 잘해야지.

당신이 내게 해 주는 것 그 이상으로.

그 이상이 있을까 걱정될 정도로 내어 주는 큰마음에 꼭 모두 보답해 주어야지.

매달리듯 그의 몸을 끌어안은 그녀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자 그가 당황하여 그녀의 어깨를 조심히 토닥였다.

하나 차마 끌어안을 수가 없었다.

우는 그녀를 달래 준단 핑계로 끌어안지 못할 것은 없었으나.

‘너, 무…… 가까워.’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그녀의 향이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평소보다 확연히 진한, 코가 아릴 정도로 달콤한 체취였다.

‘아니. 이건 혹시 영력의 향인가?’

익숙한 영력이 그와 공명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그 모든 상황이 종합되어 그는 지금 어찌해야 할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울고 있는데.

뭐가 걱정되냐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뭐든 내가 해결해 주겠다고. 다 내게 말해도 된다고.

‘그리 말하며 등을 토닥여 줘야 하는데.’

불안했을 그녀를 안심시켜 줘야 하는 걸 알면서도.

꽃향기와 닮은 부드러운 체취는 어찌 이리 향기만으로도 그를 자극하는 건지.

당장이라도 드러난 흰 목에 얼굴을 묻고 한 번에 삼켜 버리고 싶어 마음이 진정 되지 않을 정도였다.

꽉 끌어안아 제 안으로 집어넣고 다시는 놓아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손이 떨렸다.

그때였다.

말캉.

‘!!’

두꺼운 의복이 사라진 둘의 사이에 이제껏 없었던 예민한 촉감이 들어섰다.

‘가, 가슴이.’

겉옷을 벗은 상태의 그나, 겉옷만 간신히 걸친 그녀나 모두 평소보다 옷이 얇았던 탓이었다.

탈피를 마치고 풍만해진 가슴이 제게 꾹 눌리는 선명한 감각이 지나치게 자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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