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서 멈추지 않은 화살이 백만용의 다리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또 한 발.
퍽!
“!!”
또 한 발.
퍽!
사색이 된 백만용의 얼굴이 벌벌 떨리다 이내 누렇게 가라앉았다.
차라리 날아오는 화살에 맞서 싸울 수라도 있는 상황이면 좋으련만.
영력으로 그를 고정한 화살은 빠지기는커녕 부러지지도 않았다.
‘대체 왜 이토록 전력을 다하는데도 화살이 뽑히지 않는 것이냐.’
영력 차이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저분이 백가의 무사가 아니신가? 아니면 나를 모르시나?’
제 앞엔 이미 고슴도치가 된 십수 구의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
제 정체를 몰라 적이라 오해하고 있기라도 하면…….
‘나 역시 저런 꼴이 되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끔찍한 상상에 백만용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 아냐. 진정하자. 한 발의 실패도 없이 저놈들을 백발백중으로 도륙하신 분이신데. 날 죽이려 하셨다면 벌써 죽이셨겠지.’
한데 그럼 난 대체 왜 이렇게 벽에 꽂아 놓으신 거지?
옷을 찢고 달아나다가 혹시 저 화살이 제 이마를 꿰뚫기라도 할까 봐 백만용은 눈을 꾹 감은 채 벌벌 떨었다.
쉼 없이 마른침을 삼키는 울대가 격렬히 요동쳤다.
그러던 어느 순간, 우레처럼 공간을 진동시키던 소리가 멎어 들었다.
질끈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떠보았다. 저 멀리 지붕 위로 가느다란 그림자가 훌쩍 아래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몸놀림이 어찌나 가벼운지. 무게라곤 느껴지지 않는 그 모습에도 놀랐으나.
“!!”
착지의 순간 그림자의 발밑을 맴돌던 하얀 회오리를 보고 제일 놀랐다.
그건 앞구르기 뒤구르기 물구나무서기를 하면서 보아도 확실한 백가의 영력이었다.
‘그렇지. 역시 백가 혈족이시지! 이 신위는 백가만이 보일 수 있는 것임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이거야!’
그림자의 주변엔 여전히 꽃잎처럼 흔들리는 보랏빛 힘의 잔재가 신비롭게 떠올랐다가 가라앉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 그림자가 한 발 한 발 그에게 가까워졌다.
백가의 무사인 것도 확신하게 됐겠다. 저를 이리 괴롭힌 이유야 어쨌든, 영력이 이리 대단하시니 혹 또 다른 신수는 아니실까.
폭발하는 기대감 사이에서 그림자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 안력을 높였다.
곧 모습이 식별될 수 있는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그렇게, 역광의 음영으로 인해 가려졌던 얼굴이 천천히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
백만용은 제가 본 얼굴을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 떴다.
‘??? 뭐지. 내 눈이 미치기라도 한 건가.’
드러난 그림자의 정체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뜻밖인데.
‘……말도 안 돼.’
분명 이미 보았던 얼굴인데.
처음 보았을 때와 지금 제 앞으로 걸어오는 이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마주했던 그때도, 분명 아름답다고 생각하긴 했다.
투명할 정도로 맑게 빛나던 얼굴은 정원을 가득 메운 불두화 마냥 여리고 애처롭게 보였었으니까.
허나 지금 보는 얼굴은 그때와 어찌 이리도 달라 보이는 것일까.
달빛을 등진 채라 얼굴엔 아직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 어둠 사이에서도 그를 응시하는 적자줏빛 눈동자는 존재감이 확실했다.
사인화처럼 붉디붉은 입술 색이 제 시선 안쪽으로 화살처럼 날아와 틀어박히는 듯했다.
채 사그라들지 않은 불꽃 같은 영력을 몸에 두르고 있는 그녀는 마치 홀로 너른 연못을 지배하는 거대한 홍련과도 같았다.
그 고혹적이고 요사할 정도의 매력에, 머리가 텅 비어 버린 백만용이 간신히 마른침을 삼켰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주, 주가 아가씨?”
세화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꺾이던 순간 백만용의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정, 정말 워, 원로댁 아가씨이신 겁니까?”
* * *
스겅!
스산하게 번뜩이는 검이 빠르게 허공을 갈랐다.
그와 동시에 검은 옷을 입고 복면으로 얼굴을 빈틈없이 가리고 있던 이가 소리도 내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허공으로 피를 털어 낸 백기하는 제 앞에 쓰러진 이를 발로 차 치우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얼굴은 한설보다 더 차고 날카로웠다.
“끝났나?”
귀를 기울이는데, 타앙! 거대한 영력이 폭발하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백기하가 다시금 뒤로 물러서며 힘을 끌어 올렸다.
휘오오오오-
영력이 섞인 회오리들이 좁은 구역을 감싼 채 빠르게 한 방향으로 휘몰아쳤다.
마치 벽처럼 공간을 둘러싼 바람들은 내부에서 퍼져 가는 소리를 제 안으로 빨아들였다.
“그럼 당신도 도와줄래요?”
그녀가 그 말을 할 때는 대체 뭘 부탁하려나 했는데.
백기하는 더 나아가지 않고 소음을 빨아들이는 결계에 더 집중했다.
‘활을 쏠 때 소리가 나지 않게 하는 법이 어렵지 않은데, 다음에는 그것을 가르쳐 줘야겠군.’
그 일을 생각하는 단단한 입꼬리가 조금 느슨해졌다.
‘어쩔 수 없이, 결코 본의는 아니지만. 다시금 그녀를 뒤에서 안고 가르쳐 줄 수밖에. ……진짜 어쩔 수 없는 부분인데 설마 미장 어른께 들키진 않겠지?’
아니면 이전처럼 그녀를 이불에 보쌈해 뒷산으로 달아나지 뭐.
“일이 끝나면 일일이 인장도 찍어야 하는데 그것도 좀 도와줘요. 칼보다 바람으로 새기는 게 더 세밀할 테니.”
인장을 찍어야 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당찬 듯하면서도 부끄러워 보이고, 감추고 싶은 듯하면서도 턱을 치켜들고 도와달라고 말하던 세화가 떠오르자 백기하의 표정이 조금 더 허물어졌다.
‘예전에는 뭘 해 줘도 좋단 소릴 안 하더니 이젠 먼저 도와달라고도 하고.’
잠시 예전의 그녀를 떠올려 보는 사이 시위 소리가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점차 고요해졌다.
‘끝났나 보군.’
백기하는 일이 틀어질 경우를 대비해 지원하기 위해 모여 있던 신영의 무사들의 시신을 질질 끌어 한곳에 모아 놓았다.
그런 후, 결계를 유지하며 세화가 있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말이 도와달라는 것이지, 소리를 죽이도록 결계를 만들어 달라는 것은 그녀가 일을 진행하고 있는 동안 잠시 빠져 달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대가 누굴 얼마나 죽이든, 내가 지금껏 묻혀 온 피의 숫자보다 많을 순 없는데. 귀엽기는.’
하는 일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듯했으니, 그녀의 입장으로는 그가 이리 빨리 돌아오는 것도 싫을 것이다.
허니 다친 곳 없이 무사한지만 확인하고 조금 더 숨어 있어야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불두화 사이를 가로지를 때였다.
그의 시야로 저 멀리 백만용이 벽에 꽂혀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결국 아가씨께서 한번 손을 봐 주셨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소변을 지리진 않았는지 모르겠네. 저 녀석도 이제 입조심을 좀 하려나.’
한데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지는 재상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사색이 되어 있을 거라 예상했건만 공포에 질렸다기보다는 어쩐지 매우 놀란 듯 보였다.
눈가를 장식하는 미미한 홍조 역시도 제법 부끄럼을 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응? 부끄럼??’
그사이 사뿐한 발소리와 함께 세화가 재상에게 가까워졌다.
그와 동시에 새빨갛게 붉어져 타오르는 백만용의 얼굴이 더욱 선명해졌다.
재상이 되기까지. 재상이 되고 나서도.
백만용의 여러 실수들을 한 번도 책망하거나 꾸짖지 않고, 형이 동생을 이끌 듯 차근히 알려 주었던 백기하의 표정이 처음으로 더없이 냉랭하게 굳어졌다.
‘아니, 저, 새끼가?’
* * *
“뭐라? 백가의 결계?”
“……예, 신영.”
“그 밤에 그년의 내당에서 백가의 결계가 왜 치솟아!”
“이후 알아보니 백가 재상이 그들에게 제공되는 물품의 질이 너무 떨어진다고 불평불만이 많아 방을 바꿔 주었다 합니다.”
“왜 진작 그 보고를 하지 않았다더냐! 간자로 심어놓은 것들이 딴마음을 먹은 게 아니냐!”
“저급의 물품들 때문에 소동이 일어 방까지 바꿨다는 것이 알려지면 두 가문의 위신이 모두 떨어지니 조용히 움직였다 합니다. 일이 벌어지고 난 후 소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퍼지게 된 것이고요.”
“이런 제길!”
거세게 탁자를 내리친 신영이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한번 이렇게 되었으니 영단의 수거는 더욱 어렵게 될 것이 아닌가.
영단을 수거한 후, 선물로 내려 준 영단을 도둑맞은 책임을 물어 명윤의 여식도 끌고 와 영력을 빨아먹으려 했는데 그것도 어렵게 되었고.
‘게다가 백가의 일원을 공격한 꼴이 되어 버렸으니. 이 일을 어찌한다.’
“보고한 그 간자 년부터 죽여 버려라. 하나가 그 꼴이 되고 나면 나머지도 경각심을 가지고 앞으론 더욱 상세히 입을 놀리겠지.”
“네.”
“그곳에 갔던 놈들은 그러면, 모두 죽은 것이냐?”
“……네.”
쾅!
노인은 탁자를 몇 번이고 두들겨도 분이 풀리지 않는 것처럼 욕설을 쏟아 냈다.
“백가에서 분명 이번 습격을 묵과하진 않을 텐데.”
험악한 시선을 몇 번이고 허공으로 쏘아 댄 노인이 이를 갈았다.
“일단 명윤의 여식과 경현이의 혼약식을 준비해.”
소가주의 혼약자가 되고 나면 신영의 가문에 부합하는 격식과 예법을 배우기 위해 보름간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 채 저택 내관에서 지내야 한다.
‘백기하만 여기 없었어도 뒷일이야 어쨌건 간에 끌고 와 죽기 직전까지 영력을 뽑아냈을 텐데.’
그 어린것이 그런 모습으로 탈피할 줄 알았다면 다른 희생양을 세울지언정 그년을 백가행에 보내겠다 하진 않았을 것이다.
‘백가에 보내야 하니 힘을 죄다 뽑아내지는 못할 거고. 그래도 그것의 힘이 줄어든 만큼 내 힘이 늘어나면 일단 적룡의 영단은 다시 소유할 수 있겠지.’
“시간이 없으니, 명윤이 거절할 수 없도록 내일 아예 예물을 챙겨 보내라.”
“네.”
그렇게 말하는 노인의 일그러진 표정 사이로 집요한 눈동자가 형형히 빛났다.
* * *
아침 식사의 분위기는 딱딱하다 못해 침체되어 있었다.
밤새 다녀간 불청객들의 시신을 확인한 주명윤 때문이었다.
백기하와 세화는 침통한 얼굴의 주명윤을 보며 평소 같지 않게 조용히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백기하는 그 불청객들을 제가 죽였다 고백했다.
백가에 원한을 품은 주씨 중 누군가가 백가 재상을 습격한 것 같다고만 얘기했으나 시신들을 확인한 주명윤은 곧장 알았다.
이건 신영의 짓이다.
‘게다가 백가 재상을 노린 것도 아니다. 내 딸을 노린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