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
노인이 힘껏 이를 사리물며 물었다.
“배후를 캐시는 데 사지는 필요 없을 테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도주의 위험도 줄일 수 있으니 아주 좋은 방법일 듯하고요.”
“…….”
노인의 턱이 경련하는 사이 주경현이 “맞습니다. 아버지!” 하고 동조했다.
“저도 아까 사지를 잘라야 한다 말씀드리지 않았었습니까. 제가 그것을 저 아이보다 더 먼저 떠올렸습니다.”
‘저…… 새끼가.’
백가 재상까지 신영에게 고개를 숙이며 읍소했다.
“신영, 저 문양을 몸에 지닌 자가 여기 더 있다면 환계를 위해서라도 큰일입니다. 그들은 주가와 육가 연합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간신히 평화를 되찾은 환계를 또다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으려는 역도들입니다. 절대 조금의 자비도 베푸셔선 안 됩니다. 퇴로가 봉쇄된 지금만이 기회입니다. 한 놈도 달아날 수 없도록 빨리 문양이 있는 자를 조사해 인원을 파악하시고 그들의 사지를 자르십시오!”
한 번도 신영에게 거역해 본 적 없는 주명윤 역시 노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증거가 명확한데 무얼 망설이십니까, 신영. 사지를 자르십시오!”
“…….”
노인의 얄팍한 울대가 파르르 진동했다.
방황하는 시선이 잠시 사냥터를 둘러싸고 앉은 혈족들에게로 향했다.
누구 하나라도 이 상황을 부정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에선 곧 있을 잔학한 학살에 대한 기대감만이 엿보일 뿐.
“…….”
몇 번이고 말을 삼켰다. 하지만 퇴로가 없다.
퇴로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굳어 있던 노인이 고개를 아래로 꺾으며 승낙했다.
“……하거라.”
그 말에 주경현이 사냥터를 지키는 일반 무사들을 향해 외쳤다.
“뭣들 하느냐. 이제부터 문양이 있는 자들을 찾아낼 것이다! 달아나지 못하게 당장 저들을 포박하라!”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지금까지의 공방을 보고 있던 신영의 호위 무사들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서로 알고 있다. 그들 사이엔 문양이 없는 자가 없다.
백가 재상 역시 목소리를 높이며 소리쳤다.
“백가의 무사들아! 소가주를 도와 이 후안무치한 놈들을 처단하는 데 앞장서거라. 한 놈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 말에 백가의 무사들이 단상 뒤에 도열하고 서 있던 신영의 호위들을 덮쳐들었다.
달아나려는 자와 잡으려는 자 사이에서 난장이 벌어졌다.
“신영!”
한 호위가 포기하지 못하고 노인을 외쳐 불렀으나 노인은 돌아보지 않았다.
“신영! 신영!!”
애타게 노인을 부르짖는 호위의 뺨을 주경현이 강하게 내리쳤다.
“네놈이 결백하면 될 것이 아니냐! 어찌하여 신영을 찾아! 감히 아버지의 자비에 기대 이 자릴 벗어나 볼 생각이더냐!”
신영과 호위들 사이엔 굳건한 신뢰나 존경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 신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조금 값어치 있지만 언제든 버릴 수 있는, 그런 소모품 같은 것.
하지만 지금은 전시가 아닌가.
절대 백 명을 한꺼번에 버릴 수는 없을 거라고.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들을 넘기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상황에 기대어 믿었건만.
‘아니야. 어떻게 해서든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자. 잠시 달아나 있다가 신영께 몰래 돌아가면 분명 신영께서 문양을 지우고 우릴 숨겨 주실 것이다!’
시선을 빠르게 교환한 호위들이 일제히 그들을 에워싸는 무사들을 피해 솟구쳤다.
“!! 아니 이놈들이?!”
주경현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한 호위들을 삿대질하며 무사들을 재촉했다.
“잡아!! 절대 달아나게 두지 마라!”
사냥터를 지키는 무사들과 백가의 무사들이 연합하여 달려들었다. 허나 신영의 호위들도 죽기 살기로 저항하는 터라 사로잡기가 쉽지 않았다.
“꺄악!!”
관객석까지 난입해 인질을 잡으려는 이들에 의해 사냥터가 아비규환으로 바뀌려 할 때였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백기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주변으로 새하얀 영력이 폭풍처럼 모여들었다.
표정은 평온했으나 음영 져 짙어진 백기하의 눈에는 살광이 번뜩였다.
그녀를 오 년이나 고문한 것들이다. 저놈들을 놓치고 어찌 그녀의 부군을 자처할 수 있겠는가.
그는 그녀의 행방을 알게 된 전생부터, 이 시간만을 기다려 왔다.
하얀 영력으로 뒤덮인 그의 오른발이 앞으로 내딛어졌다.
콰앙-!
“!!”
“허억!”
“큭. 이게, 무, 무슨.”
어마어마한 영력을 담은 기파가 단번에 터져 나갔다.
영력이 약한 이들은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혼절했다.
간신히 충격에서 벗어난 이들이 영력의 진원지를 돌아보았다.
완전히 박살이 나 버린 단상 위에서, 백기하가 허리춤에 매어 두었던 검을 천천히 뽑아 들고 있었다.
일방적인 살육이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
“악!”
“컥!”
물 흐르듯 움직이는 남색 장포는 빠르다 느껴지지 않았는데 어느새 눈앞에 와 있었다.
얼어붙을 듯 차가운 눈을 한 백기하가 일말의 자비도 없이 호위들의 사지를 도륙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호위들의 팔다리가 퍽퍽 잘려나갔다.
그는 호위들의 다리를 자를 때는 영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힘만을 이용해 나무를 꺾듯 내리쳤다.
뼈가 조각조각 부서지고 살점이 뭉그러졌다. 폐를 잡아 찢는 듯한 거친 비명들이 사냥터를 가득 채웠다.
그동안 주가의 다른 무사들은 적의 수장의 잔혹한 검날이 혹 실수로 날아오기라도 할까 봐 주춤주춤 몸을 뺐고, 백가의 무사들은-.
“하. 보았느냐. 너희는 눈도 깜빡이지 말고 저 모습을 완벽히 머릿속에 담아 놓거라. 저분이 우리의 수장이시며, 백가의 영원한 기둥이시고, 스러져 가는 환계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마치 돌 틈에서도 기어코 뿌리를 내리는 영목처럼 홀로 신수의 반열에 오르신. 그리하여 우리 백가의 위상을- 읍읍!”
백가 무사들이 조용히 백만용의 입을 막은 채,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게 몸으로 감싸 뒤로 데려갔다.
그들의 수장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잔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입을 다물고 있을 때였다.
그 사이에도 허공으로 솟구치는 뜨거운 피들이 공기를 데우며 뿜어져 나왔다.
백 명의 호위들이 바닥을 기는 데엔 반 각도 필요치 않았다.
다리가 잘린 호위들이 기어서라도 도망치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날아온 날카로운 검날이 남아 있는 팔을 손목부터 다져내듯 잘라 냈다.
“아악!”
그 무시무시한 위용과 두려울 정도의 잔학함에 잠시 말을 잊고 있던 주경현이 더듬더듬 따졌다.
“백, 백가주! 아, 아직 문양을 확인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그리 성급히 일을 처리하십니까!”
백기하가 검신을 타고 흐르는 피를 털어내며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이리 죽기 살기로 도망치는 놈들의 몸에 문양이 없을 리가 없는데.”
날카로운 검신이 비참하게 쓰러진 호위의 몸 위를 아무렇게나 검으로 그어 내렸다. 피부 위로 죽죽 붉은 줄이 가며 갈라진 의복이 벌어졌다.
“여기 있군, 문양.”
이번엔 그 옆에 있는 놈의 몸을 검으로 그어 내렸다.
“여기도 있군.”
또 하나의 문양이 지켜보는 이들 앞에 드러났다.
“일단 이리 와 보지, 소가주. 내 한쪽 다리와 팔을 잘라 냈지만, 나머지가 남지 않았나. 자네를 위해 남겨 둔 것이네. ”
주경현을 부르는 백기하의 눈 안쪽엔 여전히 감출 수 없는 잔혹한 살기가 그득했다.
“아무리 백가 역시 피해를 봤다고는 하나 이것은 주가의 일인데 응당 자네가 마무리해야지. 그러니 어서 와서 이자들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게. 주가의 위용을 세우고 본보기를 보일 수 있도록.”
그가 짧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면 신영께서 아주 좋아하실 것이야.”
* * *
욕실엔 뿌연 김이 가득 차 있었다.
따뜻하게 데워진 약탕에 몸을 담근 주경현은 그 노곤함에 가만히 긴 숨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백가주 놈.”
마치 어린애를 대하듯 저를 가르치던 백기하만 생각하면 욕이 절로 나왔다.
“내가 이미 전모를 낱낱이 밝힌 일이거늘, 뒤늦게 끼어든 주제에 마치 제가 이 모든 것을 해결했다는 양 잘난 척은.”
어찌하여 주씨들은 상황을 다 봐 놓고도 저 백기하만을 찬양하는가. 호위들을 도륙하는 잔인한 모습에 기함할 줄 알았건만 오히려 주가를 위해 손을 쓴 대인배라 칭송하다니.
‘머저리 같은 혈족들. 이래서 내가 빨리 신영이 되어야 하는데. 그래서 저 골 빈 것들에게 나에 대한 존경과 두려움을 심어 놓아야 해.’
자애로우신 아버지가 조금 실패하신 그 부분을 그는 완벽히 메꿀 자신이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오늘 너무 미온적인 반응이시던데. 차마 곁을 지키던 이들이 처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실 수 없었던 건가.’
그가 문양이 있는 자들을 쳐 죽이는 동안에도 제 아버지는 내내 머리를 괸 채 시선을 내리고 계셨다.
‘아니면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도 그렇고, 더 일찍 발견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자책하시기라도 하는 건가.’
어쨌건 오늘 자신은 고생이 많았다.
백기하가 어떻게 끼어들었고 백가 재상이 어떻게 오지랖을 부렸건 간에, 오늘 일은 제가 해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제법 코가 으쓱해졌다.
‘한데 백 명의 몸에 모두 문양이 있었는데. 그렇게 많은 수의 살수를 도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주가 신영의 저택에 침투시킨 거지?’
그것을 알 수 없어 잠시 고민하던 때였다. 욕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자 흰 욕의 차림을 한 서월이 사뿐한 발걸음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작은 얼굴에 깃든 부드러운 미소에 주경현의 시선도 조금 풀어졌다.
“이곳은 신영께서 내게 치료를 위해 내어 주신 곳이다. 신영의 욕실에 함부로 발을 디디다니. 경을 치고 싶은 것이냐.”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그리 말씀하시면 서월은 섭섭합니다.”
자박자박 달려온 서월이 땀이 흐르는 주경현의 얼굴을 매만지며 입술을 삐죽였다.
길고 하얀 손가락이 주경현의 목덜미에 닿았다.
“다치셨다는 말에 의복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그대로 뛰어왔건만 그리 냉정히 말씀하셔야겠습니까? 게다가 서월을 이곳에 들어갈 수 있게 허락해 주신 것은 신영이신걸요.”
비단처럼 부드럽게 그의 젖은 피부를 문지르고, 뭉친 부분을 풀어 주었다.
“아버지께서?”
“네. 신영께서 소가주를 어찌나 걱정하시던지. 제가 감히 신영의 약탕에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저를 들여보내 주시며 소가주를 잘 모시라 하셨습니다.”
‘오늘은 아버지도 상심이 크셨을 텐데. 그런 와중에도 나를 이리 생각하시고.’
“그랬구나. 역시 세상에서 나를 가장 아끼시는 건 내 아버지이실 거다. 오늘도 내가 조금 다치자 얼마나 걱정을 많이 하시던지.”
“한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어찌하여 다치셨던 거예요. 치료는 받으신 거지요?”
“그럼. 걱정 말아라. 치료고 뭐고. 내 오늘 나의 영민함을 뽐내며 감히 내 아버지를 위협하는 무리들을 즉시 처결해 버렸으니까.”
“네? 신영을 위협하는 무리라니요?”
“그런 것이 있다. 어쨌거나 오늘 아버지도 나를 다시 보셨을 것이야. 그럼 이제 내게도 후계자 수업을 시켜 주시겠지.”
주경현이 서월의 손길에 완전히 몸을 맡기며 한숨처럼 말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