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254)

3장.

하늘엔 모처럼 보름달이 예쁘게 떴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맑은 달빛을 푸르른 정원에 퍼부었다.

풀벌레 소리가 정취 있는 풍경 사이를 흘렀다.

모처럼 호숫가의 연꽃들도 바람에 살랑이며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뿌려댔다.

선선한 바람과 아름다운 풍경에 창문이 열린 방이 많았다.

하나 어떤 침실만은 창문을 꼼꼼히 닫은 것도 모자라 덧창까지 끼웠다. 안에서 나는 소리를 숨기기 위함이었다.

불 꺼진 세화의 침실에선 숨죽인 신음만이 그 방 안에 누군가가 있음을 알렸다.

“……으. 흐.”

영력을 몸 밖으로 전부 빼냈다 삼키기를 반복한 결과였다.

머리끝까지 솟구친 열은 시야를 어지럽혔다. 예민해진 피부는 부드러운 비단 침의의 감촉마저 날카롭게 받아들였다.

쉬이 사라지지 않는 고통에 세화가 잔뜩 웅크렸다.

그럼에도 제가 영력을 쏟아부어 치료해 준 세 자매나 아버지가 듣기라도 하실까 봐.

그녀는 신음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이불로 제 몸을 꼭꼭 덮어 가렸다.

그녀는 오늘 사냥터에서 최덕문이 육가 연합에 붙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을 그대로 사용했다.

영력을 영단으로 만들어 몸 밖으로 전부 빼내면 무사들의 기감에서 완벽히 사라져 버릴 수 있다.

영력은 목숨과도 같아 아무도 한계까지 빼내질 않기에 누구도 이 방법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그녀도 육가연합 무사들이 전쟁의 승패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로 먼저 시도해 보지 않았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허나 이 방법은 환족의 영혼이나 마찬가지인 원신을 크게 상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지난 생에, 부모님들이 그녀에게 영력을 주려다 원신을 상했던 그때처럼.

한두 번은 위험을 감수할 만해도 여러 번 쓸 수 있는 방법은 결코 아니었다.

땀방울이 하얀 이마 위에 송골송골 맺혀 들었다. 가늘게 신음을 흘리는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몸이 약해지니 거친 악몽이 그녀를 뒤덮었다.

그렇게 혼몽을 헤매이고 있을 때였다.

어떤 커다란 손이 웅크린 그녀의 몸을 조용히 도닥였다.

“괜찮아. 쉬이. 괜찮아.”

그렇게 달래며 달아오른 이마를 어루만졌다.

‘아…….’

서늘한 바람이 곁을 맴도는 것 같았다.

몸이 점차 시원해졌다.

열이 가라앉으니 온몸을 두드리던 통증과 깨어질 듯 아프던 머리의 고통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녀는 매달리듯 제 몸을 둘러싼 것을 부여잡았다. 그러고 있는 동안에는 모든 것에 안심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이 점점 편안해졌다.

이윽고 긴 잠에 빠져들었다.

* * *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는 제가 누군가의 품속에 안겨 있다는 걸 깨달았다.

커다란 손이 일정한 속도로 평온해진 그녀의 몸을 다독이고 있었다.

그녀는 침상에 올라와 있는 그에게 반쯤 앉듯이 기대어 있는 상태였다.

이 사람이 누군지 모를 수가 없었다. 익숙한 수목향이 코끝에 와 닿고 있었으니까.

가늘게 뜬 시야에는 남자다운 모양새로 뻗어 올라간 턱선과 울대가 선명한 단단한 목이 보였다.

시선을 조금 올리자 한 번도 다른 곳을 바라본 적 없는 듯한 짙푸른 눈과 마주쳤다.

마치 늘 그래왔던 것처럼, 당연한 듯 그의 입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피할 시간을 주고 내려왔으나 피하고 싶지 않았다.

체온을 재기라도 하듯, 열이 식은 이마에 마른 입술이 닿았다.

못내 아팠을 때 옆에 있어 줬기 때문일까.

촉. 촉. 반복해서 내려앉는 그 가벼운 입맞춤에도 눈가가 뜨끈해지고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했다.

“열이 식었어. 다행이야.”

이마에 이마를 기댄 숨이 얽히는 자리에서 속삭였다.

“아프지 마.”

“…….”

“이제 두 번 다시, 아프지 마.”

생김은 아주 냉정해 보이는데.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이처럼.

헌데 그녀를 보는 눈빛만은 늘 이리 다정하다. 채 다 숨겨지지 않는 애정이 짙푸른 눈 속에 벅찰 정도로 담겨 있었다.

‘어째서. 왜, 왜 나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 시선을 결코 잃고 싶지 않았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제 것과 마주한 그의 눈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그녀가 먼저 입술을 겹쳤다.

그가 단번에 반응했으나, 아팠던 그녀를 배려함인지 이번 입맞춤은 지난번만큼 격하거나 힘겹지 않았다.

높아진 체온으로 절절 끓었던 입안을 식혀 주려는 것처럼 부드럽게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 살덩이가 예민한 안쪽 살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그녀의 치열을 더듬고 혀뿌리를 헤집으면서부터는 또다시 열감이 뒤섞였다.

축축한 습기가 호흡에 섞이면서 창백했던 입술에 핏기가 올랐다.

“다정하게 입 맞추고 싶은데.”

거칠어지는 숨을 비집고 그가 목소리를 꺼내 들었다.

“그대와 닿고 나면, 그게 잘 안 돼.”

그녀의 입가와 볼, 티 없는 턱선을 따라 떨어지던 입술이 목덜미를 빨아 당겼다.

일순 소름이 돋았다. 몸이 곧장 움츠러들었다.

그는 마치 아이를 추스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의 몸을 다시 한번 고쳐 안았다.

삼키고 싶은 듯 빨아들였던 목덜미에 입술을 누르고, 다시 한번 올라와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뜨거운 호흡을 감고 파고든 그의 혀가 다시 한번 그녀의 치열을 더듬었다. 혀뿌리를 감아 제 안으로 끌고 가 헤집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제 욕망을 삼켜낸 그는 세차게 진동하는 울대를 내보이면서도 입술을 떼어냈다. 그런 후 열이 식은 얼굴 위에 가볍고 보드라운 입맞춤을 반복했다.

그는 아픈 그녀를 배려하는 듯했으나 그녀도 아쉽긴 마찬가지였다.

입술을 뒤엉킬 뿐인 이 행위가 어째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걸까?

더 하고 싶었다. 더 피부를 맞대고, 더 힘주어 서로를 끌어안고-.

아쉬움이 그득한 목소리가 갈라진 채 귀를 파고들었다.

“안 돼. 나도 더 하고 싶지만 그대는 아팠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벌써 새벽이라.”

‘새벽? 그게 무슨 상관…… 아!’

한순간에 정신이 들었다.

힘 있는 팔에서 벗어나 창가로 달려간 그녀가 창문을 열어젖혔다.

하늘 끝부터 색이 연해지고 있었다. 동이 트는 것이다.

“!!”

돌아선 세화가 침상 위에 편안하게 기대앉은 백기하의 팔을 끌어당겼다.

“자매들이 내 시중을 들기 위해 올 거예요. 당신이 여기 있던 것이 아버지께 알려지면 분명 사달이 날-.”

“괜찮아. 신수의 모습으로 빠져나가면 기척을 숨기고 돌아갈 수 있어.”

밤새 그녀를 다독여 준 사람 같지 않게, 의복에 작은 구김조차 가지 않은 그가 일어섰다.

전에 그녀를 만나러 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예장 차림이었다.

“괜찮아. 안 들키고 갈 수 있어. 그러니 이리 와 봐. 조금은 시간이 있으니 그대 영력이 안정됐는지 한 번 더 살펴보고 돌아갈게.”

“이젠 괜찮아요. 가벼워졌어요.”

“한 번 더 볼게. 이리 와 봐.”

“…….”

“어서.”

그녀가 머뭇거리며 다가갔다.

염려스러운 얼굴을 지우지 못한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영력을 흘려 넣었다.

뜨끈한 무언가가 손목을 통해 스며들어와 몸속을 돌아다녔다.

“밤새 영력을 불어 넣었지만, 기혈이 아직 불안정해. 이렇게 위험한 방법은 두 번 다시 쓰지 마.”

“그렇게 위험하진 않아요. 세 자매가 나를 따라 영력을 빼고 넣고를 반복해서, 그것까지 치료해 주느라 그런 거예요. 그들까지 아프게 할 순 없으니까.”

그는 할 말이 많다는 얼굴이었으나 더 말을 보태진 않았다.

“속이 진탕되거나 몸이 아픈 느낌은 없고?”

고개를 끄덕인 세화가 되물었다.

“그나저나 당신은 또 왜 옷을 그렇게 입고 있어요?”

왜 예장을 하고 있냐는 질문이었는데 그는 제 차림이 뭐가 이상하냐는 얼굴이었다.

“어제 사냥터에서 입었던 옷은 티가 조금 묻었잖아?”

피범벅이 됐다는 얘기를 고상하게도 했다.

“아니, 내 말은 왜 침의가 아니라 정복을 다시 입었냐고요. 혹시 어제 내가 방에 있는 새 어디 다녀왔어요?”

그는 처음 보는 연한 하늘색에 금사로 수놓은 장포를 입고 있었다.

머리도 얼마나 가지런히 빗어 묶었는지 쉬려는 이가 아니라 이제 막 외출하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장포에 놓인 수와 색이 같은 금색 비단 끈으로 머리를 묶으니 얼굴이 얼마나 헌헌하게 보이던지.

“아, 당연히 이렇게 입어야지. 중요한 순간인데. 더 좋은 옷을 입으려고 했는데 가져온 게 마땅치 않더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 그는 소매 안쪽으로 손을 넣은 채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불쑥 물었다.

“음, 그 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우리에 대해서. 그러니까 그대와 나.”

“??”

무뚝뚝한 표정 사이로 눈가가 조금 붉어진 그가 시선을 다른 곳에 둔 채 물었다.

“아직 두 형님들이나 장부인께서 저택에 오지 않으셨으니 지금 뭘 하긴 힘들겠지?”

“네?”

“게다가 여긴 주가의 영역이기도 하니까. 그래도 백가에서 해야 내가 준비할 시간도 있고 그래야 더-.”

“?? 하다니. 뭘요? 백가행 환송연을 얘기하는 거예요?”

“응?”

세화의 의문 가득한 표정에 백기하가 잠시 굳어졌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는 세화의 반응이 어쩐지 그가 예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라서.

“아니 내 말은 그대가 소가주에게 나와 혼…….”

“…….”

“혼…….”

“혼, 뭔데요?”

“……아닌가?”

“??”

“……아니군. ……그래.”

백기하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소매 안에 넣어 가지고 온 것을 다시금 안쪽으로 처넣은 그가 별말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어쨌거나 사냥터의 일이 실패했으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알았을 거야. 이제부터 그대를 강제로 끌고 가려 할지 몰라. 조심해야 해.”

“응. 알아요.”

“차라리 빨리 백가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우리 쪽에서 인질을 더 서둘러 데려가길 원한다는 식으로 조건을 조정해서. 미장 어른과 장부인, 형님들까지 함께 모셔가면.”

“의심 많은 신영이 그렇게 하게 둘 리가 없어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우리 가족 중 누군가는 잡아 두겠죠. 그래야 저나 아버지께서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테니.”

‘다행인 건 그래도 앞으론 내게 혼사를 명하진 못할.……아!’

혼사.

그제야 백기하가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은 세화가 제 무심함에 혀를 찼다.

그걸 말하려던 거구나.

“아닌가. ……아니군. ……그래.”

그 실망스럽던 목소리를 생각하니 갑자기 심장이 뛰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조금도 기다리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대화의 맥락과 조금도 맞지 않음에도. 아까 했던 말에 대해서, 라고 화제를 다시 돌릴 시간도 없이.

“그리고 혼사는 ……조금만 기다려 줘요.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다 끝마칠 때까지만요.”

시선을 내리깐 그녀가 양손을 긴 소매 안에서 꼭 맞잡은 채, 속삭이듯 제 마음을 처음으로 꺼내 놓았다.

“나도 그날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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