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숨을 쉰 백가 재상이 몸을 일으켜 창문을 닫고 침상으로 걸어갔다.
깔려 있는 침구는 새것이었다.
그다지 질이 좋은 물건은 아니었으나, 벽면으로 치워져 있는 이불보단 나았다.
원래 아가씨가 사용하던 이불은 그보다 급이 더 낮았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야 아가씨가 쓰던 침상에 함부로 누울 수 없어 하룻밤 정도는 앉아서 지내려 했지만.
“백사십 량조차 되지 못하는 침상이지만 사용하기 그다지 나쁘지 않으니 꼭 침상에서 주무십시오. 피로를 풀어드리기 위해 좋은 것을 준비해 놓았으니까요.”
하고 그 아가씨가 두 번이나 반복한 것이다.
그런 침상의 머리맡에는 고급스러운 목함이 놓여있었다.
내용물을 알 수는 없지만 가까이 두는 것만으로 피로가 풀리는 귀물이라고 했으니 범상한 것은 아닐 터였다.
‘아무리 목함을 잠가 두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이런 걸 이리 쉽게 내줄 수 있지? 내가 욕심을 부려 나쁜 마음을 먹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백만용이 심란한 표정으로 목함을 내려다봤다.
‘가장 진귀한 것들을 모두 제공했다는 말을 증명하기 위해 부러 이렇게까지 하는 건가? ……흥. 가식적이기는.’
일단 불을 끄고 누웠다.
한데 목함 가까이에서 눈을 감고 있을수록 정말로 피로가 풀리고 줄었던 영력이 차오르는 것이 아닌가.
‘…….’
정말로 좋은 것들을 챙겨 주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왜 이렇게 속을 시끄럽게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휴. 뭐. 별수 있나. 내일 사과해야지.’
불을 끄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었으나 백만용은 이런저런 생각들로 한참이나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데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가라앉아 있던 의식 사이로 그의 기감이 흔들렸다.
무언가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
순식간에 의식을 되찾은 재상이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바람을 다루는 호족의 특성상 감각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이 방 안에 누군가가 있었다.
백만용은 제법 뛰어난 무인이었으나 불행히도 상대가 더욱 뛰어났다.
‘대체 언제? 문이 열리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건만.’
다행히 그를 죽일 생각은 없는지 살기는 없었다.
하나 그에게 볼일이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그 인기척들이 점차 백만용의 머리맡으로 다가와 모이던 순간이었다.
백만용이 제게로 뻗어지는 손을 잡아채며 소리쳤다.
“누구냐!!”
그 손을 잡은 채 그대로 어깨로 들어 바닥을 향해 내던졌다.
쾅!!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침입자들이 일제히 칼을 빼 들었다.
챙!!
사방에서 어둠을 뚫고 날카로운 살기로 무장된 날붙이들이 스산한 소리를 내며 덮쳐들었다.
‘아니, 이것들이!’
불을 켤 새가 없었다.
되는대로 아무거나 잡아 제게로 쏟아지는 칼날들을 쳐낸 백만용이 창가를 향해 달려갔다.
부수듯 창문을 열어젖히고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 방 안을 확인했다.
“누구냐!!”
헌데 어쩐지 그들도 당황한 모양새였다.
쉽게 공격하지 못하고 서로를 바라보던 이들은 누군가 고개를 끄덕이자 백만용을 밀어젖히고 열린 창을 통해 우수수 빠져나갔다.
헌데.
“!!”
그렇게 빠져나가는 한 그림자가 침상 위의 목함을 빠르게 제 품 안으로 쑤셔 넣고 달아나는 것이 아닌가.
“안돼!!”
‘가뜩이나 가주 앞에서 상황도 모르고 경솔하게 입을 놀린 이가 되었는데, 남의 집 귀물을 훔쳤다는 누명도 쓰란 말이야?!’
백만용이 그 그림자를 향해 달려갔으니 상대가 달아나는 것이 한발 빨랐다.
“제길, 기다려!! 이리 안 와?!”
그 역시 그림자를 따라 창틀을 넘던 순간이었다.
“…….”
그 꼴을 먼 별관 지붕에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노란 달빛이 일어선 이의 등 뒤로 쏟아져 내렸다.
“그래. 암막을 쳐놓았으니 창을 열어야 했겠지.”
투명할 정도로 하얀 손이, 침착한 자세로 활을 들었다. 시위엔 화살 셋이 한 번에 걸려 있었다.
“네놈들이 오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발밑에서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누군가의 옷깃이 세차게 펄럭이며 흔들렸다.
하나 그 영력의 바람에 기와들이 달각거리며 날아갈지언정, 좁은 용마루에 올라선 가는 몸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표적을 응시하는 눈빛이 형형했다.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을 테다.”
흩어지는 쥐 떼처럼 제 방에서 빠져나오는 그림자들을 바라보던 세화가 이를 물었다.
탕―!
강하게 힘을 진동시키며 손을 놓자마자 영력이 실린 시위가 우레같은 소리를 내며 떨렸다.
보랏빛 불꽃을 입은 화살이 대기를 가르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 * *
“사단윤 그 새끼. 얼마나 독하던지. 살을 한 점 한 점, 포를 뜨는데도 네가 듣기라도 할까 봐 비명 소릴 내지 않겠다고 혀를 이로 잘라 삼켜 버렸더라고.”
영력을 머금은 화살이 동시에 세 그림자의 발목을 꿰뚫었다.
그 순간 힘이 폭발하며 허공으로 새빨간 살점들이 핏물과 함께 튀어올랐다.
“컥!!”
“결국 껍데기가 몽땅 벗겨진 채 평원에 개 먹이로 던져졌지. 사지가 잘린 채 말이야. 머리 가죽은 내가 벗겼지. 칼로 한 땀 한 땀 살가죽을 벗겨 내는 동안에도 잘 참던걸?”
조금의 틈도 없이, 또다시 세 개의 화살을 동시에 시위에 걸었다.
옷자락이 휘날릴 만큼 강하게 영력을 덧씌우고 살을 날렸다.
탕!
“흐억!”
빠르게 달아나는 그림자들의 무릎관절이 정확히 꿰뚫렸다.
퍽! 소리와 함께 다시금 영력이 폭발하며 다리가 끊어졌다.
안개 같은 핏줄기가 허공으로 뿜어져 올랐다.
그림자들이 비참한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지고 땅을 굴렀다.
신영의 무사였다가 후에 주경현의 무사가 되어, 처형장에서의 날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던 그 호위들이었다.
신룡의 영단을, 그 신영이 단 하루도 다른 이에게 맡겨 둘 턱이 없었다.
때문에 언제 그것이 도착하든, 영단이 그녀의 손에 들리는 날.
반드시 그 늙은이가 영단을 회수하기 위해 누군가를 보낼 것을 짐작한 것이다.
다시 화살을 집어드는 그 짧은 시간도 아까워, 잡히는 대로 손가락에 끼우고 쉴 틈 없이 거대한 힘을 운용했다.
세화의 주위로 보라색 영력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네 시녀라는 그년들 맛이 좋던데. 널 잠시 보게만 해 준다면 뭐든 하겠다더라고. 뭐 결국 다 찢어 죽였지만 말이야.”
그녀를 모욕 주는 것만이 목적이던, 그 소름 끼칠 정도로 증오스럽게 낄낄대던 목소리들은 어째서 아직도 이리 선명한 것일까.
살아 돌아왔건만. 다시 시작했건만. 그때의 비참함은 언제까지고 지워지지 않을 듯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저를 구하려다 고통스럽게 죽어 갔던 이들의 마지막이 여전히 눈에 잡힐 듯 생생할 것 같았다.
‘아무도.’
붉어진 그녀의 동공이 세로로 바짝 갈라졌다.
‘아무도 용서할 수 없어.’
타앙―!
마치 번개가 내리치는 것과 같은 강렬한 소리가 영력이 그득 담긴 활시위에서 터져 나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림자들의 관절을 꿰뚫은 화살이 붉은 근육 속에서 영력을 터뜨렸다.
“……컥!”
새빨간 피가 허공으로 안개처럼 뿜어져 나왔다.
제 손발이 터져 나가는 광경을 보며 그림자들이 벌벌 떨어도 아직 조금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감옥에서 그녀를 끌고 나가던 손.
부모님의 잘린 머리를 걷어차던 발.
제 오빠들에게 침을 뱉던 혀.
발버둥 치는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며 보이던 야비한 표정까지.
어느 하나 찢어 놓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화살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죽이지 않고 고통을 주는 데 너무 몰두했나.
아직 벌레 같은 놈들이 살아 있는데, 어느 순간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때였다.
“여기예요, 아가씨. 여기 있어요!”
기와를 비스듬히 기어 올라오며 영선이 화살이 빽빽이 꽂힌 화살집을 내밀었다.
그 뒤로 영채와 영무도 빈틈없이 화살을 담은 화살집을 하나씩 등에 진 채 기와를 타고 있었다.
딱딱하게 경직됐던 세화의 입꼬리가 살짝 허물어졌다.
저 호위들의 사지를 끊어 놓던 순간에도 채워지지 않던 마음이, 세 자매를 보는 순간 급속도로 뜨끈하게 차올랐다.
“여기요! 쏘시고 싶으신 대로 쏘세요! 지붕 아래에 더 가져다 놨어요!”
그 목소리에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났다.
텅 빈 화살통을 발로 차 아래로 굴리는 그녀의 눈가가 설풋 젖어 들었다.
새로운 화살집 안에 그득하게 들어찬 화살들이 든든했다.
눈을 빛낸 세화가 섬뜩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다행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 * *
‘뭐지. ……대체 저이는 누구지.’
백만용은 제가 지금 보는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제대로 분간이 되지 않았다.
“…….”
노란 달빛 사이로 보이는 가녀린 몸은 마치 폭풍의 한가운데 서 있는 듯 보였다.
옷자락이 격렬히 펄럭이는데도, 꼿꼿이 중심을 잡고 선 누군가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이 정해져 있는 데다가 보름달이 아님에도 달이 밝았으니. 제 앞으로 쏟아지는 이 화살들의 출처를 찾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백만용은 눈앞에서 사지가 터져 나가고 피가 난무하는 잔혹한 광경 속에서도, 저 멀리 보이는 가녀린 그림자만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화살을 들어 올리고 시위를 걸 때마다 보이는 여린 팔목과, 그 몸을 감싸고 있는 홍련 같은 적자주빛 영력이 역광에도 선명했다.
퍽!
또다시 힘있게 쏘아진 화살이 제 앞에서 벌레처럼 땅을 구르는 그림자에게 박혀 들었다.
그림자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으나 볼을 통과한 화살로 인해 혀를 물 수도 없고, 끊어진 손발로 인해 달아날 수도 없어서 날아오는 화살을 그대로 맞고 있었다.
십수 명의 그림자들이 고슴도치처럼 빽빽이 화살을 꽂은 채 엎어졌다.
그럼에도 화살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날아왔다.
무시무시한 장면이었다.
아름다운 정원을 배경으로 둔 너른 마당은 순식간에 자욱한 피 냄새로 가득 찼고 쉼 없이 날아오는 화살은 단 한 발의 실수도 없이 침입자들을 꿰뚫었다.
‘헌데.’
정말로 두려운 장면인데도…….
‘어찌 이리 눈을 뗄 수 없는 거지.’
대체 저이가 누굴까.
이런 완벽한 활 솜씨를 가지고 계시니 저이는 분명 호족 백가의 일원이실 터였다.
‘나와 함께 온 이중엔 저런 분이 없었는데, 혹 가주를 모시는 비밀 호위라던가 그런 건가?’
각 가문의 환족은 영력의 종류에 따라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는데, 이 궁술은 백가의 영력에서만 다듬어질 수 있었다.
‘혹, 저분도 신수이신가.’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르고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아주 오래전 짐승의 모습으로 변용한 백기하를 처음 목격했을 때 느꼈던 그 떨림이 백만용의 가슴을 그득 채워 갔다.
그때였다.
퍽!
“!!!!”
무서운 속도로 날아온 화살이 백만용의 옷깃에 박혀 그를 끌고 뒤로 날았다.
그리고 벽에 고정된 그에게 또 한 발.
퍽!!
“히익!”
다리 사이로 꽂혀 든 화살에 그의 몸이 공포로 잔뜩 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