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 대회에 대한 소식은 삽시간에 주가 전역으로 퍼졌다.
“혼인을 하네 마네 하는 일로 경합이 열린다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야.”
“소가주를 따라갔던 시종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자기는 백가주가 좋으니 백가주와 혼인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잖아.”
“간덩이가 배 밖에 나와서 붙었나.”
“탈피를 잘해서 코끝이 하늘을 찌르는 아가씨가 이젠 상대를 재는 거지 뭐.”
다른 이도 아니고 백가주와 소가주 사이에서 고민이라니.
이리저리 재다가 양쪽 모두에게서 버림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속물적 호기심 이상으로 악의적인 말들이, 경합이 발표된 이후부터 주가 전역을 들끓게 했다.
신영은 이번 사냥 대회에 누구나 참가가 가능하다 하였다.
허나 이런 재미있는 일은 그저 관객으로 남아야 오히려 더 자세히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볼 수 있는 법.
그리하여 참가하겠다고 손을 든 이는 하나도 없건만, 막상 경합 당일엔 또다시 일찍부터 구름 같은 인파가 사냥터로 몰려들었다.
백기하도 자리할 것이라는 얘길 미리 듣긴 했으나 이번에는 그의 용모에 대해 특별한 기대가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난번에도 가면을 쓰고 나왔으니 이번에도 그러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
사냥터의 좌석으로 들어서던 이들은 일제히 누군가를 발견하고 하나같이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입까지 벌린 이들은 예의도 잊은 채 멍하니 시야에 들어온 누군가를 응시했다.
‘맙소사. 옥골선풍이 이런 것이던가.’
저이는 대체 누구지.
수려한 용모로 이름 높던 어떤 이름을 가져다 댄다 한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앉은 이 사내를 이길 수 있을까.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빗어 묶은 머리. 치우침이 없는 곧은 자세와 주름 하나 없는 청자색 장포마저도 맞춘 듯 아름다웠다.
세상에 존재하는 무슨 단어로도 저 멀리 신영의 좌 아래에 자리한 사내의 용모를 표현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말해 주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저이가 바로 백가주구나.’
연회 때, 가면을 써도 가려지지 않는 풍채와 영력의 기세에서 그 아래로 감춰져 있을 미려한 용모를 짐작할 수 있긴 했지만.
‘대체 어찌 이리 아름다운 이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지.’
그 멍하고 열렬한 시선들은 주명윤 부녀를 위시해 신영이 사냥터로 들어서고 나서야 분산되었다.
상석에 자리한 노인의 눈이 빈자리는커녕 서 있기 힘든 자리에까지 인파가 들어찬 사냥터의 풍경을 곁눈으로 훑었다.
나직한 침음이 흘러나왔다.
‘감히 이따위 저급한 일로 주가 소가주의 면을 깎다니.’
“소가주와 주명윤의 여식은 앞으로 나오라.”
마땅찮은 기색을 채 감추지 못한 노인의 시선이 세화를 향해 매섭게 당겨졌다.
이 체면 없는 경합에 대해 다른 정상적인 이유를 들어 포장하려 했건만, 진작부터 온 영역에 말이 퍼져 나간 데다 온갖 구설이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이니.
‘이제 와 대체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모두가 이미 오늘 경합의 이유를 알고 있는 듯하니 긴말은 생략하지. 내 이후 주가의 반석이 될 너희들을 깊게 믿고 있건만 둘 다 이번만큼은 나를 깊게 실망시켰다.”
입이 쓴 상태로 노인이 입을 열었다.
“너희는 주가의 소가주로서, 훗날 주가를 뒷받침할 원로의 여식으로서 뱉은 말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둘 다 이것에 대해 이의는 없느냐.”
붉은 장포를 아름답게 차려입고 공손히 시선을 내리깐 세화를 옆눈으로 사납게 훑은 주경현이 그녀와 동시에 대답했다.
“네. 신영.”
“경합을 단발성 경기로 진행치 않고 사냥으로 정한 것 또한 어떤 변명도 억울함도 이 경기에 끼워 넣지 않으려는 의도이다. 특히 주세화.”
“예.”
“너는 요 며칠간 나를 정말로 많이 실망시켰다. 지금까지 너의 도를 넘은 언사를 용서한 것은 오직 내가 네 방종을 아량으로 넘어가 주었기 때문임을 명심하거라.”
“네. 신영.”
“집행관은 둘에게 궁을 나누어주거라. 이 또한 이후 어떤 변명도 용납하지 않기 위함이니, 너흰 모두 주어진 무기 외에는 사용치 말아야 한다.”
아무리 경합이라 한들 지체 높은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하여 호위는 각자 셋씩 대동하기로 했다.
소가주가 호위 셋을 부를 때, 세화는 세 자매를 함께 동행시켰다.
너무나 한쪽이 기우는 그 모습에 지켜보는 이들 사이로 ‘아!’,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저 호위들은 소가주를 지키기 위해 밤낮으로 무예를 연마한 이들이지만 저 세 자매라 하면 그저 신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잡일을 하는 이들이 아닌가.
어찌하여 딸이 저런 동행을 고르는데 명윤 원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조언을 좀 해주지.
아니면 조언하지 않는 것이 딸을 소가주와 혼인시키고 싶은 원로의 마음을 반영한 결정인가?
호위를 위시해 세화와 주경현이 모두 말에 오르자 집행관이 뿔나팔을 길게 불었다.
“좋다. 시간은 단 한 시진 뿐. 정오까지 오직 활로, 가장 많은 사냥감을 잡아 오는 자가 이기게 된다. 알겠느냐!”
* * *
여덟 마리의 말이 일제히 신영의 사냥터로 뛰어들 무렵.
커다란 수목들이 우거진 숲 안쪽에서는 누군가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온몸을 흑의로 감싸고 복면을 한 무리였다.
여기저기에 증거가 남지 않을 갖가지 짐승 덫이 비밀리에 놓였다.
신영의 명을 받은 그들은 그 위에 아낌없이 여러 종류의 약을 뿌리기도 했다.
닿는 순간 일정 시간 동안 사지가 마비되는 약부터, 잠시간 몸속의 영력이 사라지거나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몸 내부가 진탕되고 근원이 상처 입는 종류도 있었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그들은 방대한 지역에 걸쳐 만들어 놓은 덫을 돌아보고 나무 위로 흩어졌다.
풀과 가지로 만들어진 덫들이 잡초에 가려 금세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 * *
주경현은 호위들을 끌고 나무들 사이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헤집었다.
‘어디냐. 세화는 어디냐.’
분명 호위가 이 근처 어디랬는데.
처음 숲의 입구에서는 지켜보는 수많은 눈을 고려해 반대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가주님. 이쪽, 남서쪽에서 영력이 느껴집니다.”
그가 데리고 온 호위들은 신영의 무사들 중 영력을 느끼는 기감이 가장 특출난 자들이었다.
사냥을 시작하기에 앞서 세화와 그 시녀들부터 찾아내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무력하게 풀숲에 쓰러져있는 사이 경합이 끝났다 하면 얼마나 더 절망적일까.’
감히 그의 앞에서 백가주가 어쩌고저쩌고, 정도를 모르고 입을 놀렸으니 그 정도 절망감은 심어주어야 공평할 것이다.
어느 순간 호위가 조금 더 기척을 줄였다.
“십오 장 정도 앞에서 기척이 느껴집니다.”
비릿한 미소를 끌어 올린 주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의 영력을 감지하는 이 능력은 훈련 없이는 절대 만들어질 수 없었다.
게다가 탈피 후 영력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상태에서만 익힐 수가 있었는데.
‘그러니 세화를 따르는 그 세 계집년들은 물론이고 세화마저도 이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거기다 오늘 세화는 붉은 장포를 입고 오기까지 했다.
윤기 나게 늘어진 검은 머리와 새빨간 장포의 조합이 눈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답긴 했으나.
그리 눈에 띄는 옷을 입고 오다니, 경합도 작은 전쟁과 다름없는데. 정말 사냥감을 얼마나 많이 찾아내는가에만 서로 집중할 줄 알았던 건가?
그렇게 생각이 짧으니 그에게 혼인하고 싶지 않다느니, 얼굴 보지 말자느니 그딴 소리나 늘어놓은 것이라고.
나직이 혀를 차고 있을 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호위가 숨을 죽인 채 궁을 들었다.
저 멀리 언뜻 붉은 장포가 보인 것이다.
호위가 사용하는 화살의 끄트머리엔 쇠구슬이 끼워져 있었다.
이렇게 하면 살을 꿰뚫는 대신 뼈를 부러뜨리거나 근육을 파열시킬 수 있었다.
활에 영력을 담은 호위가 강하게 궁을 당겼다.
끼기긱.
한계까지 시위가 당겨진 활이 둥글게 휘었다.
그사이에도 호위는 혹시 몰라 목표를 재차 확인했다.
긴 장포의 붉은색이야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고.
반복해서 확인해도 그 여식의 영력이 확실했다.
소가주의 눈가에 긴장감이 감돌았을 때 호위가 가볍게 사위를 놓았다.
“……!”
소리도 없이 거세게 날아간 활이 붉은 장포를 맞추며 완전히 쓰러뜨렸다.
주경현과 호위들이 방심했던 것은 그 장면을 목격하는 아주 잠깐의 찰나뿐이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퍽!!
“커억-.”
“흐윽.”
“!!”
소리도 없이 어디선가 날아온 세 대의 화살이 일제히 호위의 이마와 격돌했다.
이것 또한 끄트머리에 쇠를 단 화살이었고 화살에 실린 영력이 어마어마했다.
호위들은 기절하진 않았으나 거센 격통에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 이게 뭐야! 세화는 쓰러졌는데 그럼 이 화살은 대체 누가! 세화의 호위가 쏜 것인가? 그 허드렛일이나 하는 세 계집이?!’
믿어지지 않는 상황에 주경현이 잠시 우왕좌왕하는 사이, 저 먼 곳에선 누군가 붉은 장포를 어깨에 둘러멘 채 그대로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기절한 세화를 데리고 달아나는 것일 터였다.
분노한 주경현이 호위들을 걷어찼다.
“고작 그걸 맞았다고 이따위로 뻗어 있어? 어서 일어나지 못해?! 저기 목표가 있다. 어서 쫓아! 쫓으라고!!”
주경현의 다그침에 미약한 뇌진탕으로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며 시야를 다잡은 호위들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이를 사리문 그들이 고통을 참으며 저 멀리 보이는 붉은 장포를 향해 뛰었다.
“쫓아!! 당장!”
한데 어느 순간 세화를 둘러맨 이와 그 옆을 따르던 이들이 세 갈래로 갈라졌다.
호위들이 긴밀히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이내 그들 역시도 빠른 속도로 목표를 하나씩 맡아 세 갈래로 갈라졌다.
이 화살을 맞지 않았다면 모를까. 그들에게 이런 모욕을 준 이를 하나라도 도망가게 둘 수는 없었다.
주경현만이 세화를 쫓는 호위와 함께했다.
한데 이게 어쩐 일인가.
지금 저 원로 여식은 정신을 잃고 있기까지 한데 그들이 아무리 달려도 거리는 그대로 유지되기만 할 뿐 전혀 가까워지지 않았다.
호위가 더 강하게 어금니를 물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이를 메고 도망치는 시녀 하나 잡지 못한다면 감히 신영의 호위라 할 수 있겠는가.
“소가주, 소가주의 속도에 맞추지 않고 잠시 앞서 달려 저년을 잡아 오겠습니다. 금방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 먼저 가라!”
영력을 사용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한 호위가 주경현에게서 빠르게 멀어졌다.
“헉. 헉.”
그 모습을 보며 주경현이 잠시 멈춰 섰다.
말을 타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말발굽 소리가 요란해 다른 곳에 매어 두고 온 것이 화근이었다.
‘나도 빨리 탈피를 해야 할 텐데.’
탈피를 하지 못하니 몸속에 방대한 영력을 담아 두고도 이것 조금 달렸다고 이리 숨이 차는 것이 아니겠는가.
영력을 사용하는 호위에 맞춰 달리느라 그랬다고는 해도 못내 아쉽고 화가 나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됐어. 일단 저년만 잡으면 나도…….”
그 순간이었다.
인기척이 있는 듯하다고 느낀 순간, 무언가가 나무 위에서 떨어졌다.
새까만 가죽 포대가 삽시간에 그의 얼굴을 덮었다.
“!!”
동시에 누군가 그의 팔을 뒤로 꺾어 붙잡았다.
“뭐, 뭐야!”
강하게 몸부림쳤으나 탈피한 환족의 힘을 그가 이길 수는 없었다.
“놓지 못해?!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이놈들. 이러고도 살아남길 바라? 천령! 주성채!”
‘아니, 호위라는 것들이 이런 커다란 소리를 듣고도 반응이 없어?!’
“천령!! 주성채!!”
그가 그리 격하게 저항하며 발버둥 치고 있을 때, 어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거침없는 발걸음에, 가는 나뭇가지와 수풀들이 밟혀 드는 소리가 선명했다.
“누, 누구냐! 누구냐고!”
본능처럼 알아챘다. 저를 제압하고 있는 이가 이자를 기다린 것이라고.
‘이건, ……이건 설마.’
“너, 백기하냐? 그렇지?! 백기하지! 네가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를 것 같으냐?!”
상대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다만 뭔가를 준비하는 것처럼 부산한 소리가 이어지자 주경현의 두려움이 더 커졌다.
“백기하. 네놈이 이러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감히 주가의 권역에서 주가의 소가주를 위협하고도 네놈이…… 컥!”
퍽!
그 순간 거침없는 주먹이 영력을 휘감은 채 그의 볼을 치고 지나갔다.
시야가 새하얗게 멀어짐과 동시에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격통이 주경현의 눈앞을 진동시켰다.
“잠, 잠깐…….”
하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손이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다시 한번 이어진다 여긴 순간, 마치 바위가 머리를 치고 가기라도 한 듯 거센 충격이 이어졌다.
“!!”
머리뼈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의식이 잠깐 멀어졌다가 이어지는 타격에 다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