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월의 몸에서 기분 좋은 향이 풍겼다. 그걸 맡고 있으니 온몸이 노곤해지는 것 같았다.
“그간은 후계 수업을 해 주시지 않았으니까. 그런 건 탈피하고 나서 해도 되는 거라며 기다리게만 하셨지.”
서월의 낮은 웃음소리가 영롱하게 흘러나왔다.
“신영께서는 그저 소가주님께서 조금이라도 더 편안한 유년 시절을 보내길 바라신 거예요.”
“알지. 그 깊고 다정한 마음을 내가 어찌 모르겠어. 하나 오늘 백가주를 보고 나니…….”
“왜요. 백가주가 무엇을 했습니까?”
주경현의 내리감은 눈꺼풀 안쪽으로는 낮부터 무언가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각인되듯 박혀 버린 백기하의 잔상이었다.
사냥터 안에서 휘몰아치던 영력. 그것을 다스리는 부드러운 몸놀림. 그 힘. 검술. 위용과 풍채까지.
어느 하나 놀랍지 않은 것이 없었고, 감탄과 탄식을 흘리다 못해 이를 갈 정도로 부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도 하루라도 빨리 탈피를 해야 할 텐데.”
그러면 모두의 눈을 한순간에 사로잡은 저 위엄 있는 모습이 제 모습이 될 수도 있을 텐데.
“곧 하실 것입니다. 서월도 온 힘을 다해 도울 것이에요. 헌데 그럼 오늘 사냥 대회는 어찌 된 겁니까? 세화 아가씨와는 어찌 되셨고요?”
주명윤이 얼굴을 팍 일그러뜨렸다.
“세화 그년 얘기는 이제 하지도 말아라! 그딴 얼굴만 반반한 년. 이제 내 발밑에 엎드려 받아 달라 빌어도 사절이다!”
“허나 신영께서 직접 선택한 소가모이신데, 소가주님께서 잘 달래서 데려오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서월도 세화 아가씨가 오신다면 너무 기쁠 거예요.”
“…….”
그 말에 주경현의 시선이 잠시 기억을 유영했다.
“이것은 주가의 일인데 응당 자네가 마무리해야지. 그러니 어서 와서 이자들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게. 주가의 위용을 세우고 본보기를 보일 수 있도록.”
‘내가 신영이 되고 나면 존대를 하고 머리를 조아려야 할 새끼가. 어디다 대고 감히 가르치듯이.’
주경현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그 의견엔 동의했다.
주가의 배신자들을 찾아낸 것이자신이니 응당 마무리 역시 제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검을 뽑아 든 주경현이 더 이상 달아날 수 없는 백 명의 옷을 갈랐다.
문양이 없는 이가 없었다.
“하!”
죽자사자 달아나는 모습에서 짐작하긴 했으나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게 된 그가 잔인하게 그들의 남은 팔다리를 마저 잘라 냈다.
퍽!
퍽!
그의 온 얼굴과 의복에 거센 피보라가 튀어 올랐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백기하에게 밀렸던 제 위용을 세우기 위해 잔학한 학살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굴어야 했다.
그렇기에 매일 얼굴을 마주치고 어깨를 두드리곤 했던 이들의 사지를 갈가리 찢어 명만 붙여 놓았다.
마음이 약한 아버지는 차마 그 광경을 지켜보지 못하시는 듯했다.
“……이제, 뒤는 네가 알아서 하여라.”
그 말만을 남겨 놓고 사냥터를 지키는 무사 몇과 함께 그 자리를 떠나려 했다.
“아버지,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또 뭐냐.”
“이렇게 된 이상 사냥터를 지키던 무사들도 조사해야 합니다. 그놈들이 어디 더 숨어 있을지 모르는데 지금이 지나면 문양을 없앨지도 모르니까요.”
“너……! 너…….”
그때 백가 재상이 다시 한번 끼어들었다.
“신영, 소가주께서 더없이 영민하십니다. 이 시간이 지나면 놈들에게 정체를 숨길 시간을 벌어 주는 꼴이 될 것이니 지금 한 놈이라도 더 발본하여 세력을 줄여야 합니다. 소가주님의 말씀을 가납하여 주십시오!”
“아버지. 잠시 확인만 하면 됩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한데 그 말을 끝내고 무사들을 부르는 순간 그놈들 중 몇 놈이 또다시 죽기 살기로 달아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주경현은 백가주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몸에 문양이 있는지조차 확인하지 않고 놈들을 쳐 죽였다.
그런 후 확인하니 역시나 몸에 문양이 있었다.
아버지는 충격을 많이 받으셨는지 더 말씀조차 하지 않았다.
얼굴을 일그러뜨리신 채 그대로 자리를 뜨셨기에, 난장이 된 사냥터를 정리하는 것 또한 소가주인 그의 일이었다.
피가 낭자한 시신들을 치우며 관객들을 해산시키려 할 때, 모여들었던 이 중 누군가가 물었다.
“한데 오늘 경합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는가. 상황을 보면 뻔한 것이지.
눈썹을 구긴 주경현이 “보시다시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경합은 다음에 다시-!”까지 외쳤을 때였다.
주명윤의 부축을 받으며 앉아 있던 주세화가 “잠시만요, 소가주님.”하고 말을 끊었다.
“뭐냐.”
“그 선언을 하시기 전에 이걸 먼저 보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녀의 손짓에 세화의 시녀 중 하나가 말에 매달린 짐에서 무언가를 꺼내왔다.
“!”
“약에 당하기 전에 제가 이걸 먼저 발견하여 잡았는데 어찌할까요.”
시녀가 들고 온 것은 삼각형 머리에 꽂힌 화살이 선명한, 작고 새빨간 뱀이었다.
주가의 영역, 그중에서도 이 신영의 사냥터에서만 드물게 발견할 수 있는 홍아사였다.
“너, 네가 어떻게 이걸.”
몹시 작고 빠른 데다가 위기가 닥치면 땅으로 빠르게 파고드는 습성이 있어 잡기가 쉽지 않았건만.
고아 먹으면 영력을 증진시키는 효과가 있는 데다가 오직 이 숲에서만 터를 잡는 통에 이곳이 신영의 사냥터가 된 것이다.
‘아니. 난다 긴다 하는 놈들도 잡기 힘든 홍아사를 이년이 어떻게?’
지켜보는 사람들의 입에서도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맙소사. 저거 홍아사 아닌가요? 나 처음 봐요.”
“세상에. 노련한 사냥꾼들도 잡지 못해 신영께서도 주기적으로 무사들을 투입해 잡으신다는 홍아사를 저 아가씨가 대체 어떻게…….”
“아. 소가주님께서는 살해 위협까지 받아 정신이 없으셨으니, 원로댁 아가씨가 뭘 잡아도 공정한 승부는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저거라면…….”
일제히 수군대기 시작한 그 모든 말들을 주경현도 듣고 있었다.
“이건 오늘 하루 힘드셨을 소가주님께 바치겠습니다. 신영의 사냥터에서 잡은 귀물이니까요.”
세화가 천천히 걸어와 손톱만 한 머리에 정확히 화살이 박힌 홍아사를 주경현의 발치에 내려놓았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경합은 없던 일이 되는 건가요?”
그렇게 물으며 둥글게 휜 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 속에 담긴 조롱을 주경현은 정확히 알아보았다. 힘껏 쥐어진 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계집애는 그에게 경고를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작은 홍아사의 머리를 맞힐 정도로 궁을 다룰 수 있다고.
그러니 만약 또다시 경합을 할 거라면 온 주가의 혈족들 앞에서 널 박살 내 버릴 거라고.
그때엔 개망신을 당할 각오를 단단히 하고 나와야 할 거라고.
“…….”
몸이 떨릴 정도로 괘씸하고 분하고 약이 올랐다.
홍아사는 여기서만 잡을 수 있으니 미리 잡아 둔 것이라 우길 수도 없고.
대체 궁은 언제 수련하여 홍아사를 잡을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일까.
‘경합을 또 하여, 이런 년이 감히 소가주인 날 망신 주게 할 순 없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퇴로가 있다 하면 오직 지금뿐이었다.
주경현이 뼈를 깎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음에 다시 하기도 마땅치 않지. 문양이 있는 놈들을 더 찾아내기도 바쁠 이런 시기에 말이야. 신영의 안위가 무엇보다 우선이니.”
고작 이딴 계집애가 자신에게 모멸을 주는 장면을 만천하에 보여야 한다니.
그가 이를 악물었다.
‘내 너를 기필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살해 위협이 있었다고는 해도 시합은 시합. 하나라도 잡아 온 이상 네가 이겼다. 그러니-.”
“그럼 더 이상 제게 구혼하시지 않으실 거지요? 감히 소가주를 거절해야만 해 찢어질 것같이 아픈 제 마음을 헤아려 주신다면요.”
‘이년이!’
그의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닌가요?”
“그……래.”
“네? 잘 들리지 않습니다.”
“……!”
“오늘 여러 가지 일이 있어 목이 잠기셨나 봅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도 결과를 들어야 하니 조금만 더 힘내셔서 크게 공표해주시고 저택으로 어서 돌아가 편히 쉬시지요.”
네? 그렇게 재촉하며 둥글게 휘던 눈을 떠올리며 주경현이 이를 갈았다.
다시금 머리끝까지 치솟는 분노를 어쩌지 못해 정신없이 주먹을 내리쳤다.
철벅거리는 느낌에 정신을 차려 보니 욕실이었다.
“소가주님, 얼굴이 너무 붉어지셨어요. 너무 오래 탕에 들어 계셔서 그런가 봐요.”
“아, 아니다. 내 분해 참을 수 없는 일이 있어서.”
“이 경합은 너의 승리다. 두 번 다시 너에게 구혼하지 않을 것이니 네 혼사는 네 마음대로 해라!”
그 말을 온 주가의 혈족들 앞에서 크게 외쳐야 했던 모멸적인 순간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인 것이다.
‘그때 아버지께서 미리 저택으로 돌아가셨기에 망정이지.’
탈피하기 전에는 쉬어도 된다고. 지금은 굳이 수학할 필요가 없다는 말로, 후계자 수업은 물론 다른 학문의 선생조차 제대로 붙여 주시지 않는데.
이번처럼 자존심을 바닥에 깔아뭉갠 장면을 보셨다면 후계 수업은커녕 금족령이 내려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됐어. 어차피 아버지께선 그때 거기 안 계셨고 세화 그년이 그런 식으로 끼어들기 전까지 내가 일을 아주 잘 처리하고 있었으니까.’
어제 일로 심려가 크실 테니 다른 일은 생각하실 여력이 없으실 테고.
‘그래. 진상을 파헤치는 내 모습이 큰 의지가 되셨을 테니 그 일이 혹 아버지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해도 뭐, 이번엔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한 주경현이 입술을 떨리게 하던 분노를 애써 가라앉혔다.
서월에게로 몸을 깊게 기대고 심호흡했다.
여전히 희고 가는 손가락은 그의 몸 위를 누비고 있었고, 그럴수록 노곤하게 몸이 풀어졌다.
“그래. 아, 그래. 거기. 거길 더 힘주어 눌러 보거라.”
소가주의 지시에 서월의 손이 더 정성껏 그의 드러난 근육을 주물렀다.
그 손길이 어찌나 몸을 편안하게 하는지. 모든 울화를 잠시 잠재운 주경현의 의식이 깜빡 깊게 잠기려는 찰나였다.
부드럽게 그의 젖은 몸을 매만지던 서월이 뱀처럼 스르륵 물속으로 들어왔다.
그 기척에 소가주는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서월이 그의 눈앞으로 뭔가를 내밀고 있었다.
“소가주님. 서월이 이것을 가져왔습니다. 이것도 취하셔요.”
“헉. 이게 무어냐. 영단이냐?”
주경현이 서월의 손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다섯 개의 주황색 영단을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이건 주가 누군가의 영력이 아니냐! 이게 어디서 난 거냐!”
“사실은 서월이 드리는 건 아니옵고, 신영께서 오늘 소가주님에 대해 염려가 크셨는지 서월이 이곳에 들어올 때 이 영단들을 주셨습니다. 조금이라도 회복하시는 데 도움이 될까 하여 그러신 것 같아요.”
“아버지께서 영력을 깎아 만드신 것이란 말이냐. 역시 나를 이리 깊이 생각해 주시는 분은 아버지밖에 없구나.”
“지금 드셔요. 영단을 많이 드셔야 탈피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그렇지. 이리 주거라.”
소중한 영단이 한 알이라도 잘못될까 봐 주경현이 얼른 그것을 받아 삼켰다.
삽시간에 배 속이 뜨끈하게 달궈지고 온몸에 활력이 넘쳐 흘렀다.
그렇게 주경현이 그 힘에 취해 영력을 흡수하는 일에 잠시 정신을 집중할 때였다.
푹!
긴 침이 소가주의 목 뒤를 단숨에 찔렀다.
영단을 흡수하는 중엔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기 때문에 전혀 방어할 수 없었다. 눈을 뒤집은 소가주가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물속으로 쓰러졌다.
서월이 그런 소가주의 몸을 욕탕에서 끌어냈다.
그 순간이었다.
욕실의 문이 열리고 얼어붙은 표정을 한 신영이 걸어 들어왔다.
쓰러진 주경현과 그를 받치고 있는 서월을 본 노인의 입가가 잔혹하게 움직였다.
“그놈을 밀실에 가둬라! 이후 필요할 때까지는 절대로 깨어나지 못하도록!”
노인의 고목 같은 눈이 날카롭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세화 그년은 네가 직접 데려와.”
그래. 이젠 더 두고 볼 것 없었다.
그년이 환석을 사용해 신수로 거듭나려 하기 전에 영력을 빼내야 했다.
“무슨 수를 써도 좋다. 백가행이고 뭐고 팔다리를 잘라도 상관없다! 그러니 그년을 내 앞에 데려다 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