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254)

세화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침실을 다른 곳으로 바꿨다.

한밤중에 습격을 받았던 백가 재상의 방 또한 당연히 바꾸었지만, 주명윤은 세화도 더 이상 그 별당에서 머물러선 안 된다고 단호히 주장했다.

그 시선에 담긴 불안과 노기를 보며 세화도 조금 안심했다.

신영에게서 제 아버지가 마음을 돌리고 있었다.

저 상태라면 곧 아버지와 전생의 일에 대해서도 말을 나눌 수 있을지 모른다.

‘만약 아버지께 말씀드려야 한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얘기해야 할까.’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일이겠지만 믿어는 주시겠지.

그 정도 사랑에 대한 신뢰와 자신감은 있었다.

‘신영의 앞에서 너무 속마음을 드러내시면 안 될 텐데.’

마음을 숨기지 못하시는 분이라 걱정일 뿐이다.

여러 가지 생각들로 잠을 이루지 못한 세화가 닫힌 창문 사이로 스며들어 오는 밤 벌레 소리만 가만히 듣고 있을 때였다.

벌레들의 소리가 한 번에 멎었다.

숨죽인 인기척이 흐리게 그녀의 기감에 잡혔다.

뭐지. 그 노인이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또 무사들을 보낸 건가?

아니면 오늘 제법 굴욕적이었을 소가주가?

날카롭게 시선을 세운 그녀가 이불 속에 숨겨 둔 궁과 활을 조심히 손에 쥐었다.

톡.

그 순간, 아주 작은 소리가 창을 열려 시도했다.

한시도 창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호흡조차 참아 낸 그녀가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그렇게 영력을 끌어 올릴 때였다.

달빛을 가린 어떤 그림자가 창문 위로 살짝 비쳤다.

“…….”

그림자의 형태는 너무 두루뭉술해 정체를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림자의 주위를 따라 나 있는 보슬보슬한 털의 정체만큼은 세화가 모를 수 없는 것이었다.

활을 내려놓은 그녀가 거침없이 걸어가 창을 탁 열었다.

머리를 한껏 낮춘 채, 거대한 발 사이로 발톱을 한 개만 슬쩍 꺼내 창을 조심히 밀고 있던 백호가 깜짝 놀라 눈을 들었다.

그녀를 발견한 짐승의 눈동자가 가늘게 접혔다.

“여기서 또 뭘 하는 거예요?”

아버지의 처소가 제가 묵는 곳에서 멀지 않았기에 세화가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물었다.

서둘러 옆에 내려놓았던 이불을 문 백호가 지난번처럼 커다란 앞발로 이불을 툭툭 쳤다.

‘아니, 이 사람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아버지가 근처에 계시는데 눈치채시면 어쩌려고.’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그녀의 발은 이미 창을 타 넘고 있었다.

삼각형으로 접힌 이불 안쪽으로 들어가자 눈치를 보듯 주위를 두리번거린 백호가 커다란 발톱을 내밀어 창문부터 조심히 닫았다.

그런 후 하늘로 날아올랐다.

실상은 영력을 사용하여 높이 뛰어오르는 것이었으나 소리조차 내지 않는 몸놀림은 나는 것과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지난번처럼 전각과 전각 사이를 뛰어넘어 뾰족한 나무들 사이 아늑한 동산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녀는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래도 한 번 겪어 봤다고 지난번보다는 어지러움이 덜했다.

잠시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시야를 바로잡은 그녀가 어느새 사람으로 변용한 백기하를 응시했다.

지난번엔 얼굴에 풀칠을 해 놓더니 오늘은 또 뭘 하려고 여길 데려왔나.

한데 그는 이번엔 뭘 가져오는 대신 심각한 얼굴을 하고 그녀의 앞에 앉았다.

낯빛이 제법 어두운 것이 몹시 걱정되는 일이 있는 듯했다.

“무슨 방도가 있는 게 맞아?”

“응?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오전에 있었던 일 말이야. 그러고 나서 그대는 미장 어른과 얘기를 나누느라 뭘 물어볼 새가 없었으니까.”

초조한 얼굴을 한 그가 다그치듯 물었다.

“어쩌자고 지면 소가주와 혼인을 하겠다는 말을 해. 방도가 있는 것은 맞아? 절대로 변수가 생기지 않을 확실한 방도야?”

“그걸 묻고 싶어서 여길 데려온 거예요?”

“그래.”

그 대답에 세화의 눈가로 미미한 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 미묘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그녀가 아래로 눈을 접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는-.”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어떻게!”

“!”

이 남자가 언성을 높이는 것은 전생과 이생을 통틀어 처음 보는 것이라 깜짝 놀란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조금 전 제 반응이 과했다 여겼는지 백기하가 급히 사과했다.

“미안해. 지금 그건 실수였어. 하지만 신영이 지금 그대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모르지 않잖아. 잘못하다간 그 아이들처럼…….”

그는 걱정돼서 마음이 급했던 모양인데, 세화의 눈은 오히려 조금 가라앉았다.

‘제일 궁금한 게 그거인가? 하긴, 나였어도 무슨 방도가 있는지가 제일 궁금했을 것 같긴 하지만.’

사실 창밖의 백호를 발견했을 때 이런 질문 말고 뭔가 다른 질문이 날아올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아까 혼인하겠다던 그이가 내가 맞느냐.’라든가.

‘신영이 먼저 그대에게 권했던 일이라면 굳이 시일을 미룰 필요 없이 그대로 밀어붙여 바로 진행하자.’라든가.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나도 참. 뭘 기대한 거람. 또 그 밤처럼 그런…… 그런, 뭔가가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

“세화.”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어지러이 늘어지던 생각들을 급히 털어 낸 그녀가 다시 입꼬리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걱정하지 말아요. 잘할 수 있으니까요. 다만 경합 날이 오면 당신이 해 줘야 할 일이 있긴 해요.”

“해 줄 일? 그게 뭔데.”

“어제, 당신이 찍어 준 그 인장들에 관한 것이에요. 그게 드러나게 하려면…….”

세화의 설명이 제법 길게 이어졌다.

듣고 있던 백기하가 마땅치 않다는 얼굴로 눈가를 설핏 찌푸렸다.

“……만용이를. ……그렇군.”

“……혹시 재상을 끌어들이는 건 내키지 않나요?”

“…….”

“제대로 못 할 것 같아요? 아니면 혹 재상이 위험해질 것 같아서요?”

“그게 아니라.”

“?”

“……일이 잘 풀리고 나면 분명 그대가 잘했다고 칭찬을 해 주겠지?”

“뭐. 잘되면 인사야, 하겠죠?”

“…….”

그 순간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던 백만용의 표정과 멍하니 세화의 얼굴을 응시하던 백만용의 시선이.

또, 어떻게든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어 전전긍긍하던 백만용의 모습과 오늘 홀로 소가주를 만나러 가던 세화의 뒤를 따르고 싶어 안절부절못하던 백만용의 긴장한 뒷모습이 빠르게 백기하의 시야를 스치고 지나갔다.

늘어뜨린 그의 손가락 사이로 애꿎은 풀들만 세차게 뽑혀 나갔다.

‘아니야. 이럴 것 없어. 다행히 미장 어른께서 나보다 그 녀석을 더 싫어하시니까.’

그래. 그게 어딘가.

미장이 보이는 표정을 보면 그보다 백가 재상을 백배는 싫어하는 듯했는데 그것만으로도 백기하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했다.

“당신이 그리 싫어할 줄 몰랐어요. 백가 재상은 이 일에서 제외할까요? 당신도, 재상도 이 정도는 위험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거든요.”

“아니야. 그 녀석뿐 아니라 백가 기마단 역시도 마음대로 써먹어도 괜찮아. 가모를 위해서인데 뭘 못 하겠어.”

가모라는 말에 세화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으나 백기하는 눈치채지 못했다.

할 일이 하나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만용에게서 빼앗아 온 활을 집어 든 그가 세화의 뒤로 돌아왔다.

“그럼 이제 이걸 잡아 봐.”

귓가에서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이번엔 세화의 귓불이 붉어졌으나, 이번에도 백기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금을 타던 그 정자에서도 그랬지만.

‘……향기가.’

이렇듯 가까이 다가서 있을 때면 맡을 수 있는 그녀의 체향이 폐부 깊숙이 흘러들어 왔기 때문이었다.

그 상태로 그가 그녀의 늘어뜨린 머리카락에 살짝 제 이마를 가져다 댔다.

윤기 어린 머리카락 사이에서, 향이 더 진하게 흘러나왔다.

“잠, 잠시만. 너무 가까워요. 뭘 하려고요.”

“영력을 화살에 담으면서도 쏠 때 소리가 나지 않는 법을 알려 주려고.”

그래.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닌가.

꼭 가르쳐 줘야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이, 본의는 아니지만, 이렇듯 몸을 겹치고 손을 잡을 수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입꼬리를 휜 그가 활을 잡은 그녀의 손 위에 제 것을 겹쳤다.

피부가 닿는 순간 체온이 한 뼘은 더 뜨거워지는 듯했다.

* * *

창가에 서 있는 노인은 달빛이 내리쬐는 정원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리는 팥배나무 이파리들을 세며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그의 세 보장관 중 이보관이 조심히 내실 안으로 들어왔다.

알리는 소리도 없었으나 노인은 그 행동을 탓하지 않았다.

여전히 정원을 응시한 채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떠했느냐.”

“이상합니다. 주명윤의 저택에 심어 놓은 자들이 오늘 하루 집 안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아무도 시신을 본 이가 없습니다.”

미간을 찌푸린 노인이 뒤를 돌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 무사들을 스물다섯이나 보냈는데. 그 시신이 다 어디 갔어. 백가 놈들이 땅에 파묻기라도 했다는 거냐? 백가 무사단의 숙소도 확인하였어?”

“네. 애초부터 무엇을 숨길 수 없는 곳으로 배정했다 합니다. 아니면 혹시 그 많은 주씨들을 죽인 게 확인될 경우 두 번째 전쟁이 발발할 위험이 있으니 영력으로 시신을 모두 태워 버린 건 아닐까요?”

“갔던 놈들이 모두 죽은 건 확실한 것이냐.”

“네. 호위들의 몸속엔 빠짐없이 흑색충이 심어져 있어, 생사를 이쪽에서 곧장 알 수 있습니다.”

“아무런 낙인을 찍지 않은 것도 확실하고?”

“네. 모두 정식 호위대로 삼기 전이고, 이 일을 무사히 마치면 낙인을 찍어 주려 하였습니다.”

“……그럼 배후를 알 방법이 없으니 그냥 시신을 태운 것인가? 하지만 주가의 영역에서 벌어진 일이니 그게 누구의 짓이든 내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음을 알 텐데.”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아직은 다시 전쟁을 벌일 생각이 없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말이 육가 연합이지, 한 번도 뭉쳐 본 적 없는 이들이 함께했으니 이권 다툼도 상당할 테고요.”

“…….”

잠시 침묵하던 노인이 확답을 받듯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 시신들의 정체를 특정 지을 수 있을 만한 게 아무것도 없는 건 확실하지?”

“네. 하지만 만약 주명윤이 시신들을 보았다면 알아차렸을지 모릅니다.”

“명윤은 괜찮다. 명윤이 봤다면 차라리 내게 와 진실을 물을지언정 백가 쪽에는 정체를 숨겼을 테니까.”

그제야 조금 안심한 듯한 노인이 이보관에게 턱짓했다.

“알았다. 그만 가 보거라.”

“네.”

“아니, 잠깐. 그분께 영단은 가져다드린 것이냐? 오늘 기분이 어떠셨느냐.”

“……영단은 드렸지만 조금 부족하셨는지, 시녀가 한 명 사라졌습니다.”

“한 명뿐이냐?”

“네.”

“그럼 되었다. 가 보거라.”

“네.”

이보관이 허리를 숙이고 나간 후에도 노인의 찌푸려진 미간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시간이 늘 모자랐다.

그 와중에 아들은 그리 영단을 먹였음에도 아직 탈피조차 치르지 못했으니.

‘반드시 그년이 필요해. 그년의 그 영력이. 그러려면 혹시 모르니 경합에서 더 확실히 이길 수 있도록 손을 써 놔야겠어.’

연회장에서 발견했던 그 불꽃 같은 영력을 떠올리며, 노인의 가느다란 눈이 매섭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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