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254)

사중산의 안색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그, 그 무슨. 말도 안 된다. 호위를 백 명이나 죽였는데 신영께서 가만히 계셨다고?”

“그게 또 사정이 복잡합니다. 자세한 상황은 한번 알아보십시오. 명윤 원로께서도 일이 심각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대문을 막으신 것이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고요.”

눈을 가늘게 뜬 사중산이 영선의 얼굴을 면면이 살폈다.

“너 혹시 나를 이대로 돌려보내려고 수를 쓴 거라면 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오전에 이미 행수들이 들락날락했다는 것도 알고 있어!”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권역을 돌아다니는 주씨 중 누구를 잡고 물어보셔도 같은 말을 할 겁니다. 온 주씨들이 다 몰려든 상태에서 그 난장이 펼쳐졌으니까요.”

영선이 다시 생각해도 소름 끼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의심이 가신다면 그 행수라도 불러 직접 물어보십시오. 저희는 곡식만 샀습니다. 혹여 또 다른 사달이 날까 두려워 백가 일원 쉰넷을 먹이는데 소홀할 수가 없어서요.”

누구든 불러 제발 물어보라는 말에 사중산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뭐, 뭐지? 이거 괜히 온 것 아닌가.’

일단 제가 대표로 먼저 명윤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것인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괜히 내가 먼저 왔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모두 뒤집어쓰게 될 것 같은데. 나도 이만 돌아가고 명윤을 들쑤시는 건 다른 놈을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미친 백가 놈들이 주가의 영역에서 벌써 백 넘게 살육했다니.

신영께서도 말리지 못한 거라면 일이 정말 위험한 것은 아닐까 덜컥 걱정이 들었다.

‘이 등신 같은 놈은 왜 그런 말을 먼저 고하지 않고.’

어쨌거나 제가 먼저 나설 일은 아니라고 판단한 사중산이 그를 따라온 일행 중 누군가를 불렀다.

“형보야. 이리 오거라.”

그 손짓에 일행 중에서 몸집이 왜소하고 다리를 저는 소년 하나가 조용히 빠져나왔다.

“그럼 이놈을 두고 갈 테니 명윤 원로께서 시간이 되실 때 이놈을 통해 내게 서찰을 주시게 하여라. 내가 어디 있어도 이놈은 알 테니.”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영선이 더 말을 보태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우리 쪽 사람을 써서 서신을 전하겠다는 얘기는 먹히지도 않을 테니까.

“네, 그러십시오. 원로 어르신께 그대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형보 네놈은 일을 똑바로 하거라. 알겠느냐! 아니면 지난번에 부러뜨리지 않은 다리 몽둥이를 이번에야말로 부러뜨릴 테니.”

“……예, 어르신.”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소년을 보며 사중산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이내 소매를 털며 일행을 끌고 멀어졌다.

그런 사중산을 보며 영선 역시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보라고 했니? 너, 안에 들어가면 말을 조심하고, 있으라 한 곳에만 있어야 한다. 알겠느냐.”

“예, 아가씨.”

“아가씨는 무슨. 영선이라 부르면 된다.”

“네. 영선 누님.”

눈앞의 소년을 영선이 가만히 보니 이미 많이 흐려졌으나 맞은 듯한 자국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자신들도 방계면서 환계의 이런 아이들에겐 가차 없이 잔혹하게 굴다니.’

소년은 한 번도 시선을 올려 영선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영선이 자신을 어떻게 할까 봐 겁을 먹은 것 같지는 않았고, 그저 조금의 심기도 거스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오래 종살이를 해 온 이들이 이런 태도를 보이곤 했다.

“나이가 몇이니.”

“올해 열여섯이 되었습니다.”

“열여섯? 그 몸으로?”

깡마른 소년은 체구도 왜소해 열둘이나 되었을까 생각했건만.

그 순간 소년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소년도 당황한 듯 황급히 배를 가렸으나 소리가 연달아 흘러나왔다.

“중산 어른의 명이 있다고는 해도, 저택에 들어오는 이들은 모두 조사를 거쳐야 한다. 일단 밥을 줄 터이니 이후 내가 묻는 말에 너는 감추지 말고 세세하게 대답하거라. 알겠느냐.”

“네. 영선 누님.”

“좋아. 가자.”

영선이 형보를 이끌고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시선을 들지 않는 소년이 앞서가는 영선의 발치를 바라보며 절뚝이는 걸음을 옮겼다.

* * *

백기하는 오전 내내 신중하게 말을 고르며, 제 기준에서 과거를 설명하려 애썼다.

세화의 입장을 섣불리 제가 대변하려 했다가는 일이 잘못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지극히 조심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고민했던 그는 국경에서 세화를 처음 만났던 그 날부터 말을 꺼냈다.

믿기 힘든 이야기일 텐데도, 주명윤은 한 번도 백기하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닫아걸었던 창밖이 서서히 밝아지고, 또 환해졌다가, 다시 점차 노랗게 변해 갈 즈음에서야 주명윤은 긴 침묵을 깨고 몇 가지를 물었다.

“허면, 제 딸은 오 년간 갖은 고문을 받다가 살해되었단 말씀입니까?”

“그 오 년에 대해선 말씀드렸던 대로입니다. 직접 보진 못했고 이후 알게 되어 구하려 했으나 구하지 못했습니다.”

“소원을 사용한 탓에 당신은 더 이상 불사가 아니고요.”

백기하는 대답 대신 제 손톱에 영력을 넣어 손목을 강하게 그어 내렸다.

주명윤은 전장에서 마주쳤던 상황을 통해 이 신수가 얼마나 빨리 상처를 회복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피는 쉬이 멈추지 않았고 힘주어 상처를 손으로 누르고 기다린 후에야 간신히 느리게 붙기 시작했다.

“…….”

그 모습을 확인한 주명윤이 다시 한번 길게 침묵했다.

이내 무섭도록 낮아진 목소리로 한 가지를 더 물었다.

“그 모든 실종 사건이…… 정말로.”

단단히 맞잡은 무장의 손이 미세한 떨림을 반복했다.

“정말로…… 신영의 짓인 겁니까.”

백기하는 대답 대신 가만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질문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 아이들을 잡아먹고…… 영력을 취한 거라고요.”

흔들림 없는 백기하의 시선에서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된 무장이 눈을 감았다.

가는 숨이 그의 입술 사이로 흐르다 멈췄다.

이를 악물 듯 한동안 무언가를 참아 내는 무장을 백기하는 조금 안쓰러운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온 무언가가 실은 조금도 그럴 가치가 없었다고 한다면.

때로는 가족조차 돌보지 않고 내달렸던 그 길이 절벽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하면 어떤 느낌이 들게 될까.

백기하는 그가 삶을 놓은 듯한 얼굴로 일어서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감겼던 눈이 다시 뜨였을 땐, 어떤 매서운 결단이 그 안에 맺혀 있었다.

“백가주. 혹 제 부탁도 하나 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말씀하십시오.”

백기하가 탁자에 몸을 기대며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저는 그것을 위해 이곳에 온 것입니다.”

* * *

세화는 방 안에 앉아 적룡의 영단을 지켜보고 있었다.

주가 내에서 가장 진한 핏줄을 가진, 가장 강한 영력의 소유자.

이것이 신영의 조건이었다.

‘이 영단을 흡수할 수만 있다면 일이 가장 간단해질 텐데. 아무도 반대할 수 없도록 내가 신영의 자리에 오르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역대 신영들도 그렇고, 억지로라도 이 영단을 삼키고 싶었을, 힘과 권력에 눈이 시뻘게진 지금의 신영도 해내지 못했으니.

‘이걸 흡수하는 데 어떤 조건이 필요한 건가?’

그녀가 그렇게 작고 붉은 영단 하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추측을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그녀의 방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백기하였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아버지와 무슨 일로 이리 길게 말씀들을 나눈 거예요?”

“……일단. 미장 어른께서 그대도 함께 부르셨으니 잠시 함께 가자.”

“나까지요?”

아버지가 그와 자신을 함께 부르신다고?

“얘기가 길어질지 모르니 주변에 미리 방해하지 말라 일러두고.”

……일러두기까지 하라고?

‘대체 무슨 일이기에?’

순간 당황스럽기도 하고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당장 무슨 일인지 먼저 얘기해 보라 닦달하고 싶었지만 말해 줄 만한 것이었다면 그가 먼저 언질을 주었을 것이다.

이젠 그런 믿음이 있었다.

“알았어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세화가 영무와 영채를 불렀다.

당분간은 그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일러두고는 백기하의 뒤를 따랐다.

* * *

영선은 형보라는 아이를 다른 하인들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챙겨 주었다.

방계 어른이 데리고 온 아이였기에 혹 아이가 간자의 역할을 할까 조심했기 때문이었다.

마냥 의심하기에는 아이가 너무 말랐고 학대의 흔적이 분명했다.

얼마나 배를 곯았는지 허겁지겁 음식을 입에 쑤셔 넣으면서도 연신 꼬르륵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도 영선은 방심하지 않았다.

아이가 식사를 천천히 마칠 시간마저 주지 않으며 꼼꼼히 신상을 캐물었다.

지금은 아가씨께서 큰일을 도모하시는 때가 아닌가.

큰 둑을 무너뜨리는 것은 아주 작은 구멍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중산 어른을 모셨는지. 피부에 남은 멍 자국들은 혹 체벌을 받은 것인지. 받았다면 왜 받았는지. 가족은 있는지.

혹 거짓으로 대답하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을 한 뒤 저 질문을 했다가. 다시 했던 질문을 반복해 보기도 했다. 일종의 시험이었다.

기습적인 질문에 아이는 때로 더듬거리긴 했다.

하지만 아주 사소하고 이상한 것을 물어도, 또 한참 만에 다시 물어도, 똑같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짧지 않은 조사가 끝난 이후 영선은 아이가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고 잠시 머물 수 있는 곳을 배정해 주었다.

그녀의 눈에 수상한 곳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한 번 더 조심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그곳으로 걸어가기 전이었다.

아이가 몹시 머뭇거리다가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영선 누님.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도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뭔데?”

“저기 그게…….”

“편히 말해도 괜찮다. 뭔데.”

“……저, 연주 아가씨께선 왜 이곳에 계시지 않고 중산 어른의 저택에 오시는 것입니까?”

“……뭐?!”

“사연주 아가씨 말씀입니다. ……아. 제가 감히 높은 분들의 일에 참견을 놓으려는 건 절대 아닙니다. 저는 그저 그분이 중산 어른의 저택에 오신다면 얼마나 오래 계시게 되는 건지. 그것이 궁금하여…….”

영선이 놀란 표정을 간신히 갈무리하며 평온하게 되물었다.

“연주 아가씨가 중산 어른에게 연통을 보내셨니?”

“네. 오늘 명윤 어른의 안가에서 만나기로 하셔서.”

아이의 내리깐 시선엔 두려움이 선명했다.

“그분이 오시면 항상 제가 시중을 들게 되는데. 실수를 할 경우 그게 저…… 너무, 너무 아프게 때리셔서…….”

자기가 똑바로 일하지 못한 결과이니 무슨 체벌을 하셔도 전혀 불만은 없다고.

하지만 안가를 알고 계시면 그곳에 머무르시면 되는 것 같은데 왜 꼭 중산 어른의 저택에 오시는 건지.

그것이 너무 궁금한데 어디 물을 곳이 없어, 영선 누님께 여쭤보는 것이라고.

너무 꾸짖지 말아 달라 부탁하는 아이를 영선이 단단한 시선으로 응시하다 물었다.

“다시 한번 말해 봐. 사연주 아가씨가 오늘 명윤 어른의 안가에서 중산 어른을 만나기로 했다고?”

사연주는 명윤의 모든 안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가엔 지금 셀 수 없이 많은 곡식과 약초들, 그리고 환석이 쌓여 있었다.

제 아가씨께서 하시는 일에 중히 쓰이게 될 바로 그 물품들 말이다.

“정확히 말해야 할 거다.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나 또한 널 가만두지 않겠어.”

영선의 물음에 겁먹은 형보가 서둘러 대답했다.

“저, 정말입니다. 제가 왜 그런 걸로 거짓을 말씀드리겠습니까. 중산 어른께서 그 계집애가 사람을 귀찮게 한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형보가 분명……!”

잠시 표정을 굳힌 아이가 제 말을 정정하며 덧붙였다.

“제가 분명 들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