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254)

“저, 실례합니다. 실례합니다.”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서신 심부름꾼인가.’

채수의 몸이 반사적으로 문을 여는 걸쇠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이런 심부름꾼이야 평소 지겨울 정도로 자주 왔으니 이번에도 별다를 일 없을 거라 여긴 것이다.

허나 문을 열려다 말고 멈칫했다.

‘아니지, 내가 무슨 생각을.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데.’

아무도 이 문 안으로 들이지 말라 소리치던 백가 재상의 모습을 기억해 내고 불에 덴 듯 빗장에서 손을 치웠다.

‘그러고 보면 오늘만큼은 나도 그냥 측문 하인이 아니라 성문을 지키는 수문장 같긴 하군.’

늘 아이들에게만은 친절했던 채수는 답지 않게 목소리를 깔며 물었다.

“누구냐.”

“저, 서신 심부름을 왔습니다. 오전에 방계 어른께서 명윤 원로께 약속을 잡아 달라 청을 넣었었는데 아직 답변이 없으셔서요. 언제쯤 대답을 들으실 수 있는지 여쭤보라 하셔서 왔습니다.”

“지금은 늦은 시간이라 원로 어른께서는 답변을 주실 수 없다.”

“그러지 마시고 늦은 시간이지만 말씀만이라도 전해 주십시오. 이대로 돌아가면 전 큰일 납니다.”

“어허, 돌아가래도. 지금은 답변을 주실 수 없다니까.”

“…….”

문 너머에 있는 아이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저 같은 아이의 상황을 모르셔서 그렇습니다. 꼭 답변을 가져오라 들은 이야기에 그냥 돌아가게 되면 저는 죽습니다. 계속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는 여기서 답변을 주실 때까지 밤새 기다려야 합니다.”

그 애처로운 목소리에 채수의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

그 생활을 왜 모르겠는가. 저도 해 본 것을.

마치 물건처럼 이리저리 맞고 걷어차이던 옛 기억을 떠올리며 망설이던 채수가 문 너머를 향해 말했다.

“그러지 말고 명윤 어른께서 내일 오라 하셨다고 답 드리고는 내일 다시 오거라. 원로 어른께서는 지금 출타 중이셔서 널 도와주실 수 없다.”

“네? 출타 중이시라고요?”

“그래.”

“정말, 정말 출타 중이신가요? 절 속이려 하시는 게 아니라 정말입니까?”

“그렇다니까.”

“그럼 아까 무사와 함께 떠난 이가 정말 명윤 원로라 이거지요? 정말 주명윤이 저택을 비운 거라 이거지요?”

주명윤?

그 단어에 의문을 떠올릴 무렵이었다.

콰앙!!!!

강렬한 영력이 쪽문을 한 번에 터뜨리며 밀어닥쳤다.

“!!”

파편의 폭풍을 온몸으로 맞은 채수가 허공을 날아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열린 문 사이를 작은 발걸음이 사뿐히 가로질렀다.

“아, 서월은 혹 그자가 명윤 원로로 변장한 그의 심복이기라도 할까 봐 걱정했지 뭐야. 그런 건 아니었나 보네.”

맑게 미소 지은 서월의 눈이 흘끔 바닥에 쓰러진 이에게 향했다.

흙바닥에는 피가 낭자했고 그 위에서 채수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고 있었다.

폭발로 비산한 나무 파편들에 의해 그의 몸은 엉망이었다.

그 상태로도 채수는 간신히 품을 뒤져 신호탄을 꺼내 들었다.

입꼬리를 비죽 끌어 올린 서월이 그런 채수의 손목을 밟고 영력을 사용해 눌렀다.

콰득!

“!!!!!”

끔찍한 고통에, 이미 파편이 몸에 박혀 고통이 극에 달해 있던 채수가 그대로 기절했다.

서월이 뒤를 돌아보자 복면을 쓴 무사들이 일제히 저택 문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신호탄을 쏘지 않았다 하더라도 문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으니 호위들이 곧 이쪽으로 올 테지만.

‘호위는 이자들이 알아서 하면 되겠지.’

백기하가 하늘을 날아 떠나는 모습을 보자마자 황급히 무사들을 끌고 달려온 서월이 가뿐한 모습으로 허공을 향해 뛰어올랐다.

‘세화란 년은 어디 있으려나. 자기 방에 있으려나.’

그렇게 전각과 전각의 지붕을 밟으며 세화의 방을 향해 달려갔다.

* * *

주명윤은 호위를 따라 거세게 말을 달렸다.

부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다는데 망설일 것이 뭐가 있을까.

하지만 마음속엔 여전히 거친 불안감이 스산하게 휘감아 돌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흘끗 제 앞을 달리는 무사의 등 뒤로 향했다.

‘이 아이가 내게로 온 정황엔 수상한 것이 하나도 없다.’

이 무사가 지난 십 년간 제게 얼마나 충직했는지. 제 목숨을 구해 준 것이 몇 번인지 셀 수도 없었다.

전장에서도 이 무사가 가져오는 정보라면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무사가 눈물을 보이며 부인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는 말을 꺼내 놓았는데 믿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세화의 백가행 얘기는 아들들도 돌아오게 만들었으니, 소식을 들은 부인이 돌아오고 있었다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순찰 무사들과의 접전 역시도 신영이 불필요한 교전을 전면 금한다는 명까지 내릴 정도로 늘 있어 왔던 일이니.’

백 가지를 의심하려 해도 백 가지가 다 말이 되는 상황이었다.

허나 주명윤의 가늘어진 눈매는 쉬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 모든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다만 시기가 이상할 뿐.

여러가지 일이 한꺼번에 급박히 벌어진 오늘 중, 부인의 소식을 받은 무사가 백기하가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찾아온다?

그리하여 자신으로 하여금 저택을 비우도록 한다?

“…….”

그저 적이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한 것일 수도 있었으나…….

무섭도록 무거운 얼굴로 말을 달리던 주명윤이 결국 무언가를 결심했다.

‘……만약 아니라면 내 모든 것을 걸고 네게 보상하마.’

이를 사리문 그가 조용히 호위와 틈을 좁혔다.

적기는 한순간이었다.

“!”

번개처럼 빼든 흔들림 없는 검 끝이 앞서 달리는 무사를 향해 날았다.

단단히 굳어진 주명윤의 시선 속에서, 바람을 가르며 내리쳐진 검이 무사의 한쪽 어깨를 가격하려던 때였다.

절대 방비할 수 없는 거리였다.

하지만 몸을 옆으로 기울여 공격을 피한 무사는 물 흐르듯 자신의 검을 뽑아 예리한 검날을 쳐냈다.

챙!

“……!!!”

미리 공격받을 것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고서야 이렇듯 완벽히 막아내지 못할 모습으로.

‘이, 이 녀석이.’

검과 검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에 주명윤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머릿속은 이미 충격과 깨달음으로 엉망이었다.

‘……이 녀석이 나를, 나를 배신했어?’

결과가 명확했다.

하지만 이미 의심하고 있었음에도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 내 너를 믿었거늘. 지난 십 년간 너를 그리 믿었거늘!”

그래서 한 번 더 확인하기 위해,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호통을 쳤다.

저이는 뛰어난 실력의 무사였다.

실력이 좋아 제 공격을 눈치챈 것일 뿐, 이 정도로 저 녀석을 의심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을지 모른다.

“이상하네요. 잘한 것 같은데.”

헌데 시험하듯 꺼낸 그 말에, 무사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반문하는 대신 오히려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대체 어떻게 눈치채신 겁니까?”

‘!’

주명윤이 피가 터지도록 세차게 입술을 짓씹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고삐를 틀어쥐었다.

무사의 저 태연한 모습은 절대 가까운 시일 사이 돌아선 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놈마저 배신자라면. 처음부터 배신자였다면.

그러면 그의 인생은 어디서부터 망가져 있던 것이란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후회할 시간조차 없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가 강하게 말의 배를 찼다.

딸에게로 서둘러 돌아가기 위해선 먼저 이놈을 죽여야 했다.

* * *

울다가 지친 영선을 다시 곁방으로 옮겨 두고 영채도 제 젖은 얼굴을 닦아 냈다.

영선은 정신을 잃은 아가씨 곁에 있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영채가 네가 빨리 쉬고 몸이 나아야 다시 아가씨를 돌볼 수 있지 않겠냐고 설득하자 얌전히 침대에 몸을 눕혔다.

아가씨가 영력으로 치료를 해 주긴 했으나 그때는 신영의 불을 막아서는 도중이었던 데다가 자신의 몸도 완전히 망가진 상태였었으니.

이만큼이나 치료가 된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럼 영채야, 아가씨 잘 부탁해. 아가씨 깨어나시거나 상태가 변하시면 나도 꼭 깨우고.”

“당연하지. 네가 더 자고 싶다고 애원해도 두들겨서 깨울 거니까 염려 말고 잠깐 눈 붙여. 그래야 빨리 낫지.”

“응.”

“걱정하지 마. 꼭 무사하실 거야.”

“……응.”

하지만 일그러지기 시작한 눈가에선 다시금 눈물 줄기가 뚝뚝 흘러내렸다.

영선이 제 얼굴을 가리며 몸을 웅크렸다.

그 마음이 어떨지 알고 있는 영채가 이불을 덮어 주고는 곁방을 나섰다.

세화가 누워 있는 방 안이 너무 고요했다.

숨소리가 너무 옅어 영채는 몇 번이나 세화의 호흡을 확인했다.

그럴 리 없다고 믿어야 하는데 자꾸만 마음이 불안해 뭔가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뭔가 더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이미 필요한 것은 모두 이 방 안에 있었다. 몸을 회복시키는 적룡의 영단이라든가. 약이라든가. 땀을 닦아 드릴 수건이나 수건을 빨 물통까지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 없이 그저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상황이 힘들기만 했다.

‘한데 지 행수가 분명 아가씨가 용의 모습으로 변하셨다고 했지?’

용의 모습이라니.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짐승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건 신수뿐이고, 환족이 신수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환석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가씨께서 구하신 환석들은 아직 한 개도 사용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아니면 혹시 영력은 충분하신데 환석이 없으셔서 온전한 신수로 변하지 못하신 건 아닐까?’

신수는 불로불사에다가 강한 회복력을 가지고 있으니.

‘만약 신수만 되실 수 있다면 이런 상처쯤은 문제없이 털고 일어나실 수 있으실 거야.’

머리를 굴리던 영채가 하인을 시켜 제 방 안에 있던 목함 두 개를 가지고 오게 했다.

세화가 그녀에게 맡겼던, 푸른 거북이의 영단 나머지와 안가에 두지 않고 최장명에게 따로 받아 두었던 환석이었다.

혹 이것이 도움이 될까 싶은 그녀가 세화의 이불 아래로 환석과 영단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영단과 환석에서는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상하네. 지난번엔 분명 만지기만 하셨는데도 흡수되었다고 하셨는데 왜 이렇지. 탈피 전과 탈피 후는 또 다른가?’

“왜. ……나도. 내 목숨 구한 거야.”

“너희가…… 내 목숨이야.”

뭐라도 해 드리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그 말만 자꾸 떠올라 영채의 눈가도 다시 그렁그렁해졌다.

“아가씨도…….”

영채가 수건을 적셔 세화의 이마를 닦으며 속삭였다.

“저희 목숨이에요. 그러니 꼭 일어나세요.”

이리 계속 누워 계시면 저희도 무섭다고. 두려움 가득한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그때였다.

“찾았다!”

즐거움 가득한 앳된 목소리가 문틈을 통해 방 안으로 흘러들었다.

“여기 있었네. 원로댁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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