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254)

* * *

아가씨의 명에 따라 세 자매는 세화의 방에 이불과 베개 등 아주 기본적인 물품들만 새로 추가했다.

이 방에서 잠을 잘 백가 재상을 위해서였다.

그런 세 자매의 표정이 살기로 들끓었다.

“……기필코 가만 안 둬.”

“이름이 백만용이라고? 지가 재상이면 다야? 말발굽에 달린 편자같이 생긴 게.”

“내 말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먹이고 재워 달라 구걸하러 와 놓고 남의 집안 사정에 이래라저래라 개소리를 해?”

“아가씨, 아무리 그래도 방까지 내주시는 건 너무 한 것 같아요. 죽일까요? 그냥 제가 죽일까요?”

가장 화를 내던 영채가 씩씩거리며 덧붙였다.

따뜻한 햇볕이 그윽하게 내려앉는 정원을 바라보고 있던 세화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됐어. 참지 못하겠을 땐 내가 직접 죽일 거니까 너희 손엔 피 묻히지 마. 그런 건 내가 할 거야.”

“……아가씨.”

표정이 비장해진 영무가 세화의 앞으로 다가왔다.

“정말 죽이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말씀만 하세요. 오늘 제가 그 자라다 만 볍씨 같은 놈과 끝장을 보겠습니다.”

한 번 더 웃은 세화가 영무의 어깨를 안아 끌어당겼다.

“걱정하지 마. 편하게 놔두진 않을 거니까. 날 건드려도 참을 수 없었을 텐데 감히 아버지를 비난했으니, 가만둬서는 안 되지.”

세 자매의 눈이 찰나에 반짝였다.

당장에 모두 달려와 세화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현명한 결정이십니다. 머리에 포대는 제가 씌울게요.”

영선이 제일 먼저 의견을 내자 영무가 고개를 저었다.

“포대는 너무 편안하지. 손과 발을 결박하고 재갈부터 물린 다음에 바늘로 구멍을 뚫은 천을 적셔 얼굴에 씌우는 거야. 어떻게든 숨은 쉬어질 테니 죽지는 않겠지만 밤새 괴로움에 몸부림칠 수 있도록.”

영채가 너희들 다 비키라는 듯 제 자매들을 밀어내며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허락만 해 주신다면 제가 저 원수 같은 백가 재상의 허리를 끌어안고 호수에 뛰어들겠습니다.”

영채는 진흙투성이 호수에 깊게 잠수해 연근을 잘라 올 수도 있는 이였다.

저 말은 백가 재상의 발을 호수 밑바닥에 묶어 놓고 오겠다는 뜻이었다.

“하하. 알았어. 필요할 땐 꼭 부탁할게. 그나저나 말했던 건 알아봤어?”

“네, 예화비단 예복 말씀이시지요?”

세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영의 연회가 있던 날 사연주가 입은 의복은 가히 소가주의 혼약자로 보일 만큼 화려한 차림이었다.

겉옷에 사용된 예화비단은 주가의 특산품으로, 얼룩 없이 붉은색이 선명할수록 가격이 높았다.

사연주가 걸친 비단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자수가 예복 전체에 걸쳐 흩어져있던 것을 보면 그 아래로 군데군데 노란 씨실의 얼룩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예화비단의 급을 떨어뜨리는 요인이었다.

그러함에도 다른 비단보다는 훨씬 귀한 것이었지만.

“묵 행수의 말에 의하면 예화비단을 만들 때는 힘 있는 손이 많이 필요한데 긴 전쟁에 젊은 환족들이 많이 동원되는 바람에 그간 제작 물량이 대폭 줄어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얼룩이 있는 비단조차도 구하기 힘들 정도라 따로 구입자를 알아볼 필요도 없었어요. 전부 신영의 저택에 납품된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소가주께서는 흠이 많아도 전혀 개의치 않겠다고 일단 보내라 하셔서 원래대로라면 품질 유지를 위해 아까워도 폐기해야 할 물량마저 일단 둔다고 합니다.”

“신영의 부인들 쪽에서 말이 나온 게 아니라 소가주 쪽에서 그리 요구했다고?”

“네.”

“…….”

소가주의 어머니이자 신영의 아내였던 여가 부인은 소가주가 어릴 적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이후 신영은 더 혼인하지 않고 여덟 명의 첩을 들여 그저 일부인, 이부인, 삼부인으로 부르게 하였는데…….

‘흠이 있는 예화비단은 자수가 많이 들어가야 해서 남성은 거의 사용하지 않을 텐데. 특히 자존심 높은 신영이나 소가주라면 더더욱 사용하지 않을 테고.’

그렇다고 굳이 소가주가 팔부인들에게 비단을 주며 환심을 살 것 같진 않았다.

‘그럼 혹, 소가주에게도 첩이 있는 건가?’

세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연회장에서 발견한 사연주의 차림에 세화도 제법 놀랐었던 것이다.

그런 화려한 모양새를 소가주가 직접 지시했을 리는 없었다.

치장을 누군가에게 맡겼거나 그도 아니면 사연주가 직접 그 예복을 어디선가 빌려왔다는 것일 텐데.

만약 그 화려한 차림을 다른 이가 골라 준 것이라면 아마도 벌써 누군가의 커다란 미움을 받고 있는 것일 터였다.

신영이 참석하시는 연회에선 주씨 외엔 누구도 자리에 앉을 수 없는데.

벽에 서야 하는 사씨인 아이에게 그처럼 화려한 옷을 입혔다는 건,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본성을 만천하에 알리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헌데 아무리 사연주가 신영의 연회에 대해 잘 몰랐다고는 해도 그리 눈에 띄는 붉은 비단을 걸치는 것에 대해서는 불안감이 들지 않았을 리 없어.’

허니, 사연주를 망신시키기 위해 그 옷을 입히면서도 그 아이를 잘 설득했다는 얘기일 텐데.

‘대체 그럴 수 있는 이가 누굴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가 내 계획에 방해가 되진 않아야 할 텐데.’

그걸 알아내기 위해 비단 예복의 출처를 쫓았지만, 신영의 저택으로 뭉뚱그려지니 추측이 쉽지 않았다.

그때 똑똑, 하고 열린 나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그녀의 정신을 깨웠다.

백기하였다.

“잠시 할 말이 있는데. 그대와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

“그래요.”

흔쾌히 일어선 세화가 방문을 나서기 전에 세 자매를 돌아보며 지시했다.

“재상께선 호족이라 눈이 밝으시니 창마다 암막을 대어 놓으렴. 오랜 여정으로 피로하실 텐데 밤에 푹 주무실 수 있도록.”

“네, 아가씨. 신영께서 보내신 적룡의 영단은 새로 옮기신 아가씨 방으로 가져다 둘까요?”

“아냐. 오늘은 이곳에 둬. 영력을 증진시키는 효과가 있으니, 재상께서 피로를 푸시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침상 머리맡에 두렴. 그리고…….”

잠시 고민하던 세화가 덧붙였다.

“소가주에게 첩이 있는지 좀 알아봐. 만약 있다면 몇 명인지, 누구인지도.”

마지막 명령까지 내린 세화가 저를 기다리는 백기하를 따라 문을 나섰다.

백기하는 긴장한 얼굴로 좌우를 살피다가 정원 가득한 불두화 사이로 숨어들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여긴 왜 들어와요?”

“혹 미장 어른께서 내가 그대와 있는 것을 보시고 더 심기가 상하실까 봐. 지금 화가 많이 나신 것 같거든.”

“아…….”

“재상이, 눈치가 좀 없긴 하지만 심성은 나쁘지 않아. 잘 어르면 간도 쓸개도 다 줄 놈이기도 하고. 그러니 악의는 없었다고 그대가 혹 말을 좀 보태 줄 수 있을까? 재상도 나도.”

“당신까지요? 당신은 왜요.”

“혹, 내가 그 전부터 재상과 저런 식으로 주가에 대한 악의적인 생각들을 나눠 왔다고 오해하실 수도 있으니까.”

“할 수는 있지만, 일단 걱정하지 말아요. 재상이나 당신한테 화나신 게 아니니까.”

“나한테 화나신 것 같던데.”

“아니에요. 우리 아버지는 자신한테 화가 나신 거예요.”

“자신?”

“네. 의도한 건 아니지만 필요하다면 필요한 과정이니, 뭐. 일단 괜찮아요.”

“필요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세화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저토록 모든 기물의 가격을 꼼꼼히 파악하고 있는 재상이 주가의 상황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저런 말을 한 걸까요? 오히려 나는 저 재상이 각 가문에서 나는 특산품의 흐름과 행방을 누구보다 정확히 파악하고 있기에 우리에게 그런 말을 했다고 봐요.”

“…….”

“재상은 심지어 아버지께서 전장의 상황을 지원하느라 청빈하게 지내고 계신다는 것도 알고 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물품들에 정말로 충격을 받은 거예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니 저런 말들을 쏟아 냈던 거고요.”

“……그건.”

“지금 주가에서 우리 집 말고는 아무도 이런 꼴이 되지 않았다는 소리예요. 전쟁이 일어나기 전엔 우리 집이 신영 다음으로 재력과 권세가 넘치는 세도가였던 것을 생각하면, 책임을 지고 할당된 배상을 제대로 지원한 것은 우리 집밖에는 없다는 거죠. 아무도. 신영조차도.”

“…….”

“아버지께서도 그걸 알아차리신 거예요. 그래서 충격을 받으신 거고요.”

“……괜찮으실까?”

“일평생을 신영과 혈족을 위해 사신 분이시니까요. 아마 점차 그 노인의 속내를 알게 되면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으실지도요.”

“…….”

“그래도 전과는 다를 거예요. 내 태도가 달라지는 만큼 신영과 소가주의 태도도 급격히 달라질 테니, 아버지께서도 조금 더 빨리 깨닫게 되시겠죠.”

“그래도 마음이라는 건 그리 쉽게 포기되는 게 아니니까.”

백기하가 쓸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미움도 어찌 보면 강한 마음이지. ……그대가 소가주를 볼 때처럼.”

“뭐라고요?”

“그렇잖아. 그는 워낙 오랜 기간 그대의 마음 안에 있었으니.”

그러니 첩에 대해서도 궁금한 것이 아니냐고 슬쩍 물음을 띄우는 백기하를 향해 그녀가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진짜 황당하게 하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그 빈대 먹은 쭉정이 같은 놈을 왜 자꾸 내 옆에다 대는 거예요? 내가 분명히 말했죠. 저놈과 다시 잘해 보다니, 내가 미쳤냐고요.”

“쭉정이?”

“그렇잖아요. 어디다 비교해요? 당신이 훨씬-.”

“훨씬?”

“…….”

“훨씬 뭐?”

“…….”

“훨씬 뭐냐고.”

“뭘 물어요. 훨씬. 훨씬……한 거 자기도 다 알 거면서.”

“몰라. 직접 말해 줘.”

“아 됐어요. 아무튼 아버지 일이라면 잠시 숙고하시게 그냥 둬요. 방해하지 말고.”

“알았어. 그런데 훨씬 다음에 뭐라고 하려고 했던 건데.”

“그만하라니까요.”

끝까지 제 뒤를 따라오며 묻는 백기하를 피해, 세화가 정원의 불두화 사이를 이리저리 통과하며 내달렸다.

“훨씬 뭐냐고.”

“아, 그만하라고요.”

어느새, 어두웠던 표정들이 사라지고 유려한 두 쌍의 눈들이 모두 동그마하게 휘어져 있었다.

* * *

보름달이 아닌데도 달이 밝았다.

밤 정원 위로 뽀얗게 내리비추는 달빛을, 백만용은 열린 창 옆에 앉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풀벌레 소리가 듣기 좋았다.

허나 그의 속마음은 기실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지금 이 방은 주가 원로댁 아가씨가 쓰던 방이었다.

아녀자의 방을 빼앗게 된 꼴인 것도 참담한데 방 안을 둘러보니 실제로 그 아가씨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은 모두 귀중하게 관리되고 있는 듯했으나 그리 좋은 질의 물건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주가 원로가 이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니.

‘하지만 분명 내가 파악한 바로는 주가로 흘러 들어가는 물품들의 질이 전쟁 전과 비교해 그리 많이 달라지지는 않았었는데.’

어쨌거나 이 방을 보고 나니 그 아가씨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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