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254)

* * *

그런 순간이 있다.

누가 어떤 말을 하지 않아도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은 그런 때가.

세화는 주명윤이 기다린다는 곳으로 들어갔다.

백기하의 명인지 별관의 주위를 백가의 무사들이 둘러싸 지키고 있었다.

낮임에도 대화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창을 꼼꼼히 닫고 덧창까지 대어 놓은 탓에, 방 안은 초를 켜야 할 정도로 어두웠다.

무서울 정도로 진지한 얼굴을 하고 이마를 괴고 있던 주명윤이 세화의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세화는 알았다.

왜 오늘 오래도록 백기하와 아버지가 이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었는지.

자신을 왜 부른 것인지.

아버지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걸음이 멈췄다.

삽시간에 밀려드는 긴장감에 마른침조차 넘기기 어려웠다.

내가 하는 말을 믿어 주실까.

그간 신영에 대해 아버지가 많은 실망을 느끼셨다 하더라도 평생에 걸쳐 쌓아 온 충성심을 한순간에 버리시긴 힘드실 텐데.

찰나의 순간 수많은 생각이 세화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긴장으로 창백해진 얼굴을 한 그녀가 “아버지.” 하고 주명윤을 부르던 순간.

“아비의 말을 먼저 들어라.”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입을 뗀 주명윤이 세화의 손을 잡아 의자에 앉혔다.

“그간 단윤이가 없었던 것을 너도 알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서두에 놀란 세화의 눈이 동그래졌다.

단윤 아저씨?

“그 녀석은 나 대신 경계 지역의 상황을 정리하러 갔다.”

두 오빠들이 그런 것처럼, 종전했다고는 하나 아직 불안한 주가 영역의 경계를 지켜야 하는 것은 주명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가 지불해야 하는 배상 문제와 다른 주가 일원들 간의 배상 책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잠시 돌아왔던 것이다.

한데 단윤 아저씨가 경계 지역의 상황을 정리하러 가셨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아버지께서도 곧 돌아가셔야 한다는 말인가?

세화가 주명윤의 말에 의문을 표하는 기색을 보이자 침묵하고 있던 백기하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대 대신 원로 어른께서 백가에 오려고 하셨다는 말이야.”

“?!”

“그래. 내가 가려 했다.”

“아버지. 아버지가 어떻게……. 육가 연합에서 굳이 어린 핏줄을 요구한 이유는-.”

“그래. 영력을 가진 이를 받지 않으려는 거지. 하나 내가 영력을 모두 빼내어 맡기면 되지 않겠니. 배상 영력도 빼내는 중인데 뭐가 문제겠느냐.”

“아버지!”

충격적인 주명윤의 말에 놀란 세화가 크게 소리쳤으나 주명윤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다 원신이 상해 되돌릴 수 없게 돼 그 상태로 백가에서 죽게 된다면 신영께서도 안심하시지 않겠느냐.”

“!”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주명윤이 세화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러니…… 세화 너도 고민하지 말고 뭐든 사실대로 아비에게 말하고 의논해도 된다. 어떤 경우에도 아비는 네 편에만 설 것이다. 너보다 누가 더 가엽든, 누가 더 옳든 그건 중요치 않다. 지나온 나의 긴 인생보다 네 앞에 남아 있는 긴 인생이 내겐 백배 천배 더 중요하니까.”

“……아버지.”

자신의 모든 인생보다 딸의 앞날이 더 중요하다는 아버지의 말에 세화는 감정이 복받쳐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그 얘길 하려 말을 꺼낸 것이다. 그러니 이제 네가 내게 말을 해 주거라. 네가 하지 못한, 그러나 내가 알아야 하는 그 말들이 뭔지.”

제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말을 해 주는데 제가 더 못할 말이 뭐가 있으랴.

긴 이야기가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이야기는 아주 어린 날부터 시작됐기에, 그녀의 한 맺힌 세월이 주명윤에게 다 전달되는 데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주명윤은 백기하의 말을 모두 다 믿을 수는 없었다.

허나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이야기가 딸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상황은 달라졌다.

백기하와 이야기할 때는 심각하기만 했던 주명윤의 표정이, 세화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에는 무섭게 일그러졌다.

세화는 고문실에서 있었던 일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만 추려서 얘기했다.

하지만 그곳으로 끌려간 이들이 어떤 일들을 겪어야 하는지 가문의 원로인 주명윤이 어찌 모를까.

딸이 생략한 이야기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바로 알아차린 그의 눈시울이 뜨끈하게 붉어졌다.

그 긴 이야기들을 듣고 있는 동안 목이 얼마나 메었던지.

“……얼마나.”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가 안타깝고 비통하게 흘러나왔다.

“얼마나 힘들었느냐.”

제 손을 잡는 아버지의 두텁고 거친 손마디 감촉에 세화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 얘길 왜 지금까지 하지 않았어. 대체 왜.”

“…….”

“책망하는 것이 아니다. 이유를 알겠으니까.”

말을 할 수가 없었겠지.

그토록 가문에 충성하라, 네 모든 걸 신영께 바쳐야 한다, 누누이 말해 왔으니 차마 말을 할 수 없었겠지.

“미안하다. 다 아비 탓이다. 아비가 먼저 네게 아니라고, 너만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너의 인생은 너의 것이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아버지. 그리 말씀하시지 마세요.”

이리 사랑해 주시는 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지금껏 말씀드리지 못했던 건 그런 이유가 아니에요.”

혹여 일이 잘못됐을 때 저 하나의 목숨으로 끝내려 한 것뿐이다.

세화가 후회의 감정이 절절 끓어오르는 주명윤의 참담한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버지께서는 믿으시기 힘든 이야기일 테니 증거를 얻어 말씀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단지 그것뿐이지, 말씀하시는 것 같은 그런 이유는…….”

그때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갑자기 세로로 갈라졌다.

“!”

길게 늘어뜨린 머리가 허공으로 떠올라 넘실거렸다.

그녀의 몸 또한 공중으로 떠오르는가 싶더니 발치에서 시작된 적자줏빛 영력이 마치 연꽃처럼 그녀의 몸을 삼켜 버렸다.

“!!”

“!!!”

세화를 바라보고 있던 백기하도 시선을 내려뜨리고 있던 주명윤도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선 그 순간이었다.

휘오오!

빈틈없이 창을 닫은 방 안에 갑작스러운 강풍이 몰아닥쳤다.

그녀의 몸에서부터 시작된 그 바람은 점점 더 강해져 곧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는 폭풍을 만들어냈다.

“이, 이게 무슨……. 세화야!”

“주세화!”

강한 영력으로 이루어진 바람 앞에서는 몸을 보호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탕! 쨍강!

모든 물건들이 쏟아지고 깨지며 방 안이 삽시간에 엉망이 되었다.

단번에 벽으로 밀려난 남자 둘이 밀려드는 바람을 팔로 막으며 다시금 세화를 부를 때였다.

그녀의 몸을 빈틈없이 휘감고 있던 적자줏빛 영력이 꽃잎이 열리듯 허공에서부터 사라져 갔다.

콰앙!! 쾅!

덧문을 걸어 놓은 창과 문이 동시에 거칠게 열렸다.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새하얀 백룡이 그 사이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하늘을 향해 날다가, 어느 순간 투명하게 사라져 버렸다.

* * *

빈수레를 챙겨 돌아가는 지 행수의 안색이 제법 가벼웠다.

“행수님.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응? 기분?”

세화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행수가 한발 늦게 대답했다.

“아아. 요 며칠간 제법 돈을 많이 벌지 않았더냐. 그래서 그런가 보지. 그러는 너도 기분이 좋아 보이는 구나. 뭐,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

“그럼요. 드디어 명윤 원로 댁에서 우리 상단에 주문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잘해 드리고 싶은 분께서 주문을 주셔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오니, 이것도 기분이 제법 괜찮네요.”

픽 웃은 지 행수가 방금 말한 직원을 타박했다.

“모든 분께 잘해 드려야지 그건 또 무슨 말이라더냐.”

“하지만 이런 일을 하다 보면 모를 수가 없지 않습니까. 누가 우리를 위해 주시는지.”

직원이 자기도 알 건 다 안다며 대꾸했다.

“자기 먹을 것을 줄여서 남을 지키는 일이 어디 쉽습니까. 다른 주가 분들이 영지 일원들에게 전쟁 배상금을 거둬들일 때 그분은 오히려 자신이 써야 할 것까지 나눠 주신 분이 아닙니까.”

그런 모습을 보면 마음이 가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고.

그렇게 덧붙이는 말을 듣고 있던 지 행수가 들고 있던 지팡이 끝으로 제 허벅지를 툭툭 때렸다.

희한한 말을 한다 싶던 오전의 세화가 생각이 난 것이다.

아니, 사실은 계속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환계 칠문들에게 자신들과 같은 어중이떠중이들은 같은 종족이 아니었다.

그저 편의를 위해 부리고, 화가 나면 곧장 죽여 버릴 수 있는.

죄책감 따위조차 가지지 않아도 되는 그런 하찮은 존재였던 것이다.

뭐, 사실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었다.

지 행수 그녀는 토룡의 후손이었으니까.

무릇 적룡의 일족이라 하면 하늘을 날고, 비를 부르고, 천리안을 사용하던 이들인데.

그런 이들이 땅속을 기어 다니며 그들이 내려 주는 빗물이나 받아 마시는 지렁이 환족을 안중에 둘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지 행수는 오늘 자신에게 격 없이, 어쩌면 배려하듯 말을 건네던 세화가 조금 이상하게 보였다.

‘아니. 사실 처음부터 그랬지. 보통은 직접 대화하지 않고 시녀를 시켜 말을 전하는데 이 아가씨는 그런 것도 없고.’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그 입에 발린 말을 떠올리며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제 모습이 있었다.

만약 그 아가씨가 신영이었다면 아마 환계도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그런 불가능한 생각이 자꾸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명윤 원로님이기 때문에 더 잘해 드려야 한다는 직원을 타박하긴 했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 역시 그 아가씨가 부탁한 일을 완벽히 마치려 전전긍긍했었으니. 꼴이 우습지 않은가.

그렇게 지 행수가 피식 헛웃음을 흘렸을 때였다.

저 멀리 그들의 시야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행수님. 저게 뭐지요?”

분명 나무들로 뒤덮여 있던 곳이었는데,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부터 마치 얼음이 녹듯 주변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곧 그들이 익히 알고 있는 붉은 불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헉!! 행, 행수님, 저거, 혹시 신영의 불 아닙니까?”

지 행수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빠져나갔다.

“빨리 몸을 숨겨라. 절대 엿볼 생각들 하지 말고.”

수레고 마차고 신경 쓰지 말고 신원이 들통날지 모르는 것들만 싹 챙겨서 달아나라고. 그녀가 직원들을 향해 재빨리 명령했다.

같은 주가 일족들은 모를지 몰라도 지 행수처럼 가문이 없는 이들은 저 불길을 아주 잘 알았다.

신영의 불.

신영은 종종 납품을 위해 저택을 방문한 상단 일원이나 시종을 저 불길로 태워 죽였던 것이다.

한번 무언가에 옮겨붙으면 절대로 꺼지지 않고 대상을 뼈째로 녹여 버리고 나서야 사라지는 저 불이 왜 여기에?

하지만 일행들이 빠르게 달아나는 와중에도 지 행수는 선뜻 그 뒤를 따라 달리지 못했다.

두려움 속의 더 큰 두려움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신영은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흔적을 모두 지우고 달아났다 하더라도 결국 일이 난 근처에 제가 있었단 걸 들킬지 모른다.

같은 질문도 여러 번 하여 불시에 시험하길 즐기는 신영의 성격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아야 그 화제를 피해 갈 수 있지 않을까.

“…….”

손끝이 차가워질 정도로 긴장했으나, 그녀는 이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일행들의 방향이 아닌 불길 쪽으로 조금씩 가까워졌다.

혹여 신영의 호위병들에게 발각되기라도 할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하던지.

허나 가깝게 다가갔음에도 도통 불을 일으켰을 무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무사들은커녕 어떤 인적도 느낄 수 없이 고요했다.

‘이상하네. 뭐지? 신영의 불까지 나올 정도인데 왜 이렇게 조용한 거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지금이라도 돌아설까 고민하며 그녀가 불안에 떨던 그때였다.

길고 하얀 뭔가가 하늘에서부터 직각으로 내리꽂혔다.

콰앙-!!

신영의 불꽃과 새하얀 영력이 충돌하며, 거센 파동이 지 행수가 있는 곳을 휩쓸고 지나갔다.

“!”

하나 그 광풍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본 것 같았다. 그 불의 한가운데로 떨어진 무언가를.

믿어지지 않는 사실에, 그녀가 잠시 멈춰 섰다.

그녀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용?!’

눈앞을 스쳐 지나간 것은 분명 용의 형체였다.

‘용이 다시 나타났다고? 신수가?!’

언제 제 존재를 들키지 않는 데에만 온 신경을 쏟았냐는 듯. 조금 전과는 달리 지 행수가 빠르게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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