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254)

그때 누군가 계단을 밟고 내려오며, 강력한 영력을 담은 비명 소리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 나긋한 목소리를 냈다.

“너무 신영을 재촉하지 마세요, 낭군.”

새빨간 의복에 목선을 다 드러낸 요사스러운 모습의 여인이었다.

땅에 끌릴 정도로 긴 여인의 흑단 같은 머리가 한발 늦게 흰 발걸음을 따라왔다.

“……오시었습니까.”

그는 신영의 첩으로 알려진 여덟 명의 부인 중 오부인이었다.

“신영의 위치에 있으며 할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예기치 못한 상황이 연이어 벌어졌으니 신영도 경황이 없었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냐.

“낭군께서 찾으시는 그 아가씨에 대한 정보를 누군가 가져왔다 하길래 신영을 부르러 내려와 보았습니다.”

크르르-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뭔가가 위협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다시금 쇠사슬이 부딪치는 것 같은 날카로운 금속의 소리가 이어졌다.

“여기서 더 질책하신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가서 일이라도 해야 그 아가씨를 한시라도 빨리 손에 넣지요.”

샛노란 색의 거대한 눈은 여전히 신영을 노려보며 번뜩이고 있었다.

하지만 여인이 한 번 더 웃으며 다가가자 이내 천천히 눈꺼풀을 닫았다.

“어서 가 보세요, 신영. 그 아가씨를 찾으려면 시간이 없을 테니까요.”

신영이 고맙다는 의미로 여인에게 눈짓했다.

“고마울 필요는 없고, 대신 내게도 새 몸을 좀 준비해 줘요.”

여인이 제 눈가를 만지며 이 몸도 이제 주름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불평했다.

“전에 보니 인사 오는 계집아이들 중 주수연이라는 아이가 있던데. 아마 자윤 원로의 여식이라고 했던가요?”

반반한 얼굴과 매끄러운 피부. 나긋한 몸매. 아직 탈피조차 마치지 못한 젊고 아름다운 몸.

그것을 상상하는 여인의 눈빛 속에 희열감이 퍼져 갔다.

“이제 슬슬 탈피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은데, 한 번 불러들여 봐요.”

여인이 붉은 입술을 휘며 덧붙였다.

“내가 가질 수 있도록.”

* * *

짧은 시간이었지만 노인은 밀실에서 십 년은 보낸 듯한 지친 모습으로 빠져나왔다.

안절부절못하며 입구를 왔다 갔다 하던 삼보관이 노인을 보자마자 급히 달려왔다.

“신영, 큰일입니다.”

‘뭐지? 오부인이 날 빼내 주려고 그냥 한 말인 줄 알았더니 정말 무슨 소식이 도착한 거였나?’

“뭔데 이리 호들갑이냐.”

“신영을 뵙겠다며 백가주를 위시한 백가 무사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말에 심사가 잔뜩 뒤틀린 신영의 눈썹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깟 놈들이 찾아왔으면 찾아온 것이지. 그게 뭐라고 이리 다급하게 달려와 큰일이라 하는 것인지.

“뭐냐. 무장이라도 했어? 전쟁을 다시 시작하기라도 하겠다더냐!”

“그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면 일 없다! 지금은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고 전해!”

분노한 노인의 모습에 물러날 법도 하건만 삼보관은 여전히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백가주가 지금 당장 돌아가야겠다고……. 배상품들이 준비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듯하니 명윤 원로를 배상품의 보증인이자 실종 사건의 책임자로 삼아 그의 재산 일체를 몰수해 가겠다고 합니다.”

“뭐야?!! 그게 무슨 개소리라더냐!”

‘아니, 설마 이 미친놈들이 작당하기라도 한 건가!’

예전 같았다면 백가주가 그러겠다고 하면 기꺼이 주명윤을 내주었을 것이다.

그 둘은 십 년간 서로의 가족과 친구들을 살해했고 다시 태어난다 해도 결코 회복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 여겼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때와 전혀 달라져 있었다.

주명윤의 딸이 백기하와 혼약한다고 말하지 않나. 옆에서 지켜본 그들의 모습 역시 생각했던 것만큼 험악하거나 나쁘지 않은 듯했다.

게다가 지금은 제 모든 것을 동원하여 주명윤의 여식을 찾아야 하는 때가 아니던가.

딸을 데려가려 한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그 단단한 무장도 이젠 알아챘을 텐데.

저 모든 말들이 여식을 빼돌리려 하는 것인지 어찌 알겠는가.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주명윤의 딸을 찾지 못한 상황에서 인질이 될 수 있는 그를 보낼 수 있을 턱이 없다.

이를 사리물어 험악한 속내를 내리누른 노인이 저택 내부를 가로질러 알현실로 들어갔다.

알현실 내부에는 이미 주명윤과 백기하 둘이 자리하고 있었다.

둘의 침착하고 평온한 표정이 노인의 분노를 부채질했으나 저 어린 신수 앞에서 체통을 잃을 수는 없었기에 그는 분노를 애써 감췄다.

침묵하고 있는 주명윤을 곁눈으로 확인하며 곁을 지나친 노인이 상좌에 앉았다.

“갑자기 돌아가겠다니. 이렇게 빨리.”

그것도 배상품을 제 마음대로 가져가겠다고 통보를 하면서?

본래라면 명윤의 여식을 주고 곧장 돌려보내려 했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너무 많이 달라졌다.

육가가 원했던 제 아들 경현도. 저 노장도. 그리고 그의 여식도.

이제는 그 누구도 백가로 보낼 수가 없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그렇지. 너무 갑작스럽고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긴데.”

신영의 낮은 목소리에 백기하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배상 책임자인 원로께서 일을 빨리 처리해야겠다는 제 결정에 동의하시고 스스로 모든 재산을 내놓아 처리를 도와주시는 것으로 의논이 끝났는데, 그게 왜 말이 되지 않습니까. 저야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백가는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나 본데, 주가에서는 원로 하나와 논의하여 일을 마음대로 진행할 수는 없네.”

“참 이상하군요. 지금껏 진행된 모든 배상 문제는 이분께서 홀로 진행하셨던 듯한데.”

입꼬리를 끌어 올린 그가 신영의 말에 반박했다.

“아니면 부족한 재물은 모두 신영께서 내주시기라도 하실 겁니까? 뭐 그것도 괜찮겠군요. 아직 신영께선 배상의 어떤 부분도 책임지지 않고 원로들에게만 맡겨 놓지 않으셨습니까. 이젠 직접 하실 때도 되셨습니다.”

“뭐, 라?”

“그리해 주실 수만 있다면 원로 한 분의 재산이 문제겠습니까? 당장 주시는 것들을 가지고 떠나겠습니다. 아 참. 저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건 불가능하겠군요. 신영의 체면이 있지, 한번 없다고 말씀하신 것들은 끝까지 없어야지, 중간에 나오면 위신이 상하실 테니까요.”

“백가주!”

모욕적인 백기하의 말에 신영이노성을 질렀다.

“어찌 화를 내십니까. 제 말이 틀리지 않았을 텐데요.”

‘이 새끼가.’

노인은 팔걸이를 틀어쥔 채 배 속 깊이 치밀어 오르는 제 분노를 필사적으로 내리눌렀다.

저것은 모두 저를 분노케 하려는 수작이었다.

그걸 알면서 그가 원하는 대로, 순순히 넘어갈 순 없었다.

‘호족 따위. 주가가 절대의 영화를 누리고 있을 땐 영지의 문턱도 넘지 못하던 벌레 같은 것들이!’

대체 언제까지 이런 굴욕을 참아 내야 하는가.

하늘께서는 대체 어쩌다 저따위 가문에 신수를 내리시어 제게 이런 모멸을 주시는가.

십 년의 시간은 자신의 긴 인생에서 아주 짧은 찰나로 치부할 수 있었으나 이 굴욕적인 나날들만은 찰나가 아닌 억겁처럼 느껴졌다.

한시라도 빨리 저 눈엣가시 같은 호랑이 새끼의 목을 잡아 비틀고 잔인하게 사지를 잡아 찢고 싶은 욕망이 넘치도록 끓어올랐다.

“…….”

하나 그러려면 지금은 인내해야 했다.

그분께서 맡긴 일들을 제대로 처리해야 뭔가를 더 시작할 수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일단 그 년을 찾아야 해.’

“백가주. 사정 모르고 함부로 지껄이지 말라. 게다가 그건 명윤의 판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주가의 방식은 그렇지 않다.”

노인의 시선이 이번엔 주명윤에게 옮겨 갔다.

“명윤. 오랜 세월 최전방을 지켜 낸 너를 따르는 이가 얼마인데, 그런 너를 재산까지 모두 몰수해 백가에 넘겼다는 사실이 잘못 퍼져 나가면, 그로 인해 땅으로 처박힐 주가의 위신은 생각지 않는 것이냐?!”

가문에 대한 책임감을 가장 중시하는 주명윤이었기에 노인은 그의 그런 부분을 자극하려 했다.

“백가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네게 그리도 중요했어?! 어찌 이런 일을 나와 상의도 없이 너 홀로 결정해! 가문을 먼저 생각했어야지! 백가주가 지금 당장 배상을 요구했다 하더라도 가문의 상황을 한 번 더 떠올렸어야지!”

“…….”

하지만 신영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 말을 들은 주명윤은 흔들림 없는 태도로 지그시 눈을 감을 뿐이었다.

‘가문의 위신이 아니라 신영 당신의 위신이겠지요.’

백가행을 막아서려는 이유조차 신영 자신만을 염려하고 있음이 명확해 주명윤은 이제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장님이었다. 자신은.

담담한 목소리로 그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이러시는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신영. 어차피 배상 문제는 제가 알아서 마무리 지어야 하지 않았습니까.”

“뭐야?”

“누가 저를 돕는단 말입니까. 더 이상은 여력이 남지 않아 그 어떤 일도 책임 지지 못하겠다고, 주가의 원로들이 일제히 한목소리를 내며 발을 뺀 것을 잊으셨습니까.”

주명윤이 노인의 고목 같은 얼굴을 직시하며 시선으로 질책했다.

‘그래. 신영 당신조차도 그러지 않았나.’

그는 제 시선이 지금 어떤지 알지 못했으나 무장의 흔들림 없는 시선을 받아 낸 신영은 그렇지 않았다.

“……!”

그 시선에 담긴 후회와 희미한 경멸을 읽어 낸 신영이 진심으로 충격을 받으며 몸을 떨었다.

‘네놈이.’

노인의 입술이 참아지지 않는 노기로 씰룩였다.

‘네놈이 감히…….’

사냥개 주제에. 그저 명령이나 따르면 다인 짐승 주제에 감히 주제도 모르고 주인을 질책해?

그것도 저 새파랗게 어린 백기하가 있는 자리에서?

팔걸이를 움켜쥔 그의 손은 백기하와 마주했을 때보다 더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저 괘씸한 노원로의 두 눈을 뽑아 버리고 싶어, 참는 것이 힘겨울 정도였다.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진정시키며 신영이 달래듯 말을 꺼냈다.

“그래. 그간 내가 그 일에 조금 소홀했던 것은 인정한다. 허나 명윤, 너만이 이 일에 그토록 많은 짐을 지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으냐. 내 당장이라도 원로들을 소집하여 배상금을-.”

“송구합니다만 신영.”

노인의 말을 잘라 내며 백기하가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일을 어찌 처리하고 싶으신지는 알겠으나 저는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백가주, 그래도 잠시 기다리게. 내가 내 원로와 말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저야말로 계속하여 신영께서 뭔가를 잘못 알고 계시는 듯해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는 백기하의 차분한 시선에 날이 섰다.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착각은 이제 그만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곳에서 무얼 가져갈지, 언제 가져갈지.”

예리한 목소리가 신영의 가슴을 꿰뚫듯 날아왔다.

“그것은, 신영이 아니라 제가 정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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