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254)

* * *

어느 비탈진 산기슭, 부엉이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퍼져 갔다.

때때로 나뭇잎이 서로의 몸을 비비며 스산한 존재감을 만드는 그곳에 가문의 문장도 찍히지 않은 너른 저택이 있었다.

커다란 나무들이 둘러싼 저택엔 횃불 하나 세워진 것이 없었다.

깜깜한 저택 위로 하늘 한 부분을 커다랗게 차지한 노란 달이 한가득 달빛을 뿌려 댔다.

그 저택의 안쪽, 너른 별실에 수십 명의 노인들이 제각각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아무도 어떤 말도 하지 않는 그 사이로, 한참 만에야 기다리던 발소리가 들려왔다.

곧 한 복면인이 모습을 드러내며 고두했다.

“왔구나. 알아보았느냐.”

“네. 그 영무란 년이 했던 말이 맞습니다.”

“맞다고?”

“신영께서 세화 아가씨에게 소가주님과 혼인하라 두 번이나 명하셨는데 그것조차 거절했다고 합니다.”

노인들이 일제히 탄식을 뱉었다.

“그년이 정말 실성을 했구나.”

“가문의 일원들을 모두 위험에 빠뜨리는 것도 정도가 있지. 하, 어찌 그런 참담한 일을 벌여.”

“그럼 그때 신영의 반응은 어떠셨느냐.”

“저는 고작 신영의 저택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미천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 제가 어찌 감히 신영의 상황을 함부로 입에 올리겠습니까.”

“대략적인 것이라도 좋다. 뭔가 아는 것이 있다면 얘기해 보아라.”

“제가 감히 그분을 입에 올려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짐작하신 대로 당연히 참담함에 말조차 잇지 못하실 정도였고 소가주님의 분노 또한 하늘을 찌르셨습니다.”

누군가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거 이러다 신영께서 명윤을 쳐내기로 마음먹기라도 하시면 어찌합니까. 덩달아 우리도 쳐내지는 거 아닙니까.”

“무슨 그런 헛소리를 해! 신영께서 이리 친히 자기 사람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만으로 이미 대답이 되거늘.”

“그래도 세화 그 아이뿐 아니라 명윤의 행동도 가관이지 않습니까. 딸 간수도 제대로 하지 않고 그자부터 완전히 미쳤나 본데 이걸 대체 어째야 합니까.”

“우리가 먼저 세화의 목을 따서 신영에게 드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이가 침묵을 지키자 덩달아 한마디씩 말을 보탰다.

“신영을 위해서도 그런 일을 그냥 넘겨선 안 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비록 사씨이긴 하나 주가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얼마나 노력해 왔습니까.”

“그런 노력으로 간신히 중차대한 임무들을 맡게 되었는데,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리게 놔둘 수는 없지요.”

처음엔 제 안위를 걱정하듯 두려움 섞여 있던 말들이, 이어지는 동안 점점 더 빨라졌다.

생각해 보니 내심 지금 상황이 기회다 싶고 기쁜 것이다.

주명윤은 주가의 일원으로 볼 때는 나쁘지 않은 사내였다.

무슨 일에든 솔선하는 버릇이 있어 그들이 물러나 있는 동안에도 알아서 제 살을 깎아 모든 위험을 막아 주었으니까.

헌데 본가의 주인으로 마주할 때는 그보다 더 까다로운 상대가 없었다.

집안을 이끄는 데 있어 어찌 청렴결백한 방법만 사용할 수 있을까.

일에 따라 불의와 타협할 수 있는 융통성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헌데 주명윤이라는 사내는 그런 상황을 일절 용납하지 않았다.

그저 집안의 머리를 잘못 둔 죄로 방계인 그들은 다른 주가의 핏줄들처럼 환계의 어중이떠중이들을 갈취하지도 못했다.

종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마저 막아서고 참견했기에 그것들을 사용해 수익을 내지도 못했다.

다른 방계들이 온갖 방법으로 재산을 불리며 기반을 만들 때마다 그들은 손가락만 빨며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언제까지 우리만 이렇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주명윤은 전장으로 나간 지 오래고 그들은 그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일을 꾸몄다.

다행히 그런 그들의 행동을 나쁘지 않게 보신 신영께서 친히 그들을 중용해 주시던 찰나인데 이런 일이 터지다니.

‘진작 주명윤 그 작자를 죽였어야 했는데.’

수많은 결심에도 불구하고 결정적 한 방을 치지 못한 것은 전시에 보여 준 모습 때문에 주명윤의 명망이 날로 높아져 갔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렇게 인망을 얻게 될수록 그를 몰아내기 어려워진 방계 쪽 원로들의 심기는 나날이 불편해졌다.

그런 와중에 와 준 기회였다.

주명윤이 아무리 인망이 있다 한들 신영의 눈 밖에 난다면…….

가장 상석에 있던 노인이 드디어 입을 열고 목소리를 꺼냈다.

“그러면 할 수 있지. 그러면 주명윤을 죽이는 데 조금도 망설일 이유가 없고말고.”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건 어떻게 생각해 보면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를 기회였다.

바늘구멍만 한 가능성이어도 상관없었다. 그동안은 이런 것조차 갖지 못했으니까.

크기가 작으면 어떤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벌리고 들어가면 그만인 것을.

입술을 씰룩대는 이들의 시선이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빛을 받은 듯 번뜩였다.

“그럼 연주 그년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밀실에서 어떤 꼴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안 봐도 뭐, 지랄 맞은 모습으로 길길이 날뛰고 있지 않겠습니까.”

“돕는 손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일단 꺼내 보시죠.”

“그까짓 년이 무슨 일을 돕겠습니까. 제 분을 못 이겨 날뛰다가 큰일을 그르치기만 할걸요.”

“그렇게만 보실 게 아닙니다. 큰 그림을 보셔야지요. 그간 주명윤이 보통 단단한 벽이었습니까.”

“맞습니다. 단번에 일을 치기보다 작은 돌을 여러 번 던져야 합니다. 그래야 파편이 튀고 금도 가고. 이후 우리가 던질 거대한 바위 한 방에 나자빠지는 거지요.”

상석에 앉아 있던 원로장이 그 모든 말들을 듣다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일단.”

노인의 얇은 입술이 열리자 너른 방안이 씻은 듯 고요해졌다.

“지금은 일단 신영께서 명하신 올해의 할당량을 채워야 한다. 아직 몇이 부족하지 않으냐.”

할당량이라는 말에 다른 원로들의 안색이 제법 어두워졌다.

“연주 그 아이는 피도 깨끗한 편이고 영력도 그만하면 작지 않다. 게다가 곧 탈피를 앞두고 있으니 조건에 잘 맞지. 하여 그 아이의 혈통서를 신영께 보내 드리는 것으로 사연주의 처분을 결정지으려 한다. 이의 있는 자가 있느냐.”

“……뭐. 그렇게 하시겠다면.”

“없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좋다. 그리고 주명윤에 대해서는.”

노인의 눈이 제 앞에 부복한 복면인에게 향했다.

“네가 우릴 좀 도와야겠다. 허면 이후 신영께 보고할 때 네 공을 꼭 잊지 않고 함께 아뢰어 주마.”

“…….”

“걱정하지 말아라. 네 입으로 신영과 소가주의 분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느냐. 명윤을 끌어내 잘 처리한다면 너도 이리 잔심부름만 하며 지내진 않게 될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작은 몸집의 복면인이 고두하며 대답했다.

“대신 꼭 제 공도 빠뜨리지 마시고 아뢰어 주십시오.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당연한 것을. 좋아. 좋구나.”

몸집은 소년처럼 아주 왜소하건만.

결연하게 대답하고 고개를 들어 올리는 복면 속의 눈빛은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소년을 보는 노인들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혹 더 음험하고 흉흉한 감정들이 그 안에 들끓고 있었다.

* * *

백기하가 세화의 방에서 나왔을 땐 아침이 그리 멀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다.

밝아진 하늘로 시간을 가늠한 그가 곧장 백호의 모습으로 변용했다. 인기척을 느끼는 데는 이 모습이 더 제격이었으니까.

돌아가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뭔가 계속 아쉽기만 해서, 불빛 없는 문 앞에서 백호는 커다란 발로 계단을 툭툭 쳤다.

배웅하듯 따라 나왔던 세화가 조금 나무랐다.

“그리고 당신, 이제 이렇게 오면 안 돼요. 알았죠? 자꾸 밤늦게 내 방 앞을 왔다 갔다 하면 아버지께서 곧 알아차리실 거예요.”

‘이젠…… 오지, 말라고?’

대답하기 힘든 말에 거대한 백호의 귀가 순간 아래로 처지려는 찰나였다.

“낮에 미리 언질 주면 내가 지난번 그 언덕으로 가 있을 테니 다음부턴 그렇게 해요.”

“!”

“……밤에 보는 그곳 정경이 그리 나쁘지 않으니까요.”

백호가 심해처럼 새파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머뭇거리던 세화가 잠시 손을 뻗었다.

생각보다 더 보드랍고, 보는 것보다 더 긴 하얗고 검은 털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얽혀 들었다.

사람의 모습이라면 하지 못할 테지만 짐승의 모습이니까.

그러니까 괜찮다고 자신에게 변명하며 세화가 백호의 털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잠시 이마를 댔다.

이 부드러운 감촉이 어쩌면 이렇게도 안도감을 들게 하는 것일까.

그 감촉을 기억한 그녀가 저를 빤히 바라보는 푸른 눈을 응시하며 눈가에 촉, 입을 맞췄다.

“이따, 봐요.”

“……!”

“같은 저택에 있으니 이건 좋네요. 이따, 봐요.”

작별 인사를 끝낸 그녀의 모습이 서둘러 나무 문 안쪽으로 사라졌다.

허나 그 이후에도 백호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조금 기다려 줘요.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다 끝마칠 때까지만요.”

“나도 그날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이따, 봐요.”

눈가가 붉어진 채로 속삭이던 그녀의 얼굴이 연신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게다가.

촉. 눈을 감은 채 빠르게 눈가에 입술을 누르던 그 표정이라니.

‘……허미.’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날카로운 얼굴을 한 백호의 발걸음이 허공에 뜬 듯 가벼이 공중을 날아갔다.

아 그럼. 그럼 그럼.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지.

기다릴 수 있고말고.

그에겐 남들보다 더 긴 시간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양손으로 잡아야 간신히 잡힐 거대한 꼬리가 경쾌하게 흔들렸다.

그래도 본채가 있는 허공을 가로지를 때는 세심하게 기척을 죽였는데, 그와 다른 백가 일원들이 머무는 별관 위를 지날 때는 또 기척이 풀려 버렸다.

“이따, 봐요.”

도대체 이 말이 왜 이리 잊히지 않고 계속 떠오르는 건가.

‘아차. 가져온 것을 그냥 주고 올걸. 깜빡 잊었네.’

그녀가 혼사에 대해 잊어버린 줄 알고 실망해 소매 안에 더 깊이 넣어 두었다가, 이어진 말에 깜짝 놀라느라 잊어버린 것이다.

“이따, 봐요.”

‘그래. 급할 거 있나. 그녀의 말대로 이따 만나서 주면 되는 거지.’

이럴 때가 아니었다.

이 예장은 이미 보였으니 이후엔 다른 예장을 해야 했다.

‘또 뭘 입지. 만용이가 조금 더 다채롭게 가져왔다면 좋았을 텐데, 몇 벌 가져오질 않아서. 차라리 서둘러 옷을 좀 맞출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가벼이 포석을 밟고 방으로 들어설 때였다.

‘!!!’

빛 한 점 없는 어두운 방 안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가만히 문가를 응시하던 주명윤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딜 다녀오시는 길이십니까. 한밤 내내.”

“……커헝.”

그 소리를 뱉고 나서야 제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자각한 백기하가 서둘러 변용했다.

다시 한번 하려던 말을 했다.

“……미, 미장 어른.”

“혹시 제 딸을 만나고 오시는 겁니까?”

“…….”

너무 당황해 표정은커녕 안색조차 사라져 버렸다.

백기하의 머리가 빠르게 제가 할 대답을 찾으려 했지만, 쉬이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야 하나, 아니라고 해야 하나.

‘……괜히 변용했다. 그냥 백호의 모습으로 있을 것을.’

그러면 제 상태가 뭔가 이상하다는 변명이라도 하며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라도 있었을 텐데.

“어찌 대답이 없으십니까. 제가 괜한 오해를 하여 주인도 없는 방에 들어오는 무례를 범하기라도 한 겁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기서 무릎이라도 꿇고 백가주께 사죄드리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무슨 그런 참담한 말씀을 하십니까.”

마른침을 삼킨 백기하가 언제 잠겼는지 모르게 잔뜩 가라앉은 목을 서둘러 가다듬었다.

“저야 원로 어르신의 덕에 기대 저택의 한 부분을 빌려 쓰는 처지가 아닙니까. 이 별관까지도 모두 원로 어르신의 소유이신데 못 오실 곳이 어디 있다고요.”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그의 모습을 주명윤은 그렇다 아니다 대답도 없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헌데 어르신. 어찌 이리 어두운 데 계십니까. 등이라도 켜고 계시지 않고요.”

시선을 피하고 싶은 백기하가 일단 불을 켜겠다는 핑계로 몸을 돌렸다.

등, 등이 어디 있더라. 성냥은 또 어디 있더라.

있는 곳을 뻔히 알면서도 변명을 생각해야 하는 그는 엄한 곳만 뒤졌다.

가라앉은 미장의 목소리가 그런 그의 등을 향해 흘러나왔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왔는데, 계시지 않더군요. 그래서 기다렸습니다.”

“물으실 것이라니, 그게 무엇입니까? 혹시 세화 아가씨와의 얘기라면-.”

“그것이 아닙니다. 그저 어제 일 말입니다. 그 사냥터에서의 일.”

‘아.’

혹시 호위를 도륙한 일을 책망하려 하시는 건가.

설핏 굳어진 몸을 다시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백기하가 적당한 대답을 찾으려 애쓸 때였다.

평온한 목소리가 그런 그의 등 뒤로 이어졌다.

“그거 혹시 제 여식과 백가주가 짜고 함께 벌인 일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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