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254)

“……!”

“설마 지혜롭다 칭송받는 신영께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계신 것은 아니겠지요. 승자와 패자의 위치를 혼동치 마시란 말입니다.”

칼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신영을 굽어보았다.

그에 신영의 몸이 통제를 잃고 흔들렸다.

감히.

이 호족 자식이 감히 주가의 영역에서 환계 전체가 제 세상인 양 굴고 있었다.

신영이라는 이름 따위 제 발밑에 뒹구는 개똥만큼도 못 된다고 그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너를.’

치솟아 오르는 분노가 도무지 제어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너를, 반드시 죽일 것이다.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서 혼백조차 남지 않게 해 줄 테다.’

하지만 저 놈을 찢어 죽이고 싶어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 지금 자신의 현실이었다.

신수가 불로불사라는 사실 외에도 육가연합과 주가의 균형이 현재 그러했다.

그 사실이 너무나 원통하고 분하여 신영의 속이 절절 끓었다.

이 버러지 같은 것을 당장 죽일 방도가 없다니.

하나 그렇다고 해서 저 발칙한 놈을 고이 보내 줄 수 있을까.

무슨 짓을 해서라도. 필요하다면 쉰 명이 넘는 백가 무사들을 모두 강제로 억류해서라도.

‘네놈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꼴을 꼭 보고 말 테다. 그러면 그분께서도…….’

신영이 제 주인을 떠올렸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주인이었으나 제 머리 위에서 신수가 날뛴다면 나타나지 않을 방도가 없을 것이다.

이성적 판단보다 당장의 분노에 몰두한 그가 백기하의 얼굴을 노려보며 삼보관을 부르려 할 때였다.

이보관이 급한 걸음으로 들어섰다.

“저 신영…….”

“이런 건방진 것! 지금 내가 알현 중인 것이 보이지 않느냐! 전갈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지! 꺼져라!”

이보관의 부름에서 또 한 번의 변수를 예감한 노인이, 백기하의 앞에서 주가의 문제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호통을 쳤다.

“들어 보시는 것이 좋으실 텐데요.”

그 순간 백기하의 낮고 침착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중요한 소식을 가져온 보장관을 그리 냉대하시면 되겠습니까. 들어 보시지요. 그럼 더 이상 저와 이런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아지실 테니.”

노인이 대답하지 않자 서늘하고 날카로운 시선이 대답을 종용했다.

“들으십시오.”

“…….”

명령과 다르지 않은 말에 노인의 턱 근육이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지며 진동했다.

한평생을 환계의 신영으로 살아온 그였다. 용의 후손인 그가 땅 위를 기어 다니는 이깟 짐승에게 이런 모멸을 당하고도 즉시 처벌하지 못한다니.

움켜쥔 주먹 사이로 피가 흘렀다. 힘껏 이를 문 탓에 입안이 다 터졌으나 노인은 그것을 알아챌 정신도 없었다.

침묵 속에 담긴, 끊어질 듯 팽팽한 긴장감을 이보관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시간이 없었다.

침묵을 허락이라 여긴 이보관이 빠르게 다가와 노인의 귓가에 대고 조용히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영지선에 육가 연합의 군사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모두 무장한 상태고 전원 영력으로 초소를 조준하고 있다 합니다.”

“……!!”

“당장이라도 교전이 시작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니 황급히 무사들을 영지선으로 보내 달라는 지원 요청이 도착하였는데 어떻게 처리할까요.”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노인의 안색이 삽시간에 흙빛이 되었다.

* * *

결국 원하는 대로 하라 말하며 보내 주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백가주는 육가 연합의 중심이었으나 다시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면 백가주 하나만 제압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으니.

백가로 가는 행렬이 준비되는 데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그 빠른 속도에 안 그래도 속이 뒤집혔는데, 주명윤이 떠난다는 소식에 부리나케 달려온 환족 영지민들의 모습이 노인의 속을 한 번 더 뒤집어 놓았다.

“어디 초상이라도 났다더냐!”

영지민들의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신영의 저택 담장을 넘어오자, 신영이 결국 팔걸이를 내리치며 삼보관에게 호통을 쳤다.

“너는 지금 곧 무사들을 끌고 가서 우는 놈들의 눈을 죄 뽑아 버려라! 피눈물도 그렇게 열심히 흘릴 수 있는지 알아봐!”

농 같지 않은 명령에 삼보관이 안절부절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행렬은 모두 검사하였느냐!”

“네.”

“짐도 모두 수색하였어?”

“네. 가져가는 것도 거의 없었습니다.”

“한데 그 인원과 짐 중에 그 딸년이 없었다고?!”

“예. 무엇보다 확실합니다. 살아 있는 것이라면 데리고 다니는 동물까지 확인하였습니다.”

“동물이라니. 무슨 동물!”

“백가주가 백호 한 마리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백호?”

백가주가 처음 들어올 때 그런 짐승을 데려왔었나?

“작은 새끼였습니다. 백가주가 직접 길러 그가 아니면 먹이조차 먹지 않는다고 하여 데리고 다닌답니다.”

“백호가 확실한 것이냐? 백가주가 신수로 변용하듯이 그런 상서로운 짐승은 아니었어?”

그에 삼보관이 코를 도롱도롱 골며 자고 있던 새끼 백호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 태평한 모습엔 상서로운 기운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네. 정말로 그냥 짐승이었습니다.”

‘그냥 짐승이라……. 그럼 그년을 대체 어디로 숨긴 거지.’

신영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삼보관이 조심스레 덧붙였다.

“영지선뿐 아니라 인간계를 포함해 모든 영역에서 검문을 철저히 하도록 지시해 두었습니다. 곧 명윤의 여식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염려 마십시오.”

“반드시 찾아야 한다. 필요하다면 주가 영역을 다 뒤져서라도!”

“네!”

* * *

그 시간, 세 자매는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아기 백호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어디 아픈 건 아니신 것 같은데.”

“응. 자세나 표정은 아주 편안해 보이시지?”

“한데 왜 이렇게 깨어나지 못하시는 걸까?”

“혹시 백호로 변하시는 과정에서 무슨 문제라도 생기신 건 아니겠지? 뭔가 필요한 게 빠져서 깨어나지 못하시는 거라거나.”

세 자매의 걱정과는 다르게 백호는 가끔 몸을 일자로 쭉 펴며 뒤집었다.

입을 냠냠거리는 모습, 작은 분홍 발바닥을 번갈아 말아 쥐며 쌕쌕 숨을 내쉬는 모습이 이보다 더 편안할 순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저 잠을 자는 거라고 여기기엔 꽤 긴 시간 눈을 뜨지 못하니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말을 타고 가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미장, 아니. 원로 어른. 무슨 방도가 있을 것입니다. 별일 아닐 것이고요. 제가 꼭 방도를 찾아 그녀를 원래 모습으로 돌려놓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정말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지요. 그렇지 않아도 백가의 영력이 많아진 그녀의 몸에 제 송곳니까지 흡수되며 저런 반응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영력이 안정세를 찾으면 돌아올 것입니다.”

“백가주의 탓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백가주께선 최선을 다하셨음을 이미 알고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

고서에서조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뜻밖의 상황에 주명윤의 마음 역시 염려스럽고 걱정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찌 백기하에게 조금이라도 화를 낼 수 있겠는가.

그는 제 딸을 위해 불사를 포기하고 여분의 목숨마저도 내어 주었거늘.

그때 백만용의 목소리가 그 사이를 끼어들었다.

“명윤 원로님. 만약 아가씨께서 이대로 영영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하신다고 하더라도 염려 마십시오. 백호의 모습으로 평생 사시게 되어도 조금의 불편함도 없이 매일 평안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저 백만용이 모두 책임질 것입니다. 아니. 비단 저뿐이겠습니다. 저희 백가 전체가 아가씨를 성심성의껏 모실 것입니다.”

‘아니 이 새끼가 또.’

경솔한 백만용의 말에 분노한 주명윤의 시선이 날아갔다.

이 새끼는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너무 입을 아무렇게나 놀리니 지금껏 그를 화나게 하던 백기하가 오히려 선녀처럼 보일 지경이다.

주명윤이 백가주에게 너그러워진 데에는 백기하의 희생 외에 백만용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백만용을 험악한 눈짓으로 뒤로 떨어뜨린 백기하가 덧붙였다.

“그리고 혹시 원로 어른께서 괜찮으시다면…….”

백기하의 시선이 흘끗 주명윤을 살폈다.

“그녀를 저리 둘 것이 아니라 제가 좀 안고 있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니까 낮뿐 아니라 밤에도…….”

주명윤의 시선이 제게로 움직이자 시선의 의미를 지레짐작한 백기하가 필사적으로 평정심을 가장하며 말을 이었다.

이런 건 당황하며 이야기하면 더 이상해지기 마련이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해야 했다.

“다른 뜻이 아니라, 전의 탈피 때에도 일주일이나 깨어나지 못했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때 제가 영력이 안정될 수 있도록 계속 그녀의 근처에서 몸에 힘을 불어넣어 주었으니까요. 이번에도 그러면 어떨까 하여…….”

“…….”

“혹 송곳니가 문제가 된 것이라면 백가의 영력이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하여 어쩔 수 없이 말씀드리게 된 것이지 제가 다른 뜻을 품은 것이 결코 아니고…….”

하나 이상한 의도로 여겨져 의심당할지 모른다는 백기하의 추측과는 달리, 주명윤은 백기하에게 또다시 빚을 지는 기분이었다.

그 역시 전장에서 경험해 보았지만, 온밤 내내 누군가에게 영력을 불어넣어 주는 일은 생각보다 더 쉽지 않았다.

막 재회했을 때야 ‘백가주도 뭔가 찔리는 것이 있으니 저런 호의를 베풀겠지.’ 하며 의도를 곡해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런 오해조차 할 수 없는 실정이니.’

주명윤이 무겁게 덧붙였다.

“그럼 염치없지만…… 또다시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당연히 스스로 했을 것이다.

허나 백가의 영력이 문제인 듯하니 이번에는 어쨌든 그의 손에 맡겨야 했다.

“그럼요. 그런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주명윤이 그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였다.

당황한 백기하가 얼른 그의 어깨를 잡았다.

“원로 어……미장 어른. 이러지 마십시오. 마땅히 제가 할 일입니다.”

“…….”

……은근슬쩍 호칭을 다시 바꾸는 것을 알아도 별수가 없었다.

딸아이의 목숨을 두 번이나 살린 것도 백기하고, 지금 또 여식의 상태를 호전시키려 노력하는 것도 그였으니.

‘무엇보다 세화 역시 이 사내에게 호감이 있는 듯했지.’

“소가주님 말고 백가주님과 혼인하려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누가 강제로 시킨다 해도 그런 말을 할 여식이 아니었다.

서로 좋은 감정이 있다면, 오래도록 그녀를 혼자 둔 제가 이제와 무어라 참견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석양이 끄트머리만 남기고 높은 산들 너머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빠르게 주가의 영역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수레가 많아 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어두워진 하늘을 확인하며 주명윤은 야영을 준비시켰다.

무사들이 서둘러 천막을 치고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백기하는 세 자매에게서 아기 백호를 받아들었다.

준비된 천막 안으로 들어가,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그녀를 푹신한 자리 위에 눕혔다.

그런 후 그 역시 모습을 변용했다.

커다란 천막을 비좁게 만들며 나타난 거대한 백호가 제 발등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아기 백호를 품에 넣었다.

몸을 둥글게 말고 영력을 운용하자 마치 강이 흐르듯 작은 백호에게 영력이 이어져 갔다.

그것을 확인한 후 백호도 제 새파란 눈을 감아 감췄다.

그녀가 아무런 문제도 없이 눈을 뜨길 바라며, 제힘을 조금도 아끼지 않고 퍼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