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낯선 음성에 소스라치게 놀란 영채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았다.
이 방은 주가 무사들의 숙소 중 하나였다.
혹여 누군가 다시 공격해 올 경우를 고려해 조심스레 방을 옮기고는 심복 중의 심복인 하인들만 조용히 드나들게 했다.
빛도 새어 나가지 않게 덧창을 대고 문을 꼭꼭 걸어 잠가 아가씨를 숨겨 두었건만.
그런 방 안으로, 들려선 안 되는 목소리를 내며 낯선 누군가가 발을 디디고 있었다.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띤 불청객이 영채의 곁으로 성큼 다가섰다.
“이렇게 숨겨 두면 못 찾을 줄 알았어? 이 서월을 어떻게 보고.”
서월?
“한데 저 아가씬 왜 저러고 계실까. 일단 비켜 봐. 서월도 시간이 없으니 지금 즉시 비키면 목숨만은 살려 줄게.”
정말로 살려 줄 생각은 없지만.
제 목숨 지키려 물러서는 꼴을 구경하는 것도 퍽 재밌겠다 싶었던 서월이 품 안에서 채찍을 꺼내 들었다.
영채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이 방엔 세화와 자신밖에 없었다. 그런 자신을 비키라고 하는 거라면 목적은.
금세 상황을 파악한 영채가 숙소 벽에 걸려 있던 검을 황급히 잡아챘다.
스릉.
검집을 집어 던지고 날을 앞으로 세웠다. 서월의 눈꼬리가 비죽 솟았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아가씨께 접근하려면 날 먼저 죽여야 할 거다.”
“개미가 비장해 봤자 위협이 되니?”
코웃음을 치면서도 서월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방을 찾느라 제법 시간을 허비했다.
가뜩이나 소득 없이 불을 사용한 일로 신영께서 잔뜩 노하셨는데, 잘못하다가는 자신도.
그 사이 영채가 검 손잡이를 더욱 단단히 고쳐 잡았다.
절대로 비키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보이는 얼굴에 서월의 입매가 험악하게 휘었다.
“명을 재촉하는구나. 자매의 곁으로 가고 싶다 이거지?!”
촤악!
순간, 보이지 않는 속도로 날아온 채찍이 영채의 얼굴에 새빨간 줄을 그어 놓았다.
“!”
미처 고통스러운 볼을 부여잡을 새도 없었다.
퍼억!
영력이 실린 발끝이 이번엔 영채의 광대뼈를 강하게 걷어찼다. 동시에 검은 채찍이 가는 목을 꽁꽁 휘감았다.
“……!!”
눈 깜짝할 사이에 호흡을 빼앗긴 폐가 옴짝달싹 못 하고 숨을 요구했다.
영채가 검을 휘두르며 발버둥 쳤지만, 실력의 차가 너무도 분명했다.
“그러게, 비키랄 때 비켰으면 좋았잖아.”
입꼬리를 끌어 올린 서월이 손톱으로 영채의 얼굴을 긁어내렸다.
찌익!
“……!!”
얼굴을 노리는 공격이 집요했다. 제대로 괴롭히지도 못하고 너무도 곱게 죽인 이년의 자매가 생각 난 탓이었다.
“흐읏, 큭!”
목을 조이는 가죽 채찍은 금방이라도 영채의 목을 부러뜨릴 듯했다.
챙강!
검을 놓친 영채가 채찍을 잡아당기며 다시 한번 발버둥 쳤다.
그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 서월이 교활한 눈을 빛내며 영채의 머리카락을 한 손에 휘감았다. 가죽을 벗겨 낼 듯 잡아당기자 영채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 좋아라. 이거지. 그년을 이렇게 죽였어야 했는데.”
식은땀을 흘리며 새빨개진 얼굴을 덜덜 떠는 모습이 얼마나 만족스럽던지.
잔혹하게 눈을 빛내며 서월이 단번에 무릎 뒤를 걷어차 영채를 꿇어 앉혔다. 영력을 담아 발목을 밟았다.
퍽! 콰득!
뼈가 그대로 바스러지며 영채가 소리조차 되지 못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때였다.
퍼엉!!
곁방의 문이 세차게 열리는가 싶더니 무언가가 서월의 얼굴을 강타했다.
강렬한 소리와 함께 일자로 뿜어진 빛이 서월의 한쪽 볼을 태우며 지글지글 끓었다.
“꺄아악!”
“영채야! 비켜!”
힘이 풀린 서월의 손에서 벗어난 제 자매를 확인하고 영선이 영무가 내미는 신호탄의 끝을 다시 한번 잡았다.
망가진 몸을 일으켜 세우지 못하면서도 신중히 조준하며 바닥을 구르는 서월의 얼굴에 대고 한 번 더 쏘았다.
펑!
하지만 위험을 자각한 서월이 몸을 피하는 속도가 더 빨랐다.
직격으로 신호탄을 맞은 서월의 한쪽 얼굴이 짧은 시간 안에 완전히 망가졌다.
생살이 녹아드는 고통을 삼키며 서월의 시선이 험악하게 들끓었다.
“너…….”
분노로 가득 찬 시선은 자신이 죽였다고 생각했던 영선을 본 순간 폭발했다.
“너!!”
저, 사지를 잘라 개 먹이로 줘도 분이 풀리지 않을 계집이 멀쩡히 살아 있었다니!
영채는 서월이 흥분한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발목이 부서진 상태에서도 검을 주워 일어선 그녀가 서월에게 몸을 날렸다.
“이 미친년들이!!”
서월의 단도가 영채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힘을 주어 그 단도를 아래로 내리그었다.
“!!”
근육이 온통 찢어지는 끔찍한 고통이 영채의 몸을 뒤흔들었다.
챙그랑!
영채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그러나 영채는 그대로 조금도 빈틈없이 서월을 끌어안았다.
“이 쌍년이! 놔! 놓으라고!”
단도가 다시금 푹푹 영채의 몸을 쑤셨다. 날카로운 칼날이 박혔다 뽑힐 때마다 붉은 피가 튀었다.
고통으로 눈앞이 하얗게 터져 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영채는 잡은 손을 절대로 풀지 않았다.
이대로 버티면 된다. 그러면 누군가 와 줄 것이다.
이를 악문 영선과 영무도 바닥을 기어와 서월의 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신호탄이 두 개나 터졌으니 누군가 달려오지 않을 리 없었다.
시간이 없음을 판단한 서월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이 망할 년들이 단도를 든 팔째로 몸을 끌어안고 있는 탓에 검을 꽂을 각도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중 제 다리를 붙잡고 있는 또 한 년은 달랐다. 영선의 목이 서월의 검날 아래에 있었다.
‘그래. 네 자매의 목이 따여도 계속 이러고 있을 수 있나 보자.’
이를 악문 서월이 이번엔 영선의 목을 향해 단검을 내리찍었다.
그렇게 피로 범벅된 단검이 창백한 목줄기를 꿰뚫으려던 순간이었다.
챙!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 하나가 서월의 단검을 날려 버렸다.
“!!”
서월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화살의 궤적을 따라갔다.
표정을 굳힌 백가 재상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빠르게 화살을 시위에 건 그의 손이 한 번 더 움직였다.
탕!
영력을 담은 화살이 무섭게 날아갔다.
* * *
주명윤이 저택에 돌아온 것은 아주 짧은 시간 사이였다.
피범벅이 된 그는 몸이 부서질 정도로 전속력으로 달려 저택에 돌아왔다.
하지만 저택은 이미 엉망이었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사상자들과 붉은 피가 흩뿌려지며 온통 얼룩진 마당들.
‘안 돼, 세화야!’
말에서 내릴 새도 없이 명윤이 그대로 빠르게 별당으로 달려갔다.
별당도 난장판이었다. 덧창을 닫아 놓았던 창은 박살이 나 있었고 두터운 문은 한쪽만 매달려 있었다.
그 안의 모습 역시 바깥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참혹한 모습의 영채를 백가 재상이 영력을 불어 넣으며 돌보고 있었다.
“원로 어른…….”
기절한듯 쓰러져 있는 영무의 옆에서, 곁방 문턱에 기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던 영선이 명윤을 발견하고 속삭였다.
“아가씨는 무사하십니다. 무사하세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말대로 방 안은 엉망이었으나 세화는 아까와 다름없이 창백한 모습으로 침상에 누운 채였다.
그런 딸을 확인하자 주명윤의 눈끝이 달아올랐다.
순간 그의 눈앞으로 많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 신영을 만나러 저택에 입성하던 때의 기억. 전장을 누비며 주가의 혈족들을 지켜야 한다고 되뇌었던 기억.
최전방을 지키는 십년간 스산하고 외로웠으나 가족도 외면한 채 오로지 적들에게만 신경을 집중해야 했던, 그날들의 기억.
‘이것이…….’
그가 그 길었던 시간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이것이 그 시간에 대한 대가입니까, 신영.’
딸에게는 괜찮다고. 그의 지난 생은 너의 남은 시간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생각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은 절대 쉽지 않았다.
그를 믿고 있을 다른 장병들은 어떻게 할 것이며, 그의 영지민들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신영의 만행과 계획을 세화의 말로 알게 되었다 해도 이곳을 떠나는 것은 그리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녕 제게 이리 나오시는 겁니까. 신영.’
힘껏 틀어쥔 그의 손안에서 붉은 피가 뚝뚝 흘렀다.
그의 눈빛이 흉흉히 들끓었다가 다시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때 영선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하나를 더 고해 왔다.
“원로 어른, 아가씨는 무사하시지만…….”
그녀의 시선이 죄책감에 아래로 꺾였다.
“적룡의, 영단을 빼앗겼습니다.”
주명윤이 고개도 들지 못하는 영선에게 다가갔다.
“괜찮다. 잘했다.”
그녀를 침상으로 데려가 눕히고 이번엔 백가 재상에게 다가갔다.
백만용은 사영채의 한쪽 손을 잡은 채 영력을 주입하며 생을 연명시켜 주고 있었다.
“재상, 제가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어떤 공방이 있었는지 재상의 얼굴도 엉망이었다. 그리고.
“영채야.”
사영채의 모습은 더욱 엉망이었다.
그 끔찍한 모습에서 치열했을 공방을 알 수 있었다.
일단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백기하가 돌아올 때까지 버티는 것이었다.
주명윤은 남은 사람들을 진두지휘하며 집 안을 정리했다.
그리고 모든 문을 닫아걸고 밖에서 전해지는 어떠한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 * *
백기하가 돌아온 것은 이틀 후, 자정이 조금 넘어선 시간이었다.
거대한 신수는 어둠에 녹은 듯 모습을 감추며 소리 없이 별당 앞에 내려앉았다.
별당 안엔 아무도 잠든 사람이 없었다.
약속된 시간이 가까워지자 모두가 그를 기다리며 모여 있었다.
백기하는 뭔가를 말할 겨를도 없이 가져온 백호의 송곳니를 영력으로 부쉈다.
그 가루를 물에 타 넣은 그가 의식 없는 세화의 몸을 일으켜 한 숟갈씩 조심스레 입안에 흘려 넣었다.
“효과가 있겠습니까.”
“그러길 바라야지요.”
하지만 물잔의 물을 모두 마시게 했음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흉하게 일그러진 상처들이 치유되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고 세화의 의식이 깨어나지도 않았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모두가 표정을 굳히며 실망감을 드러내지 않으려 할 때였다.
“……!!”
발치에서부터 시작된 새하얀 영력이 가느다란 세화의 몸을 삽시간에 감싸 안았다.
마치 그녀가 백룡이 되었을 때처럼, 꽃봉오리 형태로 자라난 영력이 그대로 그녀를 삼켜 버렸다.
“!!”
세찬 바람이 다시 한번 방안에 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