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녀가 아이를 보며 달래듯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니. 사연주 아가씨는 내가 꼭 달래서 우리 저택에 묵으시게끔 할게. 절대 네가 연주 아가씨를 시중들 일 없도록.”
“헉. 차, 참말이십니까?”
“그래. 대신 그러기 위해선 네 도움이 필요하니 날 좀 도와주렴. 중산 어른과 연주 아가씨가 함께 만나기로 한 안가가 어딘지 네가 아니?”
모릅니다, 하며 고개를 저은 아이가 변명했다.
“저, 저는 그저 중산 어른께서 서신을 받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을 뿐인걸요.”
“형보 네가 장소를 모른다고 하면 사연주 아가씨를 우리 저택에 묵으시게 하기 어려워진단다.”
“하, 하지만.”
“나는 꼭 사연주 아가씨를 만나야 하고 너는 아가씨의 시중을 들고 싶지 않으니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니?”
“……어떻게요?”
“지금 나와 함께 중산 어른이 머무시는 곳으로 가서, 네가 내게 어떻게든 안가의 소식을 전해 주는 거야. 그럼 내가 연주 아가씨를 만나 우리 저택으로 모시마.”
“…….”
“잘 생각해 보렴. 그렇게 되면 너는 아가씨의 시중을 들다 매질을 당할 일도 없고, 나는 사연주 아가씨를 뵙게 되니 서로 좋은 일이 아니냐.”
“하지만 명, 명윤 원로님의 서신이 없이 돌아간다면…… 또 단단히 혼이 날 터인데…….”
“그건 내가 잘 말해 줄게. 너만 보내면 믿지 않으실까 봐 함께 왔다고 하고.”
“그, 그래도 될런지…….”
영선의 제안에 아이가 머뭇거리며 대답을 망설였지만 이미 표정에선 승낙의 기색이 엿보였다.
“그럼 지금 가자. 아. 그 전에 잠깐. 혹시 모르니 호위를 몇 데리고 가자꾸나.”
문가로 다가간 영선이 지나가는 이를 붙잡아 저택의 무사 셋을 데려오라 일렀다.
영선이 아가씨의 심복임을 아는 주가 무사 셋이 그녀의 부름에 빠르게 모여들었다.
“오셨군요. 세 분께서 저와 함께 해 주실 일이 있습니다.”
무사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영선이 아이에게 손짓했다.
“이리 오렴. 호위분들도 오셨으니 빨리 출발하자.”
“아, 알겠습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그렇게 하렴.”
다리를 절며 다가온 아이가 염려스러운 얼굴로 하고 대답하던 그 순간이었다.
영선이 제 곁을 지나치는 작은 소년의 머리카락을 단번에 잡아챘다.
“아악!!”
머리 가죽이 쥐어뜯기는 고통에 아이가 비명을 내질렀다.
세 자매 중 가장 체구가 큰 그녀였다. 깡마른 아이가 당해 낼 힘이 아니었다. 작은 몸이 뒤로 휙 넘어가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절룩이는 아이의 다리를 걷어차 일어날 수 없게 만든 그녀가 마른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
퍽!
분명 손바닥으로 쳤음에도 마치 북이 터지듯 강렬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가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떨고 있는 사이 영선이 호위를 보며 말했다.
“해 주실 일이 이겁니다. 지금 당장 이놈의 입을 막고 사지를 결박해 광으로 끌고 가세요. 무사분들도 더 불러 주시고요.”
아이를 내려다보는 영선의 눈빛엔 일말의 동정심도 들어 있지 않았다.
혹 동정심을 가지는 무사가 있을까 봐 그녀가 한 번 더 못을 박았다.
“살려 두지 않을 놈이라 생각하고 다루시면 됩니다.”
* * *
명윤이 직접 키워 낸 무사들은 명령에 두 번 묻거나 상대가 어리다고 방심하는 법이 없었다.
장정 셋이 일사불란하게 달려들어 소년의 입을 막고 사지를 결박했다.
너른 저택의 구석, 한적한 광에 도착하고 나서야 아이를 바닥에 팽개치듯 내려놓았다.
아이의 얼굴은 핏기가 빠져 완전히 창백했다.
광에 들어서 등 뒤로 문을 닫아거는 영선을 보며 덜덜 떨었다.
“누, 누님. 대체 제가 왜. 제가 감히 아가씨들에 관한 질문을 드려, 그, 그래서 이러시는 겁니까?”
영선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치세요.”
어느새 넷이 늘어난 무사들 중 다섯이 입구를 단단히 가로막고 섰다.
두 명의 무사들은 작은 몸의 소년을 가차 없이 장대로 내리쳤다.
장대가 작은 몸에 내리꽂힐 때마다 소년이 울음을 터뜨리며 비명을 질렀다.
“악!! 제발 살,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심문도 없이, 영선은 그저 무사들이 형보를 때리게 두었다.
한참 만에야 천천히 손을 들어 멈추게 했다.
오래도록 고통에 허덕이며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던 아이가 울먹였다.
“대, 대체 왜 그러시는지 이유라도-.”
“치세요.”
둔탁한 매타작이 또다시 이어졌다.
작은 등과 팔다리에선 피가 터졌고 이로 물어 피범벅이 된 입술 역시 벌벌 떨렸다.
하나 그 여리고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도 영선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제 아가씨께서 사연주를 때릴 때도 그랬지만. 얼마 전 용마루 위에서 무섭도록 예리한 모습으로 활을 쏘시던 아가씨를 보며 영선도 느낀 바가 많았다.
벌레 한 마리조차 쉬이 죽이지 않으시던 분이 그들과 똑같은 생명들을 가차 없이 벌집으로 만들어 죽이셨다.
거기서 영선은 제 아가씨의 각오를 알 수 있었다.
이미 아가씨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영선 역시도 그런 아가씨의 수족을 자처하는 이상, 해 보지 않은 일이라고 뒤로 물러서거나 동정심을 들먹이며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영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가씨와 아가씨가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사람들의 안위였으니까.
그걸 위해서라면 더한 악귀의 짓도 누구보다 먼저 자청해 해내야 했다.
다시금 지옥 같은 고통이 쏟아져 내리자 아까부터 펑펑 울던 아이가 신음 같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제, 제발. 누, 누님 아니, 아가씨. 제발…….”
그 애원에 영선이 손을 들어 매질을 멈췄다.
아이는 말을 할 기력도 없는 듯 보였으나 뭐라도 말하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거라 여겼는지 갈라진 목소리를 쥐어짰다.
“혹, 혹 제 질문이 거슬려서 이러시는 것입니까? 그러시다면 제가 정말 잘못하였으니-.”
“…….”
“그, 그것도 아니라면…… 혹, 혹시 아까…… 제가 말실수를 한 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건 그냥 제가 어렸을 때 가졌던 말버릇으로-.”
“아니. 네가 스스로를 형보라 부르든 다른 이름으로 부르든. 내게 별로 변명할 필요는 없다. 난 네가 중산 어른의 명을 받고 이 저택에 발을 디딜 때부터 이럴 생각이었으니까.”
“……네?”
“너를 뭘 믿고 가만두겠니. 네가 뭘 할 줄 알고.”
“아, 아가씨!”
“네가 우리를 속이러 들어왔든 그게 아닌 평범한 아이이든 간에 어차피 너는 이렇게 되었을 거라는 말이야. 뭐, 그래도 죽이기 전 내가 밥은 든든히 먹여 주지 않았니.”
“!”
형보가, 라는 말을 되뇌며 영선이 조금 웃었다.
“하지만 네가 그런 말실수를 했을 땐 나도 조금 긴장했지. 일이 틀어졌다고 생각해 달아나기라도 할까 봐. 무사분들을 자연스럽게 불러야 했으니까.”
입만 뻐끔거리던 아이가 그제야 영선이 진심임을 알아보았는지 사색이 된 얼굴로 대꾸했다.
“절, 절 죽, 죽이시면, 그러면 중산, 중산 어른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네 다리를 부러뜨린다는 그 어른이? 글쎄. 네가 죽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을 마친 영선이 무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아이는 아가씨께서도 보실 것입니다. 달아나거나 아가씨께 위해를 가할 수 없게, 다리를 부러뜨리든 반 불구로 만드시든 상관없으니 거동이 불가능하게 만들어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영선이 광 문을 열었다.
잠시 돌아서서 아이를 힐끔 곁눈질하자, 그녀를 바라보는 핏기 하나 없는 시선이 보였다.
“네가 아무 잘못 없는 아이라면 미안하단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이름으로 지칭하는 이들은 종종 보았으니 그 자체는 특별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나 그걸 굳이 그 찰나에 정정한 아이의 그 모습이 가장 수상했다.
영선은 제 아가씨의 일에 아주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마음이 없었다.
필요하다면 무고한 저 아이를 죽여서라도.
“너는 그런 아이는 아닐 듯하니 다행이구나.”
영선이 등 뒤로 광 문을 닫았다.
“제, 제발! 아, 아가씨! 영선 아가씨!”
퍽퍽!
가늘어지는 틈 사이로 또 한 번 장대로 내리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소년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듣는 귀가 없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하며 영선이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 * *
“뭐?”
영선의 급한 모습에 빠르게 다가왔던 영채와 영무는 이어진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안가에 다녀오겠다니.”
“그래. 그놈도 광에 가뒀다며. 사연주 얘기도 당연히 거짓말이겠지. 그년은 지난번 일로 신영께서 밀실에 가두셨는데 거길 어떻게 빠져나와 서신을 썼겠어.”
“그래. 방계 원로들은 아직 사연주의 소식을 모르니 미끼로 쓴 거겠지.”
자매들의 말에 영선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사연주는 안가에 걸린 결계를 어떻게 깨는지 알고 있잖아. 방계 원로들도 혹 사연주에게서 그걸 알아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
“그러니 안가에 다른 이가 드나들 수 없도록 지금 결계를 바꿔야 해. 그곳에 있는 물품들은 모두 아가씨께서 중히 사용하실 것들이니까.”
망설이던 자매 중 영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들이 안가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이미 결계도 확인했을 거야. 무슨 짓을 해 놨을지 모르는데 괜히 갔다가 인질로 잡혀서 아가씨께 누가 되면 어떡해.”
“하지만 그곳에 있는 물품들은 어쩌고. 약초와 곡식이야 다시 구하면 된다지만 환석 같은 경우엔 시중의 모든 환석을 다 쓸어 왔잖아.”
“그, 그건…….”
“단 한 개도 빼놓지 말고 모두 사들이라고, 아가씨께서 반복해서 강조하시던 걸 기억하지? 분명 꼭 필요하신 것일 텐데, 그걸 그들이 숨기거나 하여 아가씨께서 제때 사용하시지 못하게 되면. 그래서 중요한 일을 그르치게 된다면 그땐 어떡해?”
“그래도 아가씨께 여쭤보고 하자. 방해하지 말라시는 걸 보면 급한 용무 중이신 것 같으니 일단 말씀이 끝나는 걸 잠시 기다렸다가-.”
“아니야. 지금 가는 게 좋겠어. 아가씨께서 모르실 지금.”
영선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저를 바라보는 자매들을 보며 물었다.
“여쭤보고 만약 아가씨께서도 안가에 가져다 둔 물품들을 가져와야겠다고 하시면. 하여 결계를 당장 바꿔야 한다고 하시면 우리 중 누굴 보내실 것 같니? 그것도 신영과 소가주의 미움을 산 지금.”
“…….”
“누구도 위험하게 하고 싶지 않아 분명 직접 하시겠지. 너희도 알잖아.”
그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럼 같이 가.”
영무가 불쑥 말했다.
깜짝 놀란 영선이 그런 영무를 만류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너흰 아가씨 곁에 남아 있어야지.”
“아니야. 혼자 가는 것보다는 둘이 가는 게 나아. 혹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아가씨에게 소식을 알릴 수 있으니까.”
영무가 무섭도록 진지하게 말을 덧붙였다.
“생각해 봐. 우리에게 일이 생긴다면 그게 무슨 일인지, 누가 범인인지, 아가씨는 분명 아셔야 해. 그러려면 둘이 필요해.”
“…….”
“영무 말이 맞아. 다만 너희도 이건 알아야 해.”
영선이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영채가 결연하게 덧붙였다.
“그 위험한 길에 너희가 함께 갈 거라면. 절대로 둘 중 누군가가 위험한 상황에서도 서로 구하러 들어가선 안 돼. 둘 다 잘못되는 상황을 만들면 절대 안 돼.”
영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건 비단 이번 일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야. 앞으로의 모든 일에 마찬가지야.”
“좋아. 그럼 약속하자. 그 무슨 일이 생겨도, 우린 서로의 목숨조차 돌보지 않는 거야. 어떻게 해서든 혼자라도 돌아가 아가씨의 곁을 챙겨야 한다, 이 생각만 하기. 알았지?”
마주 본 세 쌍의 눈동자가 같은 찰나에 눈을 깜빡였다.
비밀 장소에서 결계석을 하나 꺼낸 영선이 그것을 품에 넣었다.
그동안 영무는 몸이 날랜 호위 여섯 명을 불러 준비를 마치고 다가왔다.
영채가 불안한 얼굴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꼭 돌아와야 해. 우린 아가씨 곁을 지켜야 하니까.”
“당연하지. 결계석만 바꾸고 금방 돌아올 거야.”
“그래. 그러면 다녀와. 몸조심하고.”
영채의 배웅을 받으며 영무와 영선이 호위 여섯을 데리고 인적이 드문 길을 골라 비밀스럽게 떠나갔다.
그 뒷모습을 영채가 걱정스럽게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 * *
너른 저택의 외진 곳에 위치한 광 안은 몹시도 조용했다.
이중삼중의 걸쇠로 막은 어두운 광 안에 피범벅이 된 소년이 앉아 있었다.
아이의 몸을 결박했던 밧줄은 어느새 모두 풀려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소년의 입술이 고통과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년이…….”
메마른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그년을 그 저택으로 보내려고 했다 해도 참지 말 것을.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혹시 상황을 방관할지 몰라 일부러 말실수인 척 수상한 모습을 보여 그 저택으로 끌어들이려 했던 것인데.
그년의 손속이 이리 가차 없는 줄 진작 알았다면 다른 방법을 꾸몄을 것이다.
“그저 그런 잡일 하는 계집이겠거니 했더니 이런 사갈 같은 모습을 갖고 있을 줄이야.”
퉤, 하고 바닥으로 피 섞인 침을 뱉어 낸 소년이 연신 욕설을 뱉었다.
짜증스럽게 상황을 한탄하다가 제 다리에 침을 꽂았다.
절뚝이던 다리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긴 침들이 이번엔 얼굴과 목에 꽂혀 들었다. 그러자 소년의 골격이 조금씩 바뀌어 갔다.
아주 미세한 차이였으나 그 미세한 차이들이 모이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비루한 소년의 외형은 어디 가고 곱고 가녀린 여성의 외형이 드러났다.
“감히 이 서월에게 이런 식으로 고통을 줘?”
하나 그 가녀린 여성의 시선 속, 흉측하게 들끓는 살기는 누구든 몰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영의 일, 중요하지. 한데 그 년도 용서할 수 없어. 절대.”
입술을 끌어 올린 서월이 피가 범벅된 입술을 사납게 닦아 내며 내뱉었다.
영선이라는 년을 지금 당장 찾아내 목을 자르고 혀를 뽑아 내고 싶어 마음이 절절 끓었다.
그 갈망이 핑계를 만들어 냈다.
“그래. 세화 그년을 납치하기 전에 그년이 아끼는 것들을 먼저 죽이는 것도 재미있겠어.”
슬픔에 젖어 경계심에 빈틈이 생길 수도 있는 거고. 절망 가득한 세화 년을 데리고 갈 수 있을 테니 신영께서도 더 좋아하실 거라고.
형형히 눈을 빛낸 서월이 소리조차 내지 않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