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신의 품 안에서 영단이 담긴 목함이 나온 것이다.
‘신룡의 영단을 가져가려 잠입한 것으로 보이는데. 하지만 대체 왜? 다시 가져오라 말씀하셨다면 기꺼이 바로 바쳤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내 딸이 잃어버린 것으로 상황을 만드시려 한 거다. 책임을 뒤집어쓰도록.’
대체 어째서 신영은 그렇게까지 하시는 건가. 수하의 여식에게 대체 왜.
끊임없이 제 수하들을 시험하고 나서야 안심하는 신영의 의심병에 대해서는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당장 이 저택 안에 숨어 있을 수많은 간자의 존재에 대해서도 익히 알고 있었고.
주가 혈족들은 워낙 오랫동안 풍요에 젖어 들어 의무도 책임도 잊어 가고 있었다.
개인의 평안과 이득 앞에서 신의와 충성 따윈 무게를 잃은 지 오래라, 주명윤은 지금껏 신영께선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고 그의 행동을 이해하려 했다.
하나 이번만큼은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이미 소가주 대신 백가로 가기로 한 딸을 일부러 죄인으로 만들어 대체 어디까지 이용하려고.
주명윤이 그렇게 비통한 마음으로 신영에 대해 회의감을 불태우고 있을 때.
“그럼 아가씨께선 탈피를 마치신 지 얼마 되지 않으신 겁니까?”
백가 재상의 쉼 없는 목소리를 듣는 백기하의 표정도 덩달아 굳어 가고 있었다.
“정말 놀랍습니다. 영력의 제어가 퍽 자유로우셔서 저는 탈피하신 지 시간이 꽤 지났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재상. 식사 중에 웬 말이 그리 많으냐. 아가씨의 식사를 방해하지 말고 어서 먹기나 해라.”
“네, 가주. 아 참. 아가씨, 제가 제때 감사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어젯밤에 절 구해 주시기까지 하셨는데 오늘 또 이렇게 식사에까지 초대해 주시고.”
“재상.”
“네, 먹겠습니다. 가주.”
“…….”
입은 닫았으나 백만용은 여전히 묻고 싶은 것도 많고 듣고 싶은 말도 많은 듯했다.
집요한 시선이 제 맞은편에 앉은 세화를 끊임없이 흘끔거렸다.
그때마다 백기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미장께서 혹시 이런 기분이셨던 건가.’
세화의 고개가 틀어지거나 돌려질 때마다, 마치 새로운 풍경을 목도하기라도 한 듯 멍하니 풀어지는 백만용의 눈빛이 그렇게 고까울 수가 없었다.
힘이 들어가는 백기하의 손아귀 에서 젓가락이 부러질 듯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렇게 그가 커다란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사이, 세화의 차가운 태도에 안절부절못한 듯 앉아 있던 백만용은 이번엔 주명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원로 어르신께선 입맛이 없으신 겁니까?”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주명윤이 한발 늦게 반응했다.
“……예?”
“혹 저 때문이신가 하여. 어제는 제가 사정도 모르고 괜한 말을 하였습니다. 생각이 짧아 사실이 아닌 것을 비난하여 심기를 흐트러뜨린 점 사과드립니다.”
“아닙니다. 그리 생각하실 만했지요.”
“헌데 원로 어르신. 무엇 한 가지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십시오.”
“혹시 원로 어르신의 선대 혹은 선선대 중 백가 출신이신 분이 있으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가는 보통 같은 주가, 아니면 황동 사슴의 천가와 연을 맺습니다.”
“그, 그러시군요. 그럼 혹시 장부인께서는요. 선대나 선선대에 백가의 일원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없으시다고요? 정말, 정말입니까? 하면 그 윗대에는요?”
주명윤의 미간이 잠시 찌푸려졌다가 펴졌다.
“없습니다. 저의 집안도 그렇고 부인의 집안도 그렇고 한 번도 백가와는 혼사가 이루어진 적 없습니다.”
“헙.”
“?”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시선이 잔뜩 흔들리기 시작한 백만용이 떨리는 목소리를 한 번 더 꺼내 들었다.
“그, 그럼…… 혹 주, 주가에선, 간…… 간통에 대해서도 처벌을 받거나 합니까?”
“?!”
‘이 미친놈이. 어제부터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자신의 혈족에 대해 묻고 곧장 간통에 대해 물었으니, 평범한 질문으로 들릴 리가 만무했다.
무섭도록 낮아진 목소리를 백만용을 향해 꺼내 놓았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지금 제가 간통으로 태어난 서자가 아닌지가 궁금하신 겁니까? 아니면 제 아이들이 간통을 저질러 태어난 서자인가 하는 것이 궁금하신 겁니까?”
백만용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일전에 책에서 주가는 남녀의 만남에 대해 다소 개방적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데 주가를 방문해 본 적이 없다 보니 그것이 사실인지 조금 궁금하여……. 너무나 실례되는 질문을 드린 듯합니다.”
백만용이 금세 꼬리를 내리자 쌍심지가 돋았던 주명윤의 표정도 조금 가라앉았다.
조금 전에 반복된 사과도 그렇고.
어제 백기하가 이 재상에 대해, 아직 나이가 어려 생각이 깊지 않다 덧붙이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주가가 다소 그런 경향이 있긴 하나 혼인만큼은 신영의 주관하에 이루어지는 결합이라 간통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그렇군요.”
“네. 게다가 혹 섞여서는 안 되는 피가 섞여 사생아가 태어났다 하더라도 영력의 색으로 바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간통을 저지른 부모와 함께 주씨 성을 박탈당한 채 영역 밖으로 추방당하게 됩니다.”
“흡!”
“?”
주명윤의 설명에 대단히 충격을 받은 듯 백만용이 숨을 삼켰다.
왜 그러냐고 묻는, 괜찮냐는 질문에도 침묵하는 그의 눈가가 미미하게 붉었다.
세화를 바라본 그가 목숨을 걸고 영역을 지키는 투사처럼 비장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있지도 않은 어떤 중대한 비밀을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켜 주겠다는 것처럼.
“…….”
저 재상이 왜 저러는지는 몰라도 세화는 저 백가 재상의 시선이 대단히 신경에 거슬리는 중이었다.
길고 아름다운 속눈썹을 나비 날개처럼 애처롭게 깜빡이며 생각했다.
‘역시 겁만 줘서는 안 됐던 것 같은데. 정신을 좀 차리도록 오늘 밤에 팰까? 아니면 그래도 어제는 잠을 설쳤을 테니 내일?’
그때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방해꾼의 발소리가 빠르게 복도를 걸어 가까워졌다.
시종의 그러한 도착이 이젠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그러나.
“무슨 선물이라고?”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하던 주명윤의 목소리가 벼린 듯 날카로워졌다.
기가 찬 얼굴의 주명윤을 향해 시종이 조심스럽게 정정했다.
“선물이 아니라 예물입니다, 원로 어르신. 지금 신영께서 보내신 예물이 마당으로 들어오고 있는데 어찌하면 될까요.”
주명윤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어젯밤에 내 집을, 그것도 딸아이의 별당을 습격한 이들이 누구인지 뻔히 아는데, 오늘 예물을 보내셨다고?’
“누가 가져온 것이냐. 신영의 삼보관 중 한 명이 온 것이냐?”
“아닙니다. 소가주님께서 직접 가져오셨습니다.”
“…….”
세화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주명윤이 그런 세화의 어깨를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넌 가만히 있거라. 자식의 혼약은 원래 부모들의 일이다.”
“제가 할 수 있어요.”
“아니야. 나도 이 이상 참을 수가 없구나. 다른 건 몰라도 일단 너에 대해서만큼은 내가 신영께 상황을 분명히 해야겠다. 그러니 비켜 보아라. 소가주께도 아비가 가서 직접 말씀드릴 것이다.”
세화가 고개를 저었다.
“소가주님의 성품을 봐서는 제가 나서는 게 맞을 겁니다. 아버지께서 곤란해지실 수 있으니 오늘은 나오지 마시고 저에게 한 번만 맡겨 주세요.”
“세화야!”
그런 주명윤의 굳어진 손을 붙잡은 세화가 백기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모두들 식사를 하고 계시지요.”
“아니야. 그대가 가면 나도-.”
백기하가 일어서자 백만용도 일어섰다.
“가주께서 가시는데 어찌 제가 빠질 수 있겠습니까.”
“……재상. 너는 앉아 있어라.”
“아닙니다. 가주, 원로 어르신, 그리고 아가씨. 제가 다 해결하겠습니다. 저만 믿으십시오.”
백기하의 실낱같은 인내심이 그 순간 뚝 끊어졌다.
“아니. 이게 무슨 상황인 줄 알고 네가 해결을 하느니 마느니-.”
그때, 무언가를 고심하던 세화가 백기하를 돌아보며 입을 열다가…….
“혹시 모르니 당신은 조금 있다가-.”
도로 닫았다.
“…….”
“…….”
“……당신?”
그녀의 시선이 제 말실수를 깨닫고 흔들렸다.
“……백가주께선 조금만 더 여기 계시다가 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반 각 정도 후에요.”
언제 화가 났었냐는 듯 빠르게 미장의 눈치를 살핀 백기하가 침착한 목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그러겠습니다.”
* * *
홀로 움직인 세화가 마당에 도착했을 때, 주경현은 마치 이곳이 제집인 양, 싣고 온 물건들이 놓일 장소를 지정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잠시 어색했던 것을 보면 직접 저 예물을 가지고 여기 온 것이 소가주의 뜻은 아닌 듯했다.
“세화야.”
하지만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하기만 했다.
“이게 다 뭔가요?”
“전해 듣지 못했느냐? 예물이라고 분명 말하였는데.”
“……예물이요.”
“그래. 신영께서 곧 혼약 날을 잡아 주실 것이니 너도 더 이상은 경망하게 밤에 나가거나 하지 말고 얌전히 저택에서 머물고 있거라.”
“혼약 날을 직접 잡아 주신다고요?”
“그래. 무엇 하느냐. 신영께서 이 모든 것을 직접 챙기셨다는데. 어서 와 은혜에 감사하여야지.”
“소가주님.”
세화가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섰다.
“소가주님. 제가 소가주님을 위해 이 말씀만은 드리지 않으려 하였는데.”
어이가 없으니 웃음이 슬며시 새어 나왔는데, 그 모습을 보는 주경현의 표정이 멍하니 붉어졌다. 울대가 조금 요동치기도 했다.
“전 혼인하고 싶은 분이 이미 있습니다. 당연히 소가주님은 아니시고요.”
그러느라 한발 늦게 주경현이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뭐, 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