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254)

* * *

무언가 제 위로 쏟아지고 있는 것 같았다.

뜨거운 여름의 대지를 식혀 주는 단비처럼 차갑고 달콤한 기운이었다.

“……으으.”

영선이 신음을 흘렸다.

그 기운을 받는 동안 의식이 조금씩 맑아지는 것 같았다.

어쩐지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고 온몸의 관절이 다 뒤틀린 양 고통스러웠지만, 그것도 점차 나아지고 있었다.

‘뭐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어렴풋한 의식 속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찔할 만큼 뜨거운 무언가가 몸 위로 쏟아져 내리던 기억.

그리고 뒤따라온 끔찍한 고통.

거기까지 떠올리자 자신이 처했던 상황이 기억났다.

‘맞아. 난, 난 분명 불타는 대들보와 지붕의 잔해에 맞아서……. 그런데 뭐지. 내가 왜 아직 살아 있는 거지?’

혹시 이 바람 때문일까.

영선은 마치 자신을 보듬어 주듯 쏟아지는 시원한 바람의 존재를 자각했다.

눈을 뜨는 것은 여전히 힘들었으나, 무겁기 그지없던 눈꺼풀의 무게를 한순간에 잊은 건 떨리는 영무의 목소리가 들려서였다.

울먹이는 영무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아, 아가씨……!”

아가씨?!

영선이 혼몽했던 의식을 지우고 번뜩 눈을 떴다.

한데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저택이 무너져 내리며 불이 자연히 꺼진 거라 생각했건만 불길은 여전히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다만.

“아가씨!!”

하얀 백룡이 적자줏빛 영력을 뿜어내며 그들의 위를 덮은 채 불길과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불길 속에 녹아 있는 영력이 백룡의 영력보다 더욱 강했다. 백룡의 몸을 파고든 불길이 하얀 비늘을 지글지글 녹여 댔다.

그럴 때마다 백룡이 고통으로 꿈틀거렸으나 제 몸 사이에 쓰러져 있는 자매들을 걱정한 탓인지 몸부림조차 크게 치질 못했다.

영선은 어째서 제 아가씨가 저리 힘들게 버티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불길을 막고 있는 백룡의 영력은 적자줏빛이었지만 배 아래로 흐르는 영력은 새파란 푸른 빛이었다.

그녀는 불길을 막는 동시에 제가 감싼 이들을 치료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안 돼!! 아가씨 그만하세요!!”

영선이 부서질 듯 아픈 팔에 힘을 줬다. 허나 몸이 일으켜지지 않았다.

“비켜나세요, 제발! 이러다 셋 다 죽어요!”

눈을 질끈 감은 백룡은 그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듯 요지부동이었다.

그사이에도 불꽃을 덧입은 지붕의 잔해들이 끊임없이 백룡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백룡이 고통을 참을 수 없는지 몸을 비틀었다. 비늘이 벗겨진 백룡의 몸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아가씨!”

그 피들이 영선과 영무의 몸과 얼굴을 적셨다.

“제발요!! 제발 벗어나시라고요!!”

하얀 비늘이 검게 타들어 가고 갈라지는 모습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영선이 몸을 굴려서라도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차라리 저 불길 속에 스스로 기어들어야 했다.

자신들이 죽어야 아가씨께서 스스로를 돌보실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백룡이 스스로 몸을 눕혔다.

다칠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그녀들의 몸을 빈틈없이 감싸고 막아섰다.

마지막 발악을 하듯 백룡이 제 몸에 가진 영력을 한 번에 터뜨렸다.

콰앙―!!!!

거친 불길의 회오리와 함께 강렬한 바람이 그들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터져 나갔다.

* * *

영선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익숙한 천장이 눈에 띄었다.

‘아, 아가씨는?! 아가씨!’

영선이 벌떡 일어섰다가 온몸에 가득한 통증을 버티지 못하고 침대에서 쿵 떨어졌다.

그 소리를 듣고 옆방의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영채가 들어왔다.

“깨어났어?”

“영채야!”

황급히 기듯이 다가간 영선이 영채의 치마를 붙잡고 물었다.

“아가씨는……. 아가씨는!”

“옆방에 계셔. 상태가 좋지 않으셔서…….”

“!”

“그래서 너한테 약을 못 썼어. 가진 약을 다 아가씨께 드리느라.”

영선이 정신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디가 어떻게 안 좋으신 거야? 상태가 대체 어떠신데!”

“…….”

“영채야!”

영채가 입술을 떨며 대답했다.

“……위험하실지도 모른대.”

“!”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지금 백가주께서 원로님과 해결 방안을 논의하고 계셔. 뭔가 방법이 있으실 거야.”

영채가 영선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조금 더 쉬고 있어. 그러면 조금 이따가-.”

“아냐. 아가씨를 뵙게 해 줘. 아가씨 한 번만 뵙게 해 줘.”

“…….”

“제발 부탁이야.”

간곡한 영선의 목소리에 영채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 체중을 거의 영채에게 쏟아 매달리다시피 한 채 영선이 다리를 끌며 걸었다.

어둑한 방 안 침상에 제 아가씨가 누워 계셨다.

식은땀에 범벅되어 있음에도 조금의 핏기조차 보이지 않는 채로.

영채가 영선의 몸을 침대 곁 의자에 앉혔다.

하지만 영선은 무릎을 꿇듯 내려와 침상 곁 바닥에 앉았다.

제 아가씨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바라보았다.

“많이…….”

배 속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아서, 그것을 억누르느라 영선이 목소리를 떨며 물었다.

“많이 안 좋으신 거야? 얼마나?”

“깨어나실 거야. 지금도 종종 한 번씩 눈을 뜨시니까.”

영채도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그 말만 겨우 전했다.

영선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바짝 마른 입술이 더 갈라지지 않도록 살짝 젖은 수건으로 아가씨의 입술을 적셔 드리기만 했다.

괜히 옆에 있다가 아가씨께 아픈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일단 네 몸을 속히 회복하는 일이 먼저라고 영채가 말해도 요지부동이었다.

“아가씨 종종 눈을 뜨신다며. 그거만 보고 갈게. 눈 뜨시는 거 딱 한 번만 보고 갈게.”

“……한데 깨셔도 정신이 없으셔. 계속 같은 것만 물으시고. 그러니 그냥…….”

그 사이 방 안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지 행수였다.

“여기, 새로 구해 온 약입니다.”

영채가 약을 받아 드는 사이, 영선은 아가씨가 이런 상태인데 이 방 안에 외부인을 들였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지 행수가 옆에 있다는 것을 신경 쓰지 않고, 영채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무슨 생각이야. 우리를 공격한 게 누군지 아직 모르는데 왜 여기 외부인을 들이는 거야!”

제 자매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 영채가 대단히 당황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 아가씨와 너희들을 구해 이곳까지 데려온 이가 지 행수니까.”

“그것조차 다른 목적이 있어서일지 누가 알겠어?”

영선은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표독스럽게 떴다.

지 행수가 뭐라 더 입을 열려는 영채를 만류하며 끼어들었다.

“죄송합니다. 허나 제가 가진 약이 회복에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

“가져오는 약들은 모두 세 차례 용비늘침을 담가 불순한 재료가 들어가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고도 혹 무슨 일이 생길까 제가 직접 약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이곳에 남은 것입니다. 상태가 조금이라도 호전되신다면 곧장 떠날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왜 그렇게까지 하죠? 당신이 우리와 무슨 친분이 있었다고.”

“……그건.”

지 행수 역시 영선이 제게 날카롭게 구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데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그녀의 발목을 잡는 어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있었다.

그때였다.

“으으…….”

아무리 물로 적셔도 빠르게 마르기만 하는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신음이 샜다.

무겁게 처져 있던 속눈썹이 깜빡이는 것을 보고, 영선이 빠르게 다가가 소리 죽여 물었다.

“아가씨. 정신이 드세요?”

“잠시 깨어나시긴 하지만 정신을 차리신 것이 아니야.”

영채가 영선의 그런 행동이 오히려 더 걱정된다는 듯 덧붙였다.

하지만 영선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제 아가씨의 손 위를 제 것으로 덮었다.

바짝 다가가 아가씨의 반응을 면밀히 살피고 있으려니 힘없는 입술 사이로 신음 같은 질문이 흘러나왔다.

“……영, 채야.”

“네, 아가씨.”

영채가 바짝 다가섰다.

“……영, 무랑 영……선이는?”

“!”

“걱정하지 마세요. 둘 다 괜찮아요.”

“영채야. ……영무랑, 영선이는?”

“걱정하지 마세요. 둘 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세요.”

그 대화의 사이를 영선이 끼어들었다.

입술이 떨려서. 목이 메어서. 숨조차 쉬기 힘들었으나. 이 말만은 꼭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감사해야 하는데.

목숨을 구해 주셨다고, 아가씨 덕분에 무사하다고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누가 이렇게 해 달래요? 누가 아가씨더러 구해 달라고 했어요? 제가 부탁하기라도 했느냐고요!”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버릇없는 말투에 놀란 영채의 눈이 동그래졌다.

“영선아! 아가씨께 지금 무슨 말을 그렇게-.”

“아가씨는 아가씨 목숨이나 챙기셔야죠. 우리 목숨과 아가씨의 목숨은 가치가 다르다는 걸 모르시냐고요!!!”

그렇게 말하는 영선의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마음처럼 되지가 않았다.

“대체 왜! 맞다, 그리고 이것도 도로 받으세요. 이것, 역린이었던 거죠! 이런 건 받지 않을래요. 처음부터 받지 말았어야 했어요.”

영선이 제 목걸이를 서둘러 빼 내려놓았다.

이것은 환족들이 탈피를 마친 후 하나씩 갖게 되는 귀물이었는데, 주가의 후예는 용족의 후손이어서인지 보통 비늘의 형태로 나타나 역린이라 불렸다.

역린을 누군가에게 건네면 소유주가 위급할 때 역린의 주인을 강제로 부르는 효과가 있었다.

그 때문에 오래전에는 반려자들끼리 서로의 목숨과 함께하겠다는 정표로 나눠 가지곤 했다.

하지만 신수의 존재가 사라지고, 영력조차 목숨을 유지할 정도로만 가진 이들이 적지 않게 태어나면서 환족들은 탈피 후 역린이 만들어지면 저만 아는 비밀 장소에 꽁꽁 숨겨 두곤 했다.

누구의 손에 어떻게 들어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생긴 것이다.

한데 이 목걸이가 역린을 다듬은 것이었다니.

그 말에 영채도 깜짝 놀라 제 목에 걸린 목걸이를 빼내었다.

어찌 그런 귀한 것을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건가.

미리 알았다면. 이것이 비늘의 모습이기만 했어도 알아챘을 텐데. 잘리고 다듬어진 탓에 그저 자개인 줄만 알았다.

그 등신 천치 머저리 같은 추측에 영선은 제 뺨이라도 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때 아가씨의 혼몽한 시선이 영선에게로 닿았다.

“영선……이야?”

“네! 저라고요. 대체. 대체 왜……. 왜 이런…….”

뭘 잘했다고 여기서 울기까지 할까.

영선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꾹꾹 내리누르며 제 아가씨를 바라봤다.

“절대로, 다시는 이런 일을 하셔선 안 돼요. 아시겠어요? 아가씨의 목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요. 그러니 빨리 약속해 주세요. 다시는 이러시지 않겠다고.”

무겁게 감겼다가 다시 힘겹게 들어 올리며, 세화의 흐릿한 눈동자가 그런 영선의 얼굴을 면면이 바라봤다.

“어서요. 빨리 대답해 주세요. 빨리 대답해 주시라고요.”

“영선아, 너 왜 이래. 미쳤어? 아가씨 쉬시게 그만 가!”

“싫어!약속을 듣고 갈 거야.”

늘 어른스럽던 영선답지 않은 말에 영채가 당황했다.

그때였다.

피식 웃은 아가씨의 손이 움직였다.

잔뜩 떨리며 힘겹게 움직인 손이 제 가슴 위에 놓인 역린 목걸이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가져가 영선의 손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아가씨의 눈가도 설핏 붉었다.

“왜. ……나도. 내 목숨 구한 거야.”

조금 움직였다고 호흡조차 힘들 정도로 숨이 가빠진 그녀가 간신히 한 문장을 꺼내 놓았다.

“너희가…… 내 목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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