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영선과 영무는 주명윤이 직접 키운 호위들과 함께 조금도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석양이 내려앉을 때쯤 그들은 안가에 도착했다.
한 번도 이렇게 말을 달려본 적 없는 두 자매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있었다.
“나 아침에 밥 두 그릇 반 먹길 진짜 잘했다.”
아니면 이렇게 오랜 시간 말을 타지 못했을 거라며 영무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두드렸다.
그동안, 영선은 호위들에게 입구를 막아서 달라 부탁했다.
그리고 영무에게 눈짓하며 불 꺼진 안가 안으로 조용히 발을 디뎠다.
혹 누군가 숨어들진 않았을까 하여 기감을 세운 채 조심스레 움직였다.
저택 안은 노을빛이 길게 스며들어오고 있었으나, 너무 긴장한 탓인지 그런 밝은 저택 내부마저 어쩐지 스산하게 느껴졌다.
덥지도 않건만 숨소리마저 억누르고 있었기에 긴장한 몸에 땀이 맺혔다.
하지만 조용히 저택 내부를 돌아다녀도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몇 번을 확인해도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영무와 영선이 서로를 돌아보며 안심한 듯 미소지었다.
“아무도 없는 듯하니 결계부터 바꾸자.”
“영선이 넌 밀실로 가. 나는 아가씨께서 물건을 비축하신 창고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올게.”
같은 결계로 보호받고 있긴 했으나 안가의 본채와 창고는 거리가 좀 되었다.
서로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그들이 반대 방향의 복도로 갈라섰다.
결계를 바꾸고 나면 새 결계가 적용되기 전까지 반 각 정도 저택이 완전히 드러나게 된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을 때 빠르게 그 반 각을 넘기고 싶은 영선이 서둘러 움직였다.
여러 번의 눈속임 방을 지나 영력으로 이중삼중 잠겨진 저택의 밀실을 찾아내 들어갔다.
좁은 밀실 안에는 불그스름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결계석이 있었다.
세화에게 배운 대로 그것을 해제하자 작은 석패 모양의 결계석이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새로운 결계석을 그곳에 올리고 알고 있는 방법을 따라 조심스레 영력을 주입했다.
하나 그녀의 영력 양이 충분치 않아 그런 것인지 좀처럼 결계석이 발동되고 결계가 세워지지 않았다.
반 각이 지났음에도 결계가 발동되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를 무렵, 온전히 결계가 섰음을 알리는 붉은 빛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어찌나 안심이 되던지.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쉰 영선의 두 눈이 동그마하게 휘었다.
“좋아. 이제 돌아가자.”
해 놓고 나니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인데 너무 긴장했나 보더라고. 아가씨께서 제 부재를 아시기 전에 얼른 돌아가자고.
발걸음도 가벼워진 영선이 여러 겹으로 겹쳐진 눈속임 방을 지나 다시금 저택 안쪽으로 빠져나왔을 때였다.
바깥에 지고 있는 노을이 얼마나 선명한지, 저택 내부가 온통 불그스름하게 밝아져 있었다.
‘아니, 잠깐. ……노을이 아니야.’
노을이라기엔 너무 밝았다. 시간이 거꾸로 돌아간 것이 아니고서야 저택에 도착했을 때보다 하늘이 더 밝아졌을 리가 없었다.
당황한 그녀가 창호 문을 열어젖혔다.
그 얇은 문 한 장이 버텨 내고 있던 열기가 그 순간, 그녀에게로 화끈하게 밀려들었다.
“…….”
아연한 시선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이는 곳마다 온통 붉은 불길이었다.
* * *
창고를 확인한 영무는 아가씨가 준비한 물품들이 누군가의 손이 닿은 흔적 없이 모두 잘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창고는 무사했으나 조금 전 사라진 결계는 아직도 허공을 채우지 않았다.
‘왜 이렇게 늦어지지?’
원래대로 아무나 열 수 없도록 영력으로 창고 문에 걸쇠를 건 영무는 영선이 있는 저택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한데 달리듯 걷던 그 순간 다시 단단히 결계가 섰다.
그제야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뭐야. 별일 아닌데 우리가 너무 비장했었나 보네.”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린 영무의 발걸음이 조금 늦춰졌다.
오랜만에 온 곳이지만 안가는 결계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모든 것을 이 안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많은 것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예전에 그녀 자매들이 서로 하나씩 심었던 과실수들도 제법 커져 무성히 잎을 두르고 있었다.
커다란 연못 위로 붉은 노을이 비치는 모습과 그 위로 물고기들이 만들어 내는 파문을 잠깐 그립게 눈에 담았다.
하지만 이내 뭔가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
저택 주위로 새빨간 화마가 타오르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불길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번지며 저택을 감싸 안았다.
무언가를 생각할 새도 없었다.
황급히 제 겉옷을 벗은 영무가 연못물에 적신 그것을 머리부터 뒤집어썼다.
저택을 향해 무섭도록 빠르게 달려갔다.
* * *
저택이 보이는 나무 위에서, 서월이 입가에 터진 피를 닦았다.
혹 시간을 놓치기라도 할까 봐. 가지고 있는 회복약을 먹을 시간도 없이 달려왔던 것이다.
명윤의 호위 무사들에게 발각돼 몸싸움까지 벌어져 그녀의 몸은 지금 만신창이였다.
그 고통에도 혹여 영선이란 년을 놓치게 될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하던지.
결계가 완전히 사라진 잠깐 사이에 침투해야 했기에, 결계의 생성을 잠시 막는 영력을 유지하면서 서둘러 무사들을 처리하느라 몇 번의 공격을 허용하기도 했다.
다행히 시간에 맞춰, 그녀는 영선이 저택을 빠져나오기 전에 저택이 보이는 나무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저년을 어떻게 죽이는 게 가장 고통스러울까.’
고민하다가 서월은 신영이 그녀에게 준 붉은 구슬을 떠올렸다.
신영의 불이라 불리는 작은 구슬 안에 든 불꽃은 제게 닿는 모든 것이 다 녹아버릴 때까지 절대 꺼지지 않았다.
‘내 몸도 지금 정상이 아니니 구슬의 힘을 빌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지.’
나무 위에서 미소지은 서월이 저택 주위로 붉은 구슬을 던졌다.
구슬이 터지며 적룡의 영력으로 만들어진 불길이 천천히 솟구쳤다.
몸을 일렁이는 그 붉은 것이 저택을 완전히 잡아먹는 시간도 기다릴 수가 없어, 서월은 신영이 준 구슬들을 마구잡이로 던져 댔다. 빠져나갈 길을 완전히 막으려 한 것이다.
구슬을 모두 사용한 보람이 있어, 불길은 삽시간에 저택을 한 치의 틈도 남기지 않고 에워쌌다.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물에 젖은 겉옷을 뒤집어쓰고, 영력으로 제 몸을 보호한 채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든 것은.
그 모습을 본 서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깔깔 웃었다.
“저런 미친년이 다 있네. 제 발로 죽을 자리를 찾아가 주다니, 이리 고마울 데가.”
용의 영력으로 만들어진 불길은평범한 불길과는 전혀 달랐다. 절대로 꺼지지 않고 몸에 옮겨붙어 오래도록 극심한 고통을 겪다가 죽게 할 것이다.
‘그 장면을 직접 볼 수 있다면 더 좋을 텐데.’
하지만 뭐, 이것도 나쁘지 않다.
서월은 낮처럼 방심하지 않았다.
정말 한 치의 틈도 없는지, 정말 안에 갇힌 년들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그리고 그게 십 중 십 확실하다는 걸 확신하고 나서야 날랜 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갔다.
환한 미소가 달빛 위를 뛰어넘는 그녀의 얼굴에 가득 피었다.
* * *
사색이 된 영선의 얼굴에선 핏기라곤 보이지 않았다.
어디를 어떻게 둘러보아도 탈출할 구멍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영력으로 불길을 뚫으려 하였으나 대체 이게 무슨 불길인지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견고한 철벽처럼 저택을 감싼 채 점차 목조 저택을 좀먹으며 가까워졌다.
‘어쩌지. ……설마 이렇게 죽는 건가? 나 정말 이렇게 죽는 거야?’
격한 두려움이 차오르며 손이 벌벌 떨렸다.
각오를 했다고 생각했건만 막상 닥치니 눈 밑이 시큰거리고 주저앉고 싶어졌다.
‘아니야. 혹시 그 방계들이 아가씨를 이렇게 죽이려 했던 거라면, 아가씨께서 걸려들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야.’
이 두려운 순간에 나 혼자 있어서 다행이라고.
아무도 이 불길 속에 함께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떨리는 입술 사이로 필사적으로 저 자신에게 되뇔 때였다.
붉은 불길 너머 어떤 검은 그림자가 서 있었다.
“영선아…….”
영선의 입이 떡 벌어졌다. 황망함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가 왜 여깄어!”
“미, 미안해. 미안해…….”
영무가 답지 않게 눈물을 보이며 다가왔다.
“하지만……. 하지만 널…….”
뭐라 말하지 못해 머뭇거리는 그녀를 보며 영선이 어깨를 때렸다.
“바보야! 우리가 약속했던 걸 잊었어? 얘기했잖아! 돌아보지 말자고. 너라도 가야지. 왜 여길 들어와!”
“…….”
영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영선의 눈시울도 빠르게 달아올랐다.
어찌 모르겠는가. 발길이 저절로 움직였겠지. 그 순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겠지.
한날한시에 태어나 오래도록 떨어져 본 적 없던 그녀들이었다.
불길 속에 그런 형제를 두고 돌아선다는 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럴 시간이 없었다. 영선의 시선이 빠르게 움직여 불길이 적은 장소를 가늠했다.
“이쪽으로 와. 내가 몸으로 막을게. 옷을 벗어서 불길을 어떻게든 갈라 볼 테니 너는 그 사이를 통과해서-.”
콰앙!
후드드득!
그 순간 불길에 휩싸였어도 버티고 있던 대들보 한쪽이 대각선으로 무너져 내렸다.
뒤이어 떨어진 잔해들이 혹시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모르는 불길 앞을 완전히 가로막아 버렸다.
둘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이건…… 방법이 없었다.
영선과 영무의 참담한 시선이 마주쳤다. 아마도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주의하고 조심한다고 하면서.
……그러면서 이런 결과를 만들어 버리다니.
되돌릴 수 없는 현실에 영선의 턱이 잘게 떨렸다. 후회가 폭풍처럼 밀려들었다.
“그러니 너희는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반드시 살아야 해. 알겠지?”
결국 영선의 눈에서도 눈물이 터져 나왔다.
입술을 깨물며 떨림을 참아 낸 그녀가 천천히 바닥으로 꿇어앉았다.
저택이 있는 쪽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얼굴이 흠뻑 젖은 영무 역시 저택 쪽을 향해 절을 했다.
“내가 너희들을 잃게 하지 마. 내게 너희를 잃는 그 비참함을 결코 알게 하지 마.”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제가 어리석어…….”
영선이 얼굴을 적시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더 이상 모실 수 없을 듯하여 정말 죄송합니다.”
“죄, 송합니다. 아가씨. 죄송해요.”
남은 사람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을까. 얼마나 슬플까. 이것만이 걱정이었다.
“영선아. 나 아침에 밥 두 공기 반 먹길 잘했어. 그치.”
얜 대체 이럴 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영무의 실없는 말에 온통 눈물로 범벅을 하고도 잠시 웃음이 났다.
다정한 자매.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마지막 순간엔 본능처럼 제게로 와 주었다. 돌아갈 수 없는 길임을 알면서도.
“……영무야. 나, 네가 내 자매로 태어나 줘서 너무 좋았어.”
“나도. 나도 그래. 나도.”
“우리. 아가씨랑 함께, 넷이서 그동안 너무 행복했지?”
“즐겁지 않은 날이 없었지.”
빠르게 다가온 불길이 그들의 발치까지 몰아닥쳤다.
이글거리는 불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피부까지 파고들었다.
뜨거워서, 너무 뜨거워서 어디로든 몸을 피하고 싶었지만 피할 곳이 없었다.
하여 그들은 서로의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적셔진 얼굴마저 뜨겁게 불길에 달궈지며 곧 눈을 뜨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아, 아가씨가 너무 슬퍼하시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영채도.”
“우리, 흑, 명계에서 같이 기다리자. 먼저 환생하지 말고.”
“응. 그래서 언젠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영채랑 아가씨 오시면. 그때 같이…….”
끼기긱.
반은 땅으로 고꾸라지고 반은 천정에 아직 매달려 있던 대들보 끝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그곳으로 향했다가 다시 서로에게로 돌아왔다.
“나, 나 사실은…….”
영선이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곧 이어질 끔찍한 고통을 예감하며 일그러진 얼굴 위로 거침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나, 네가 여기 와 줘서 너무 고마워.”
혼자 있지 않아서.
너무 무서운 이 순간에 혼자가 아니어서.
그들이 서로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끊어질 듯 세차게 몸을 끌어안았다.
그 순간이었다.
불길에 휩싸인 대들보 끄트머리가 무너지는 지붕과 함께 그들의 위로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