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254)

그 거센 바람 사이로 영채가 던져 놓았던 환석들이 떠올랐다. 그러자.

콰앙! 쾅!

세화의 몸을 감싼 영력이 거세게 들끓으며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눈을 뜰 수 없게 만드는 거센 바람을 맞으며 지켜보는 이들의 표정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이, 이건 혹시……!”

완벽한 신수가 되기 위한 과정인 건가.

이전의 백룡의 모습은 신수 같으면서도 신수라 보기에는 애매한 점이 있었다.

일단 두 개의 뿔이 없었고 아직 성체가 되지 못한 것처럼 몸집이 작았다.

신수는 불로불사로 회복이 매우 빠르니 세화가 이렇게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일도 없어야 했다.

‘혹시 조금 부족했던 영력이 채워지며 완벽한 신수로 다시 태어나는 건가.’

모두의 얼굴에 희열이 감돌았다.

그녀가 신수가 된다는 사실보다도, 신수가 되면 어떤 상처도 눈 깜짝할 사이에 나아 버릴 테니 그것을 기대한 것이다.

영력의 회오리는 아주 오랜 시간 이어졌다.

점차 작아지는 그 꽃봉오리 같은 영력을 모두 큰 기대를 가지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윽고 모든 것이 잦아들던 순간이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저택의 바깥, 어두운 새벽하늘이 잠시 갈라졌다.

그 사이로 드러난 것은 푸르른 낮의 하늘이었다. 그와 동시에 별들이 빛났다.

벌어진 틈으로 비치는 햇빛은 마치 땅으로 흩뿌려지는 비단 같았고, 온 하늘이 수만 개의 별로 가득 차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찰나였다.

낮의 하늘은 마치 아직은 시기가 아니라는 것처럼 다시 눈을 감으며 사라졌다.

어두운 밤하늘이 그 자리를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하게 지켰다.

늦은 시간이었기에 그 광경을 목격한 이들이 거의 없었고, 별당 안의 이들은 막바지로 접어드는 듯한 각성 장면을 여전히 지켜보는 중이었다.

한참 만에 영력의 꽃봉오리가 열리고 그 사이에서 뭔가 하얀 것이 엿보였다.

신수가 되신 아가씨를 기대하며 세 자매가 긴장된 손을 맞잡을 때였다.

“음?”

뭔가 이상한 것을 본 것 같은 주명윤이 먼저 눈살을 찌푸렸다.

“어?”

“이게…….”

지켜보던 이들 모두 눈만 껌뻑거리다가 백기하를 돌아보았다.

“……이게 대체.”

백기하 역시 상상해 본 적 없는 결과에 잔뜩 당황하며 영력이 사그라든 자리를 한참이나 가만히 바라보았다.

침대 위에는 모두가 기대한 대로 모습이 변용된 세화가 누워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식이 없음에도 조금 전보다 확연히 편안해진 얼굴로 숨을 내쉬는 것은, 모두가 기대하던 백룡이 아닌.

“휴…… 큐.”

작은 아기 백호였다.

* * *

세 자매는 잠이 든 듯 편안해진 백호의 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불길이 닿으며 뭉그러졌던 상처들도 모두 사라졌고 다른 이상도 없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기뻐 그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서로를 얼싸안았다.

눈을 뜨신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은 조금 염려스러웠으나 때때로 “냠, 냐.” 하면서 뭐라 웅얼거리는 아기 백호의 모습은 전혀 아프거나 의식을 잃은 모양 같지가 않았다.

어째서 이런 모습이 되신 것인지 의문스럽긴 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가씨가 살아나셨다는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 그들의 뒤에서 백기하는 잔뜩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미, 미장 어른.”

그는 이틀 밤을 조금도 쉬지 못하고 결사적으로 영력을 사용했다.

혹여 제가 늦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세화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될까 봐. 그리하여 비어 버린 가슴을 가지고 아주 오랜 시간 홀로 살아가게 될까 봐.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두려움을 안고 달리던 순간의 긴박감을 그는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건 그러니까 그게. 그러니까…….”

세화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진 지금의 긴장감 역시 그때의 긴장감 못지않았다.

무장의 시선이 저를 향해 지그시 날아오자 뭔가를 설명해야 한다는 거대한 압박감이 그를 짓눌렀다.

하지만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그 역시 이 상황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는데.

그사이 눈치 없는 백만용만이 지극히 감격하고 감동한 얼굴로 탄성을 거듭했다.

“어찌 이런 일이. 이 모습을 보십시오. 눈보다도 하얀 백모 위를 유려한 흐름으로 가로지르는, 까마귀의 깃털보다 더 검고 윤기 나는 이 흑모를요. 완벽한 색의 대비도 그렇거니와 비율이 섬세한 이목구비 속 분홍 코와 이 분홍 발바닥이라니! 세상에. 저희 가주의 어릴 적 모습과 아주 똑같으십니다. 어렸던 제가 가주의 그 모습을 보고 놀라고 감탄하여 평생을 백가에 뼈를 묻을 것이라 다짐하고 또 다짐하지 않았겠습니까. 게다가 신수의 명맥이 끊긴 지가 언제인데 백가에서만 또 하나의 신수가 태어나다니요. 이것은 가장 중한 일에 백가를 쓰시겠다는 하늘의 깊은 뜻이 아니겠습니까. 아가씨는 결국 주가를 버리고 백가가 되실 운명이셨던 겁니다!”

“!”

‘……아니 이 새끼가?!’

이런 순간에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지. 저택을 지켜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왜 이리 송두리째 뽑아 버리며 화를 돋운단 말인가.

주명윤의 도끼눈을 발견하고 기겁한 백기하가 문밖으로 신호를 보냈으나 백만용은 그사이에도 입을 놀렸다.

“어쩌면 이리도 백가의 풍모를 한치도 덜어냄 없이 모두 담으셨는지. 이 백 모는 정말 난생처음 겪는 상서로운 일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두 번째 신수로서 이제 백가의 위상을 온 환계에 드높이실 운명이신 아가씨께…… 읍읍!”

이놈을 데려갈 누군가를 기다릴 새가 없어 백기하는 직접 백만용의 입을 막고 문밖으로 끌어냈다.

그 모습을 주명윤이 냉랭한 시선으로 쫓다가 침상으로 다가갔다.

다리를 쭉 뻗은 채 눈을 감고 있는 작은 백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몸을 웅크리지 않으시는 걸 보면 편안하신가 봐요.”

“일단 깨어나시는 걸 보아야겠지만요.”

“그래.”

고개를 끄덕인 주명윤이 세 자매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백가주 덕분에 급한 불은 끈 것 같으니 너희도 더 고집부리지 말고 지 행수가 가져오는 약을 마시거라. 몸이 멀쩡해야 긴 행로를 견딜 수 있지.”

“행로요?”

“그래. 약을 먹고 회복하는 대로 세화의 짐을 꾸리거라. 세화는 이곳에서 더 할 일이 있었던 것 같지만 이대로는 위험할지 모르니.”

눈을 감은 백호의 머리를 쓰다듬는 노장의 눈빛이 번뜩였다.

“백가로 갈 것이다.”

“!”

방 안으로 들어서던 백기하가 그 말을 듣고 멈춰 섰다.

“정말입니까?”

가만히 다가와 묻는 목소리에 주명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용아!”

가주의 부름에,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조금 전보다 살짝 의기소침해진 백만용이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화색이 된 백기하가 재상을 향해 새파란 눈을 빛내며 명령했다.

“준비했던 신호를 보내라. 이제 여길 떠나야겠다!”

* * *

“이런 멍청한 년!”

퍽!

“……!”

신영이 서월의 뭉그러진 얼굴을 거칠게 내리쳤다.

끔찍한 고통에 이를 악문 서월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일을 이따위로 만들어 놓고도 오자마자 약을 처먹을 마음은 들더냐?! 한심한 것!”

망가진 어깨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내리깐 서월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그 폭언을 버티고 있었다.

영력에 녹아내린 반쪽 얼굴과 백가 재상의 화살이 꽂히며 근육이 터져 나갔던 팔은 돌아오자마자 약을 들이부었는데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이 모습 그대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고통보다 서월을 강하게 지배했다.

“그나마 적룡의 영단을 다시 가져왔으니 산 줄 알아라. 아니었으면 여기서 널 태워 죽였을 것이다.”

“송구합니다. 하지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이번에는 분명…….”

“쓸모없는 것. 꺼져라! 가서 경현이의 몸이나 돌봐!”

“네? 신, 신영! 신영!”

몸을 돌리는 신영을 그녀가 결사적으로 붙잡았다.

“그래도 영단을 가져왔는데. 몸, 몸이라도 바꿔 주십시오. 이대로라면 서월은…….”

“이런 미친년을 봤나. 일을 이따위로 해 놓고 네깟 것을 위해 그분께 빌란 말이냐?! 일 없다! 꺼져라!”

“신, 신영! 아무 몸이나 괜찮습니다. 여자이기만 하면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꺼지라고 하지 않았느냐!”

“신영! 신영! 영단을 힘들게 가져왔습니다. 제발! 신영!”

보장관들이 서월의 망가진 몸을 질질 끌어냈다.

멀어지는 비명을 외면하며, 상좌로 돌아가 앉은 노인이 초조한 기색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주명윤이 모두 알았을 테지. 그럼 이제 어떡한다.’

그 늙은 무장이 제가 한 일을 알건 모르건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버리려던 패였으니.

하지만 그놈이 대비하기 시작하면 세화 그년을 데려오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어떻게 해야 할까. 차라리 신영의 명으로 반역의 죄를 뒤집어씌워 군사를 보낼까?’

그때 자리를 비웠던 삼보관이 조용히 다가왔다.

떨리는 목소리로 아뢰었다.

“신영. ……그분께서 부르십니다.”

“!”

노인은 곧장 움직이지 못하고 잠시 굳어졌다.

“시녀는? 시녀는 넣어 드렸느냐.”

“예. 신영을 모셔오란 명을 받자마자 추가로 넣어 드렸습니다. 오늘, 벌써 여덟이나 드셨습니다.”

노인의 고목 같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거센 두려움에 그가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하나 가야만 했다.

부스스 일어난 그가 천천히 어딘가로 걸었다.

여러 겹의 밀실의 입구를 지난 노인은 빛도 없는 긴 돌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차르르-

아래로 향할수록 역한 비린내와 쇠사슬이 부딪치는 것과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의 목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완벽하게 밀폐된 석실인데도 덥고 습한 바람이 어디선가 계속 불었다.

계단 아래로 내려서자 노인의 눈앞에 거대한 공동(空洞)이 나타났다.

잔뜩 갈라지고 찢어진 넝마 같은 목소리가 귀가 아닌 머리를 진동시키며 들려왔다.

-그년은?

신영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년은?

“죄송합니다.”

-!!

귀를 찢어 놓을 듯한 강한 파열음에 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평범한 이였다면 당장 칠공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을 법한 강한 영력이었다.

노인의 울대가 다시 한번 마른침을 삼키며 움직였다.

-반드시 찾아야 한다지 않았더냐! 그년이 신수가 되기 전에!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년은 이제 막 탈피를 마친 데다가 적룡의 영단을 회수하였으니 신수는 되지 못할-.”

-이런 멍청한 놈!

다시금 엄청난 열풍이 불어닥쳤다.

“!!”

열기를 견디지 못한 노인이 결국 주저앉았다.

-어젯밤에 퍼져 나간 그 존재감을 느끼지 못했느냐! 각성의 시기가 도래하고 있는 것을 느끼지 못했느냔 말이다! 그것을 막아야 해. 필요하다면 그년을 교룡으로 만들어서라도!

“……각성이라니.”

-그래도 아직 변화가 작았던 것을 보면 제대로 된 신수는 아닐 것이다. 한시가 급하다. 한시라도 빨리 그년을 찾아!

비틀리고 갈라진 목소리가 이를 갈며 명령했다.

-그년을 찾고 나면 아무것도 돌아보지 말고 잡아라.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해!

노인의 앞에서 꿈틀대는 뭔가가 샛노란 눈에서 불같은 노기를 드러내며 입을 벌렸다.

캬아아악!

귀를 찢을 듯한 파공성이 밀실을 뒤흔들자 노인이 코와 귀에서 피를 흘리며 몸을 비틀거렸다.

-아니라면 다음은 네 차례가 될 것이다! 너부터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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