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궁금하여 왔습니다.”
“…….”
“제 여식의 부탁을 백가주께서 들어준 것인지, 아니면 백가주의 요청을 제 여식이 들어준 것인지 하는 것을 알아보러요.”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마저도 들릴 듯 방안이 고요했다. 숨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둘 모두가 긴장한 채 서로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백기하가 한참 만에야 천천히 몸을 돌렸다.
단단한 노장의 시선은 어떤 거짓도 허용하지 않을 것처럼 날카로웠다.
“대답해 주시지요.”
백기하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새어나갔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
혹, 사정을 전부 말해야 한다면 그걸 내가 해도 되는 걸까?
하나만은 분명했다.
지금 저 노련한 무장에게 거짓을 말하게 된다면, 그로 인해 잃은 신뢰는 아마도 평생 회복할 수 없을 거라고.
‘그녀는 아직 제 아버지에게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말할 준비가 되지 않은 듯한데.’
말로는 평생을 신영의 충복으로 산 아버지이기 때문에 상황을 받아들일 시간을 드리고 싶다 하였으나 백기하는 그런 말에 속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무서운 거야.’
아버지가 그녀의 반대편에 서게 될까 봐.
혈족들을 죽이고, 주가를 뒤엎을 계획을 세우는 그녀를 말리며,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일을 바로잡을 방법이 있을 거라고.
그런 잔인한 짓은 하지 말라고. 그런 말을 듣게 될까 봐.
평생을 올곧게 산 아버지가 수십, 수백의 피를 가차 없이 손에 묻힐 각오를 하는 그녀를 지금과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될까 봐.
그것을 아는 그는 지금 어떤 말들을 꺼내야 하는 것일까.
가만히 주명윤과 시선을 마주치고 있던 백기하가 어둠 속을 천천히 걸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담담한 시선들이 허공에서 엮였다.
모든 것을 쉬이 대답할 수 없던 백기하가 조용히 물었다.
“일단, 제가 먼저 여쭙고 싶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모든 것을 인정하는 그 한마디에 주명윤이 눈을 질끈 감았다.
* * *
아침부터 세화의 저택엔 발 디딜 틈 없이 뭔가가 들어차며 분주했다.
너른 마당을 오전 시간 내내 분주히 오간 지 행수가 염려 섞인 목소리로 세화에게 물었다.
“한데 아가씨. 정말로 이걸 다 사실 겁니까?”
“음.”
“저야 팔아 주시면 정말 좋지만…….”
세화가 일전 예장을 구입하며 행수에게 특별히 주문한 것들이 오늘 온 것이었다.
하지만 뭐가 걱정인지 행수는 좀처럼 정산을 마쳐 달라 요구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행수가 그녀의 옆으로 조금 더 다가와 속삭였다.
“배상 때문에 구입하시는 거라면 홀로 이러실 필요 없으십니다. 다른 원로들은 명윤 원로님의 반의반도 재산을 내놓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결정을 취소하시고 다른 원로들을 더 추궁해 보시면 어떨까요.”
주씨들은 위세가 대단해서 같은 주씨, 적어도 방계 혈족이 아니고서야 말도 제대로 섞으려 하지 않았다.
때문에 주씨에게 감히 조언을 한다는 것은 지 행수에게도 제 목숨을 내놓는 행위가 될 수 있었다.
물론 명윤 원로와 그 일가들이 이런 일로 누군가를 몰아치는 성격은 아니라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말이다.
그 말에 세화가 잠시 지 행수를 응시했다.
산전수전 다 겪어 온 행수였으나, 세화가 대답이 없자 심기를 상하게 한 건가 싶어 순간 두려움이 덮쳐들었다.
“전 그저…… 홀로 너무 고생하시는 듯하여……. 혹 제가 기분을 상하시게 했다면…….”
그녀의 긴장을 알아본 세화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런 것이 아니야. 조금 놀라서. 누구도 내게 그런 말을 해 주진 않았으니까. 신경을 써 줘서 고맙네.”
“……예?”
“지금까진 그 정도 언질도 내게 해 준 이가 없었으니까.”
세화가 지 행수를 보며 빙긋 미소지었다.
빛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그 모습에 노련한 행수의 눈가가 순간 미미하게 붉어졌다.
“지금 우리 사정이 이리된 것을 알면서도 변함없이 나를 존중해주고 편을 들어 주려는 것이 고맙지. 그러니 앞으론 어떤 말도 어려움 없이 해 줘. 그것마저 내겐 도움이 될 테니.”
화나 내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건만. 생각지도 못한 말에 행수의 귓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아닙니다! 저야말로……. 아니, 저는 별말씀 드리지도 않았는데…….”
뭘 어째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우왕좌왕하던 행수가 대답했다.
“저야말로 행수에게 그런 말씀을 해 주시는 혈족분은 처음 봅니다. 이러실 필요 없으세요.”
“필요가 있고 없고를 왜 자네가 정해. 내가 이리 한자리에 앉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도 다 환계 칠문을 누비며 여러 물자를) 전달해 주는 자네 같은 이들 덕분인데. 그 편의를 보아준 이에게 고맙단 말 한마디 건네는 게 뭐가 어떻다고.”
그 말을 하면서도 세화의 시선이 먼 곳으로, 어둡고 힘들었던 기억 속으로 날아갔다.
“나도 자네 기분이 상하지 않는다면 하나 말해 주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럼요. 뭐든 말씀하십시오.”
“별건 아니지만, 가능하다면 그런 말에 괜찮다는 말은 하지 말게. 고맙다고 누가 말하면 그저 받아줬으면 하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바꾼 세화가 지 행수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내 겸양이 때로는 나의 가치를 깎아 낸다는 걸 나도 몰랐지 뭐야. 고맙다는 말에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고, 미안하다는 말에 난 괜찮다는 대답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말이네.”
바로 전생의 그녀처럼.
모든 일이 그녀만 참고 견디면 다 잘될 줄 알았던 그때처럼.
“혹여 누군가가 자네에게 그런 말을 하게 만들었다면 그들이야말로 가치 없는 자들이니. 그런 이들의 말에 휘둘리지 말았으면 해.”
지 행수는 대답이 없었다.
“물론 이 모든 말이 지금까지 그저 편하게 자라온 내 자기만족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그래도 자네나 나나 똑같은 환족이니까.”
이 모든 말들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나 다름없었으나, 세화는 침묵한 채 그녀를 보고 있는 지 행수의 모습에 쓰게 웃었다.
“고생했어. 그리고 하나만 더 부탁하지.”
자신의 일이 생각나 너무 오래 말을 덧붙였다. 쓸데없는 참견을 한 것 같다.
“뭐를 부탁하려는 거냐면.”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는 행수의 눈빛은 조금 전과는 살짝 달라져 있었다.
짧은 대화가 잠시 이어졌다.
“해 줄 수 있겠어?”
그 물음에 지 행수가 낮은 목소리로 결연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일도 아닙니다. 며칠이면 됩니다.”
“고마워. 일이 끝나면 연통을 넣어 주게. 오늘은 고생 많았어.”
조심해서 돌아가라 인사하고, 세화는 새로 구입한 것들을 쌓아 놓을 창고를 만들기 위해 돌아서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지 행수가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 * *
지 행수에게서 구매한 것은 수많은 곡물과 약초들이었다.
이미 말라 있어 보관에 어려움은 없었다.
허나 오전 내내 쌓인 포대들이 어찌나 많은지. 하인들이 모두 달려들었음에도 운반하는 데 한낮이 다 갔다.
목록별로 일일이 장부에 적어 넣고 확인하며 영무가 물었다.
“헌데 아가씨, 곡식과 약초들은 대체 왜 이렇게 많이 사신 거예요? 안가에도 엄청 옮겨 놓으셨잖아요.”
세화가 웃으며 대답했다.
“배상이 끝나고 우리가 가난해지면 너희 먹을 밥 없을까 봐 미리 사 둔 거지.”
“아가씨도 참. 저희가 아무리 잘 먹어도 이 정도는 못 먹어요.”
영무가 영채를 붓끝으로 지적했다.
“너야 너. 너 때문에 저런 말씀을 하시는 거야. 너 오늘 아침에도 밥 세 공기나 먹는 거 내가 봤어.”
“참나, 누가 들으면 자긴 두 공기 반 아니고 한 공기만 먹은 줄 알겠네.”
그 사이 세화가 소매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보다 너희 모두 이거 하나씩 받아.”
“이게 뭔가요?”
손안에 놓인 것은 목걸이였다.
금사를 두껍게 모양을 내어 꼰 줄에 얇고 새하얀 돌 조각 같은 것이 매달려 있었다.
“와. 반짝이는 게 마치 세공 자개 같네요.”
“예뻐?”
“네. 너무 예쁜데요!”
“잘됐네. 너희 주려고 하나씩 구했어. 목에 걸고 있어.”
“아까 지 행수가 가져온 것인가요? 이런 선물을 주실 줄은 까맣게 몰랐어요.”
세화의 말에 세 자매는 이게 뭔지 더 묻지도 않고 목에 걸었다.
너무 예쁘다고, 똑같은 목걸이를 셋이서 건 그들이 서로를 보며 웃었다.
“헌데 아버지와 백가주께선 무슨 일로 그리 바쁘셔서 이 시간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는 거지? 두 분 모두 저택에 계신 건 맞아?”
“그럼요. 무슨 일이신지 얘기가 길어지고 계신 듯하여 방해하질 못했어요.”
“……그래. 아, 어쨌건 그 목걸이는 꼭 옷 안에 숨겨서…… 어. 뭐지?”
그때 저택의 문가가 시끌시끌해졌다.
무슨 일인가 싶은 세화와 세 자매의 시선이 정문으로 향했다.
상황을 알아보고 오겠다며 영선이 문가로 다가갔다.
진입을 막은 하인들에게 삿대질하고 있던 누군가가 그런 영선을 발견하고 손짓했다.
“너! 너 잘 왔다. 영선이 네가 설명을 해 보거라. 지금 이놈들이 왜 우리 앞을 막아서는 것이냐!”
녹빛 비단 장포를 입고 제일 앞에 선 이는 명윤의 방계 원로들 중 한 명이었다.
올 것이 왔다.
표정을 감춘 영선이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중산 어른 오셨습니까. 한데 어찌 저택 쪽으로 오셨습니까. 혹 소식을 듣지 못하신 것입니까.”
“소식?”
“여기서 이러시다가 백가 무사들에게…….”
목소리를 낮추며 말하던 영선이 누가 들을까 겁난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내 “이쪽으로 오십시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며 먼저 저택 문을 나가 길 한편으로 섰다.
그 행동에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 올린 사중산이 영선을 따라갔다.
“뭐냐. 뭔데 이리 유난을 떠는 것이야?”
“혹시 지금 저택에 백가주와 백가 재상, 백가 기마단 쉰두 명이 머물고 있다는 것은 알고 오신 겁니까?”
사중산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고작 그걸 말하려고 이런 곳까지 온 거냐? 그게 무슨 상관이냐. 고작 그 정도 인원으로 주가 영역의 한복판에서 무슨 짓을 하겠다고!”
“그리 말씀하실 게 아닙니다. 어제 백가주께서 신영의 호위 일백을 사냥터에서 쳐 죽이셨는걸요. 신영이 보시는 앞에서요.”
“……뭐, 뭐?”
“그 전에 또 백가 재상은 주가의 무사들 수십 명을 활로 벌집을 만들어 죽이셨고요. 저희 저택에서요.”
“!!”
“하여 명윤 원로 어르신께서 어쩔 수 없이 대문을 닫아거신 겁니다. 계속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차 전쟁이 시작될 수도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