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254)

* * *

주경현과 세 호위들은 숨죽인 채 사냥터를 가로질렀다. 목표물의 아주 작은 기척이라도 감지하기 위해서였다.

도통 쉽지 않긴 했다.

천령의 등에 업힌 주경현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분명 백기하, 그놈이 세화를 보호해 주고 있는 것이야. 아니라면 이제 막 탈피를 마친 계집애가 이리 완벽하게 기척을 감춘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천령이 그의 말에 동조하자 소가주의 표정이 한층 험악해졌다.

“그래. 조력자가 있지 않고서야 세화도 그렇지만 그 세 시녀 나부랭이들이 이렇듯 너희의 기감을 피해 달아날 순 없지. 감히 원로의 여식이라는 본분도 잊고 이런 일에 백가를 끌어들여? 감히?”

그때 천령이 불쑥 물었다.

“소가주님께서는 범인의 얼굴을 보셨습니까?”

주경현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환계의 약이 효과가 빠르다고는 해도 낫는 과정에서 통증이 엄청나게 몰아친다.

하여 아까는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에 기억을 쥐어짜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소가주의 체면이 있지.

그를 이렇게 만든 범인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야. 나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정확히 봤어. 그놈들이 복면을 하고 있어서 그 낯짝들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뿐이지.’

“그래. 복면으로 가리고 있어 얼굴을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시커먼 흑의로 온몸을 감싼 놈들이 이곳에 많지는 않을 테니 그놈들을 찾으면 될 것이다.”

그때였다.

그들의 발걸음이 일제히 멈춰 섰다.

어느 방향에서 또다시 백가의 결계가 선 것이다.

“저기다! 저기야!”

주경현이 그 방향을 향해 소리쳤다.

호위들 역시 그곳을 향해 나는 듯이 달려갔다.

주경현의 손이 잡고 있던 천령의 의복을 쥐어뜯을 듯 잡아 비틀었다.

활만 있었으면 저를 이렇게 만든 놈들을 제가 직접 모두 쏴 죽여 버렸을 텐데.

“천령아, 이 정도에서 나를 내려놓거라.”

“예? 홀로 계시겠다고요?”

이 등신 같은 놈이 지금 뭐라고.

이를 사리문 주경현이 저도 모르게 저를 업고 뛰는 천령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게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냐. 네가 나를 지켜야지! 내겐 지금 무기도 없는데!”

“하면 저희와 같이…….”

“그곳에 갔다가 내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네가 책임질 것이냐? 신영의 앞에서 자진이라도 할 각오더냐?”

역정이 가득한 말에 천령이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 그 말을 들은 호위들이 천령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가주님과 여기 있어라. 우리가 먼저 가 보마.”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천령이 커다란 나무 밑에 주경현을 세우고 그 앞을 막아서는 사이, 두 호위가 먼저 앞으로 달려나갔다.

주경현이 초조한 듯 손끝을 손톱으로 후벼 파며 물었다.

“저기 백가의 결계가 있다는 건 나를 공격했던 그놈들이 저기 있다는 거겠지?”

“그럴 겁니다. 아니라면 세화 아가씨와 소가주님만이 계셔야 할 사냥터에 뜬금없이 백가의 영력이 나타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주경현의 얼굴이 조금 더 초조해졌다.

뭔가를 살피듯 주위를 둘러보던 그가 천령에게 물었다.

“너, 검은 몇 자루나 있느냐.”

“하나 있습니다.”

“그거 일단 나를 다오.”

“네?”

“일단 날 줘! 무기도 없이 이리 서 있다가 내가 다치면 어떻게 할 거냐!”

“…….”

난감한 얼굴로 서 있던 천령이 주경현의 재촉에 일단 허리춤에 있던 검을 검집째 풀어 내밀었다.

주경현이 검을 빼 들었다.

잘게 떨리는 손에서 역력한 긴장이 엿보였다.

천령이 조심히 물었다.

“제가 들고 있는 편이 낫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런 답답한 놈을 봤나. 너는 적이 나타나면 온몸을 던져서라도 나를 지켜야지. 그럴 때 검을 들고 있다가 내 몸에 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

의식이 날아갈 만큼 고통스럽게 얻어맞았던 공포의 기억은 쉬이 지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다 바로 조금 전의 일이 아닌가.

있는 힘껏 검 손잡이를 쥐고 있는 손의 떨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거세지기만 했다.

그 아슬아슬한 모습에 걱정된 천령이 마음 놓으시라고, 말씀처럼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 드릴 것이라고 그리 장담하려 할 때였다.

“!!”

그 기척은 갑작스럽진 않았다. 다가오는 속도가 충분히 그들이 대비할 수 있을 정도였다.

허나 소가주와 천령은 누군가가 그들을 향해 달려와 공격할 때 전혀 대비할 수가 없었다.

공격자들이 바로 조금 전, 세화 일행을 잡겠다고 먼저 앞으로 달려갔던 그 호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촤악!

날카로운 검날들이 천령과 소가주의 가슴팍을 찢으며 날아들었다.

“헉! 컥.”

“소가주님!”

천령이 고통에 아래로 무너져내리는 소가주의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 상태로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호위들을 피해 전력으로 몸을 뒤로 뺐다.

하나 멀리 갈 수가 없었다.

어쩐 일인지 복면을 쓴 괴한 다섯이 더 추가되어 그들을 향해 검을 들이댄 것이다.

고통에 신음하던 주경현이 얼굴이 시뻘게진 채 외쳤다.

“이놈들이다! 이놈들이 아까 나를 공격한 그 백가 놈들이야!”

어렴풋한 시야 속에서 이놈들을 본 것 같았다. 고통이 극심한 제 얼굴을 때리고 더듬던 그 면면들을.

“너희가 다 한패였구나!”

소가주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맙소사, 어찌 아버지의 호위가 백가의 첩자일 수 있는 것인가.’

그 사이에서도 일곱 개의 검날은 끊임없이 소가주와 천령 사이를 파고들었다.

섬뜩한 기세에 배신자라 소리치던 것도 잊고 서늘해진 목덜미를 움츠렸다.

“안 되겠습니다! 잠시 소가주님을 내려놓겠습니다.”

“뭐야?! 이 미친놈이! 이 상황에서 나를 내려놓으면, 나는 죽으라는 말이냐?!”

“제가 지켜 드릴 것입니다! 다만 검을…….”

몇 번의 날카로운 검날을 제 사지로 막아낸 천령은 벌써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붉은 피로 범벅되어가는 몸이 점차 무거워져 가고 있었다.

‘달아날 수 없는 이상 맞서 싸우기라도 해야 할 텐데.’

천령의 눈이 흘끗 멀찍이 나무 아래에서 나뒹굴고 있는 검으로 향했다. 첫 번째 공격에 소가주의 손에서 곧장 떨어져 버린 그 검이었다.

그 사이에도 다시 한번 복면인의 검날이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헉! 컥!”

“히익!”

눈앞에서 천령의 어깨가 꿰뚫리는 장면을 본 소가주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붉은 피가 그의 얼굴에도 튀었다.

“안, 안 되겠습니다. 소가주님, 제 품 안에서, 품속에서 신호탄을…….”

도저히 이 살수들에게서 빠져나갈 수 없다고 판단한 천령이 속삭이자 소가주가 빠르게 그의 품속을 뒤졌다.

제 눈에도 익숙한 물건이 발견되자 지체 없이 그것을 발동시켰다.

콰광!!

신호탄 안에 모였던 영기가 한순간에 폭발하며 거대한 진동을 만들었다.

* * *

사냥터에 모인 이들은 여태 백기하를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름다운 얼굴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을 듯했고, 일체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도 무인의 기세를 느끼게 했다.

그 옆에 자리한 준수한 이는 또 누굴까 하여 알음알음 서로들 정보를 공유하니 백가의 재상이란 답이 돌아왔다. 그 아래 자리한 쉰두 명의 무사들이 백가의 기마단이라는 사실도.

‘세상에. 주가의 무사들이 위용으로는 환계 칠가 중 제일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백가도 만만치 않네요.’

‘그러게요. 저 절도 있는 자세들을 좀 보세요. 저렇게 늠름할 수가.’

그런 주변의 반응을 가만히 지켜보는 시선도 있었다.

‘그래. 실컷 봐라. 아무리 환계 지배자의 일족이니 신영의 핏줄이니 떠들어 봐야 우리 가주의 발가락 때만도 못한 것들이. 너희가 어디서 이렇게 관옥 같은 헌헌장부를 볼 수 있었겠-.’

“재상.”

“네, 가주.”

“표정을 갈무리할 자신이 없으면 뒤로 물러나 있거라.”

“아, 제가 너무 의기양양하였습니까?”

“…….”

“주의하겠습니다. 저이들도 눈은 있어, 풍골이 준수하시고 용모가 출중하시고 기세가 남다르신 우리 가주의 위용 앞에 무릎을 꿇고 싶어 하는 속내들이 너무 확연히 들여다보여, 제가 저도 모르게 그만 자제를 잃고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실수를-.”

“만용아.”

“네, 가주.”

“여기 오기 전에 약조하였지. 입은 내가 신호하면 열기로.”

“……네, 가주.”

신영 역시도 주변 혈족들의 그런 시선들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마땅찮고 고까운 시선으로 백가주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백가주. 어찌하여 저 많은 무사들을 모두 끌고 온 것인가.”

“머무는 집의 주인이 이리 가신다기에. 주인도 없는 집에 객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침 볼거리가 있을 듯하여 모두 나와 보았습니다.”

“……지금 주가 내부의 일을 볼거리로 칭하는 것인가.”

신영이 소매 안에서 노쇠한 손을 틀어쥐었다.

‘건방진 놈. 내가 신수만 된다면 가장 먼저 백가부터 쓸어버릴 것이다.’

“노여움을 푸시지요. 여기 있는 많은 이들이 모두 같은 목적으로 나온 듯한데, 제게만 뭐라 하시는 건 형평성에 맞지 않는 일 아닙니까. 뭐, 그것 외에도 신영께 말씀드릴 것이 있어 나와 본 것이기도 합니다.”

“내게 고해야 할 일이라니. 그게 무어냐.”

“급하지 않으니 이 행사가 끝나고 나면 따로 말씀드리지요.”

“아니. 어차피 정오가 되려면 조금 더 남았으니 기다려야 하지 않겠나. 뭔지 말해 보-.”

콰광! 쾅!!

그때였다.

사냥터의 한 곳에서 굉음과 함께 붉은 빛이 일자로 솟아올랐다.

“!!”

신영의 눈빛이 돌변했다.

저것은 제 아들 주경현이 위험에 처했다는 신호인 것이다.

혹시 모를 위험을 방지하고자 아들의 호위인 천령에게 신호탄을 주고 위급할 때 사용하라 일렀는데, 그게 사용되었다.

노인의 손짓에 주가의 무사들이 일제히 사냥터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들이 잘못되기라도 했을까 봐,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선 노인의 안색이 빠르게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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