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254)

“!”

세화의 눈에서 가느다란 눈물이 흘러나왔다.

“너희가, 무사해서…… 너무 기뻐.”

“…….”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

“……살아서. 아무 일도 없어서.”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고 그녀가 까무룩 다시 의식을 잃었다.

신음 같은 한마디가 그 사이를 흘렀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라고.

자신은 이렇게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으면서. 불에 온통 짓무른 살들이 엄청 아플 텐데도.

그럼에도 다행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하면서.

더 이상 참지 못한 영선이 결국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어허어어어어엉.

아가씨가 주무시니 조용히 하라고 타박이라도 해야 하는데.

엉엉 소리를 내어 우는 영선을 이번엔 영채도 말리지 못했다.

그녀의 눈가도 새빨개진 채 말간 것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으니까.

“…….”

그 장면을 지 행수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자매와 똑같이 젖어 든 눈을 한 그녀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 장소를 조용히 빠져나왔다.

* * *

백기하와 주명윤의 안색도 병상에 있는 세화만큼이나 창백했다.

백방으로 약을 구하고는 있었으나 너무나 모자랐다.

거기다 누가 일을 친 것인지 모르는 이상 세화의 상태를 밝혀서는 안 되었기에 비밀리에 움직이기까지 해야 했으니.

여기까지 셋을 급히 데리고 온 지 행수가 약을 구하는 일을 도와주었으나 지금 상황에서 저이라고 온전히 믿을 수가 있을까.

아가씨께서 깨어나시는지 조금만 지켜볼 수 있도록 해 달라며 가져오는 약이 아주 상등품이었던 데다가 용비늘침으로 몇 번을 확인해도 독이 검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놔두고 있을 뿐이었다. 일단은 지푸라기라도 잡을 필요가 있었으니까.

먹고 나서 독으로 변하는 약초도 많았고, 시간이 흐른 후 독으로 바뀌는 약초도 많았기에 방심할 수는 없었다.

의심의 끈을 놓지 않고 무사 열댓 명을 붙여 일거수일투족을 대놓고 지켜보게 하는데도 지 행수는 별 불만을 표하지 않고 성심성의껏 약을 구해 왔다.

하지만 그 약으로도 세화의 상태를 낫게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주명윤은 살갗이 타들어 간 세화의 상처를 보고 무엇에 의해 이렇게 된 것인지를 바로 알아차렸다.

‘신영의 불이다. 이건!’

신영만이 가질 수 있는, 옛 적룡의 힘이 담긴 공격형 영단.

‘하면 이건 이런 약으로는 치료가 안 돼!’

아니나 다를까. 아무리 약을 써도 세화의 상태가 나빠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호전은커녕 간신히 현상 유지나 하는 실정이었다.

백기하도 백만용이 가져온 약을 모두 사용하고 추가로 약을 구해 보려 애를 썼으나 다른 가문의 영역이었기에 쉽지 않았다.

“백가에 다녀와야겠습니다.”

망설이던 백기하가 주명윤에게 말했다.

“신수의 모습을 하고 전속력으로 영력을 사용해 달리면 이틀 반이면 이곳에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그때까지라도. 그때까지만이라도 그녀를 잘 부탁드립니다.”

“백가에 가면,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백기하의 확고한 태도에 주명윤이 실낱같은 끈을 잡는 것처럼 절박하게 물었다.

“신수로 탈피할 때 얻은 제 송곳니가 있습니다. 신수가 될 때 얻은 송곳니는 영수가 될 때 얻은 것과는 달리 한 번은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백가 호족의 송곳니라 하면 주가의 역린과 같은 귀물이었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한 번은 백기하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것일 텐데.

이젠 불사의 신체도 가지지 못했으면서.

“그런 귀한…… 것을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일각이라도 지체할 수 없으니 지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허나 백기하는 조금도 거리끼는 기색 없이 곧장 방을 나섰다.

신수로 변하기 전에 돌아서서 주명윤에게 절실하게 당부했다.

“꼭 이틀 반. 어떻게든 그 시간 안에 돌아오겠으니 그때까지만 그녀를 부탁드립니다.”

그와 동시에 조금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 그의 모습이 변화했다.

심해처럼 새파란 눈을 빛내며 나타난 커다란 신수가 하늘을 향해 소리 없는 사자후를 내질렀다.

하늘로 날아오른 백호는 마치 구름을 밟듯 바람으로 만든 계단을 밟으며 먼 서쪽 하늘 너머로 달려갔다.

그사이 얼굴이 굳어진 주명윤도 이를 악물었다. 신영의 불까지 나온 이상, 그 역시 뭔가를 준비해야 했다.

방으로 돌아온 주명윤은 탁자에 앉아, 고심하다가 가족끼리만 알아볼 수 있는 말로 짧은 서신을 두 장 썼다.

망설이던 주명윤이 가장 신뢰하는 하인 둘을 조용히 불렀다.

“이것을 하나는 부인에게, 하나는 아들들에게 전해라. 급히 전달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보여야 한다.”

주명윤의 목소리가 얼마나 신중했는지, 불려온 두 명의 하인들도 이 일의 심각성을 알고 조심스러워졌다.

서신을 품에 안은 하인들이 떠나고 주명윤도 자신의 방을 나와 세화에게 가려 할 때였다.

“원로 어른!”

문을 지키는 하인과 함께 달려온 누군가가 그를 급히 불러 세웠다.

“아니, 자네는…….”

그의 휘하에서 꼬박 함께 십 년 전쟁을 겪어 냈던 초소병이었다.

촌각을 다투는 급한 전갈이란 말에 문을 지키던 하인이 따로 와 고할 새도 없이 함께 달려온 것이다.

“자네가 갑자기 여기까진 웬일인가?”

그의 모습은 한눈에 보기에도 정상이 아니었다.

얼마나 급히 왔는지 온몸은 온갖 모래 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얼굴은 피로가 극에 달해 핏기조차 없을 정도였다.

“대체 무슨 일이야. 영지선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주명윤이 황급히 다가가 묻자 무사가 입술을 떨며 말했다.

“큰일입니다. 장부인께서 위독하십니다.”

“뭐?!”

갑작스러운 소식에 주명윤은 순간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명윤의 부인 천수아 역시 전장의 상황을 지원하기 위해 의원으로서 영지선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위험하다니?

“세화 아가씨의 백가행 소식을 들으시고 급히 돌아오시던 길이었는데, 뜻밖에도 영지선에서 육가의 순찰 무사들과 마주쳐 작은 교전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제가 제대로 지켜 드리지 못한 탓에 부인께서 크게 다치셨습니다.”

무사가 물기 어린 목소리를 무겁게 꺼내 놓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저희가 급히 부인을 모시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만 더 이상 생을 붙잡지 못하실 듯하여…….”

“어찌하여 미리 사람을 보내지 않은 것이냐! 누군가를 먼저 보내 소식을 전하게 해야 했던 것이 아니냐!”

“저희 모두 장부인께 영력을 드리며 그분의 숨을 조금이라도 더 잇느라 손이 모자라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하필 딸이 저렇게 된 지금 소식을 전해 온 무사의 말은 어딘가 의심스러운 면이 있었다.

하지만 눈시울이 붉어진 무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주명윤이 직접 키웠던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주명윤이 떨리는 손을 움켜쥐며 물었다.

“그럼 부인은 어디 계신 것이냐.”

“이곳에서 한 시진 거리입니다. 그 거리도 더 이상 버티시지 못할 듯하여 제가 먼저 달려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가셔도 혹시 임종을 지키실 수 없을지 모르겠…….”

무사가 결국 눈물을 쏟았다.

함께 전쟁을 겪어 왔던 십 년 동안 늘 단단했던 이 무사는 목숨이 위태로운 큰 부상에도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 그가 이리 우는 모습을 보이니 주명윤의 얼굴이 다시 한번 창백해졌다.

이것이 무슨 일인가. 세화가 저렇게 아플 때 부인의 목숨까지 경각에 달리다니.

‘혹 세화를 저렇게 만든 이가 부인까지 죽이려 한 것인가?’

여러 가지 일이 한꺼번에 닥친 주명윤의 머리가 복잡했으나 일단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다.

‘……부인.’

부인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니, 일단 그녀를 먼저 보러 가야 했다.

“알았다. 함께 가마. 서두르자.”

“네. 절 따라오십시오.”

일단 말로 한 시진 거리라 했으니 무슨 일이 생겨도 전력으로 돌아오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비책을 생각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을 타는 곳으로 무사를 먼저 보낸 주명윤이 백만용을 찾아 잠시 상황을 설명했다.

“몇 시진이면 됩니다. 잠시 저택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사단윤도 자리를 비웠고 백기하는 제 비보(祕寶)를 가지러 백가로 떠났다.

충직한 하인들 역시 서신을 전하러 보내고 나니 이곳에서 이 사실을 부탁할 이가 백만용밖에 남지 않았다.

“저택의 모든 호위들을 이곳에 남겨 놓을 것입니다. 저는 홀로 다녀올 것이니 혹시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십 년이나 서로의 목숨을 노리던 적에게 이제는 이런 부탁을 해야 하다니.

저 자신도 황당할 지경이었으나 이곳에서 지금 백가의 무사들보다 믿을 수 있는 이가 없었다.

평소엔 말이 많던 백만용이었으나 이 순간에는 짧은 대답을 건네 왔다.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그 말이 어찌나 안심되던지.

고맙다고 고개를 끄덕인 주명윤이 품 안에서 뭔가를 내밀었다.

“이건.”

“제 명패입니다. 그래선 안 되지만 혹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 패로 저택의 일원들을 다스리십시오.”

백만용이 패를 받아 들자 주명윤이 한 번 더 다짐하듯 말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그리고는 초소병과 함께 저택을 나섰다.

그가 먼 곳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 백만용이 저택의 하인들에게 명령했다.

“문이란 문은 모두 닫아걸어라. 원로 어른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누구도 이 문 안으로 들여선 안 된다. 알겠느냐!”

* * *

저택의 측문을 지키는 하인인 채수는 오늘따라 어두운 저택의 분위기에 제법 경직된 상태였다.

시간이 지나면 경계가 풀릴 줄 알았건만 저택 분위기는 더욱 어두워져만 가는 것이 아닌가.

그에 따라 채수의 긴장감도 점점 커져만 갔다.

‘저택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그에게까지 저택 안쪽의 일이 알려지진 않았으나 별채가 제법 소란스러웠던 것을 떠올리며 채수가 스산한 느낌에 팔을 비볐다.

고아로 살며 비렁뱅이처럼 길을 떠돌던 그를 데려와 이만큼 키워 주고 보살펴 준 것은 명윤 어르신이었다.

아사할 뻔한 순간, 당장 여기서 죽어도 좋으니 죽 한 그릇만 먹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를 안아 올리던 손길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명윤 어른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미 그곳에서 세상을 원망하며 죽어 갔을 것이다.

‘지금 저택에 무슨 일이 정말 벌어지고 있는 건가? 나도 좀 알면 좋을 텐데.’

그가 제 두꺼운 팔뚝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역시 저택의 한 축을 맡아 기꺼이 소란에 끼어들 의사가 있건만.

‘그러면 은혜를 갚는 거니 좋은 거고. 혹 그러다가 나도 무사로 키워지게 된다면 더 좋은 거고.’

이렇듯 측문을 지키는 하인이 아니라 무사가 되어 검을 빼 들고 말을 타면 얼마나 멋질까.

그런 제 모습을 상상한 채수의 입꼬리가 설풋 긴장을 잃고 풀리던 그때였다.

그가 지키는 측문을 누군가가 조심히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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