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254)

“전 뭐든 저보다 월등한 분이 아니시면 혼인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가주님께선 제게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여 주신 적이 없으시지 않습니까.”

이런 말을 하게 되어 지극히 안타깝고 유감이라는 세화의 시선이 소가주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고 떨어졌다.

“탈피도 제가 먼저 했고 말입니다.”

한 번도 제가 들을 거라 생각해본 적 없는, 비웃는 듯한 어투에 소가주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지금 내게 뭐라고…….’

“물론 저는 신영의 명이라면 짚을 짊어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일 또한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혼인만큼은, 여인으로서 더 나은 사내와 혼인하고 싶다는 꿈을 꾸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지 않나요?”

세화가 목소리를 떨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저 혼인만큼은, 소가주님보다 더 나으신 그분과 하고 싶은, 어리석은 여인의 마음을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너무 황당해 헛웃음조차 흘리지 못한 주경현이 입만 뻐끔거렸다.

‘내 귀가 잘못된 것인가. 지금 나보다 더 나은 이가 뭐가 어쩌고 어째?’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제가 혼인하고 싶다는, 소가주님보다 더 뛰어나다는 그분도 신영께서 제 혼사의 상대로 말씀 주셨던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세화의 시선이 흘끗 마당에 그득 쌓인 예물에게로 향했다.

“하여 신영의 명을 어기는 것이 아니고, 이 예물 역시도 그에 따라 주시는 예물로 생각하면 될 듯하니 이것은 이대로 두고 이만 돌아가시지요.”

“…….”

세화의 시선이 예물을 바라볼 때 주경현의 오감은 주변에 멈춰 선 수많은 이들을 향했다.

아닌 척하면서도 모두가 귀를 연 채 집중해서 이 대화를 듣고 있었다.

어찌 그런 이들 앞에서 감히 주가의 소가주보다 더 낫다는 얘기를 말끝마다 이리 반복하는가.

‘네가…… 죽고 싶어 환장하지 않고서야.’

“어서 돌아가 주십시오. 좋은 답변을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해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송구하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더 뵙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안타깝기 그지없다는 듯 세화가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 돌아서던 순간이었다.

‘누구 마음대로!’

세화의 말에 눈이 뒤집힌 주경현이 작은 어깨를 거세게 잡아챘다.

“누구냐. 그자가 누구야! 대체 누군데 신영께서 너를 그자와 맺어 주려 하셨다고 거짓을 말해!”

“아!”

세화가 아픔에 눈살을 찌푸렸으나 주경현은 그 표정이 전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손안의 어깨를 흔들며 세차게 다그쳤다.

“통정이라도 했느냐? 사내를 접했어? 그래서 갑자기 내게 이따위로 태도를 바꾸었느냐?!”

그 순간 누군가 그런 주경현의 손목을 부러뜨릴 듯 잡아채 뒤로 꺾었다.

“악!”

그 단말마 같은 비명에 소가주의 비밀 호위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검을 빼 들었다.

챙!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자 주변에서 이 일을 지켜보고 있던 하인들이 히익, 비명을 지르며 멀어졌다.

“너, 넌……!”

“이따위 언사가 주가 소가주의 것이냐? 그렇다면 주가의 미래도 알 만하구나.”

“악! 놓아라. 이 손 놓지 못해?!”

저를 향한 호위들의 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백기하가 마치 쓰레기를 내던지듯 쥔 손목을 옆으로 치워 버렸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한 주경현이 땅으로 곤두박질치듯 쓰러지려던 찰나 간신히 호위가 그 몸을 붙들었다.

‘이, 이 연놈들이 지금……. 주제를 모르고 감히 나를…….’

지금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눈들이 대체 몇이던가.

그 사이에서 망신을 당했다는 분노가 주경현의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조금 전 세화가 말한 그자가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옥과 같은 피부. 짙은 눈동자. 사내다운 위용의 눈썹과 깎은 듯 유려한 콧대. 남자인 그가 보아도 미려한 외모에 지체 높아 보이는 위엄까지.

가파르게 빨라지는 호흡을 내리누르며 주경현이 주세화와 백기하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백, 가주, 이십니까?”

주경현은 제 용모에 몹시 자신이 있었다.

아직 탈피하지 못해 영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이렇게 수려하지 않나.

세화 저 아이도 탈피 후에 저리되었으니. 자신은 탈피까지 마치고 나면 얼마나 더 괜찮아질까.

그는 지금껏 제가 탈피만 하고 나면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대단한 위용을 지니고, 멋진 모습으로 혈족들의 존경을 받으며 살아갈 줄 알았다.

그 마음은 지금도 달라진 곳이 없었지만, 어째서일까.

백기하의 얼굴을 마주하는 지금, 어쩐지 제가 너무 초라하고 볼품없어진 것 같았다.

모든 이의 앞에서 굴욕적으로 내던져질 때보다 지금, 그의 속이 더욱 뜨끈하게 끓어올랐다.

‘처음부터 저 아이는 내 것이었다. 한데 갑자기 나타나 저 아이를 가로채겠다고? 누구 마음대로?’

“세화야. 너같이 총명한 아이가 이리 어리석게 굴다니. 군주의 말씀은 절대적이지만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는 것을 모르느냐.”

이를 사리문 주경현이 표정을 관리하며 무겁게 목소리를 냈다.

“네가 말한 그 사내가 아마 여기 백가주이신 듯한데. 그때도 지금도, 신영께선 내게 너와 백가주의 혼인에 대해 일말의 언급조차 하신 적이 없다. 그건 아마 그 혼약에 대한 말씀이 그 자리에서 무산되었기 때문이겠지.”

“…….”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내 말이 맞나 보구나. 하면 그 이후 신영께서 너와 내 혼약을 다시 결정하신 것인데, 그분의 마지막 명을 따라야지. 어찌 이리 억지를 쓰는 것이냐.”

주경현이 아이를 타이르듯 천천히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혼인은 부모께서 주시는 선물이고, 신영의 혼사령은 주가 혈족으로서 응당 따라야 할 지엄한 규율이다. 더는 막무가내로 굴지 말아라. 신영께서 나와의 혼사를 명하셨으니 너는 더 이상 백가주와의 혼사를 논할 수 없다.”

“하지만 전 꼭 이분과 혼인하고 싶은 것을요.”

“……뭐라?”

“백가주와 한 저택에 머무르며, 이분께서 소가주님보다 얼마나 더 뛰어나신 분인지를 제 눈으로 확인했는데 어찌 이제 와 소가주님과 혼인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주세화!”

그때, 몹시 곤란한 얼굴로 세화가 제안했다.

“그럼 이렇게 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소가주님께서 이런 제 결정을 이해하시지 못하는 것도 이해하니, 저와 경합을 벌여 보시는 겁니다.”

“뭐? 경합?”

“예, 뭐든 상관없습니다. 저를 이기신다면 어떤 변명도 없이 소가주님과 혼인하겠습니다. 만약 제가 이긴다면 소가주님께서도 제 결정에 더 이상 말을 얹지 마시고요.”

“…….”

“종목을 결정하는 것 또한 직접 하셔도 됩니다. 제가 선택하였다가 승복하실 수 없느니 이 경합은 무효라느니 말씀하시면 안 되니까요.”

“너……!”

“어떠십니까. 하시겠습니까?”

당장 저 아름다운 뺨을 내리쳐서라도 되바라진 언사를 멈추게 해야하는 게 아닐까.

소가주의 주먹이 모멸의 감정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의 이런 태도는 더 이상 아량으로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굳이 저런 일에까지 말려들 필요가 있는가? 저런 발칙한 년을 꼭 혼약자로 맞아들여야 하는가?

‘당연히, 그래야지.’

화가 나 말조차 제대로 낼 수 없던 주경현의 눈빛이 살벌하게 떨렸다.

‘이렇게 된 이상 내, 너를 반드시 내 혼약자로 삼아야겠구나. 반드시 널 저택으로 끌고 와 채찍질을 해서라도 그 입을 고쳐 놓아야겠어.’

붉으락푸르락 변해 가는 얼굴을 한 소가주가 세화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며 물었다.

“내가 널 이기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했으렷다?”

“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증인이 되어 줄 것입니다. 아, 다만.”

“또 뭐냐.”

“혹 소가주님께서 종목까지 직접 고르셨음에도 승패를 인정하지 않으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일을 크게 벌였으면 합니다. 주가의 혈족들을 모두 초대해 증인으로 삼으심이 어떠신지요.”

“너!”

결국 소매를 털어 낸 그가 이를 악문 채 내뱉었다.

“그래. 이 모든 이들이 증인이다. 백가주도 들으셨습니까. 증인이 되실 생각이라면 백가주께서도 이후 승패에 다른 말이 없으셔야 할 겁니다.”

백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공으로 낮은 웃음을 꺼내 놓은 주경현이 형형한 눈으로 세화를 노려보며 매듭지었다.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거라. 곧 신영의 이름으로 경합을 열 터이니. 네 입으로 종목도 내가 고르라 했으니, 너야말로 이후에 다른 말을 해선 안 된다. 알겠느냐?!”

“그럼요.”

깔끔한 대답에 주경현의 시선이 더욱 차갑고 날카롭게 굳어졌다.

* * *

“뭐라?! 그렇다고 예물은 그대로 놔둔 채 그딴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받아들이고 와?!”

노인이 탁자를 거세게 내리쳤다.

“아버지, 이것은 제 잘못이 아닙니다.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세화 그것이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데,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했던 것입니까? 신영의 이름을 들먹여 봐야 제 것도 아닌 권력을 등에 업고 여인을 취했다는 오명이나 뒤집어쓰지 않겠습니까?”

“그년이 일부러 그러는 것이다! 그러니 그따위 말을 꺼내기 전에 네가 먼저 그년을 끌고 조용한 곳으로 갔어야지! 머리채를 잡아끌고 뺨을 매우 쳐서라도 입을 닥치게 해 놓았어야지!”

노인의 고성에 주경현이 답답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아버지. 그러지 말고 지혜를 빌려주십시오. 다행히 그것이 완전히 미치지는 않아 종목을 제가 선택하라 하였으니 원하는 대로 그년의 방자한 코끝을 깎아 내면 그만입니다.”

그러면서 주경현이 노인을 향해 거대한 부채로 바람을 부쳐 주고 있는 삼보관에게 눈치를 주었다.

삼보관이 그 시선을 받고 조심히 덧붙였다.

“신영. 이번 일은 소가주께서 하신 방법이 맞는 듯합니다. 그리 지켜보는 눈이 많았는데, 소가주께서 무얼 하실 수 있겠습니까. 퇴로가 막혔으니 앞으로 나아가셔야 할 수 밖에요.”

“하아.”

노인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해야 할까.’

영력을 흡수하기 위해 반드시 세화를 끌고 와야 하는 노인의 머리가 복잡했다.

조금만 더 빨리 탈피했다면 오죽 좋았을까.

이렇게 변할 것을 그때 알았다면 백기하와의 혼사 동맹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을 것을.

“그럼 넌 무슨 종목으로 경합을 벌이면 좋겠느냐.”

노인의 물음에도 소가주는 당장 무어라 대답하지 못했다.

그 역시 세화가 뭘 잘할지 모르니 종목을 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버지의 혜안에 기대 여쭙고자 했습니다. 제가 뭘 하면 좋을까요?”

노인의 고목 같은 얼굴에 짙은 피로감이 스며들었다.

아무나 이겨서는 안 되고 그년이 이겨서는 더더욱 안 되는 경기.

반드시 제 아들이 장원의 자리에 올라서야 하는 경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뭐가 있을까.

제 아들은 뛰어난 검 실력을 가졌으니 검으로 하면 좋으련만.

‘아니야. 그년은 탈피를 했고 저 녀석은 아직 탈피를 하지 못했으니 위험할 수도 있어.’

적룡의 영단을 빼앗아 갈 때 보였던 영력의 크기가 작지 않았다.

혈족들의 능력은 영력의 크기에 비례하여 나타나므로 그 전엔 제 아들이 그년보다 얼마나 더 뛰어났건, 탈피가 뒤처진 이상 검으로는 이길 방도가 없었다.

그럼 무어로 겨뤄야 할까.

시를 짓거나 그림 실력을 겨루는 것은 평가하는 이의 주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그도 마땅치가 않고.

“백가주도 그 자리에 있었다 하였느냐.”

“네.”

“너. 내가 주었던 백가의 영단은 얼마나 흡수하였느냐.”

“모두 흡수하였습니다.”

“그러냐.”

오랜 시간 고민하던 노인이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년은 무기라곤 잡아 보지 않았을 테지만 넌 검 수련과 동시에 궁 수련도 오랜 시간 해 왔고. 그거라면 탈피한 이와 탈피하지 않은 이가 공정하게 겨룰 만하다 여겨질테니.”

“그 말씀은-.”

“그래. 백가주가 여기 있어 허튼 수를 쓸 수 없는 경기로 정했다고 하고.”

노인이 제게 커다란 부채를 부드럽게 흔들고 있는 삼보관을 보며 명령했다.

“가서 그 발칙한 년에게 전해라. 경합 종목은 활이라고! 신영의 이름으로 사냥 대회를 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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