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254)

“가주께서 방에 계시지 않은 것이 맞는지 잠깐 확인만 한번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부터 뭔가를 알아차려야 했건만…….

그 순간에도 어쩐지 불길한 무인의 감이 뒷목을 스쳐 지나가긴 했었다.

하지만 혹 그분을 감춰 두고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냐는 듯한 불쾌한 오해는 일찌감치 해명을 해 놓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때문에 문을 열어 내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시켰을 뿐인데.

‘……아니, 이 미친놈이.’

그 이후 갑자기 소나기 같은 비난이 우산을 펼 새도 없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 이 정도만으로도 이미 저희 가주의 생활이 그간 어떠셨을지를 짐작할 수 있으니. 식사는 제대로 하셨을지, 시중은 제대로 받으셨을지 눈물이 앞을 가려 도무지 생각이 이어지지 않을 정도라 이 일은 이대로 넘어갈 수 없고 반드시 육가 연합의 이름으로 주가에 공표해 명명백백 잘잘못을 따져야 하는-.”

“…….”

‘……갑자기 나타나 제 입으로 불청객이라 미안하다 사과할 때는 언제고.’

저게 무슨 뻔뻔함을 넘어 두꺼운 낯가죽에 기름 바르는 소리란 말인가.

허나 뭔가 반박을 하고 싶어도 저 주둥이가 대체 쉬지를 않으니, 언제 끼어들어야 할지조차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거대한 백호가 열린 문 너머로 고개를 들이밀고, 헛소리를 장히 늘어놓고 있는 백가 재상의 옷깃을 물어 챈 것은.

그런 백호의 모습은 누가 봐도 당황하고 분노한 모습이었으나.

“헉. 맙소사 가주. 신수의 모습을 하고 계셨습니까.”

끌고 나가기도 전에 돌아선 백가 재상은 짐승의 분노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감격을 금치 못하며 폭신폭신한 백호의 털을 빠르게 손으로 문질렀다.

그 이후 백호가 입으로 문 겉옷을 서둘러 벗어 버린 재상이 백호의 앞에 엎드리며 고두했다.

비통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리며 흘러나왔다.

“제가 빠르게 당도하지 못해 그간 얼마나 고초가 많으셨습니까. 적진에서 제대로 된 대접도 받지 못하고 그저 홀로 속을 끓이셨을 가주를 생각하면 제가 일백 번 고쳐 죽어도 이 죄를 다 갚지 못할-.”

백호의 거대한 발로는 저 입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백기하가 허겁지겁 인간의 모습으로 변용해 재상의 입을 막았다.

턱!

커다란 손에 입이 꽉 막힌 재상의 눈이 동그래졌다.

식은땀이 등 뒤로 가득 고인 백기하가 흘끗 시선을 들었다.

미장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아, 안 돼.’

“……원로 어르신. 저희 가문의 재상이 탁상은 제법이나 나이가 어려 사고가 길거나 깊지 못합니다. 지금 재상의 입에서 나간 것은 백가 전체의 의견이 아니고 저의 의견은 더더욱 아닌 점을 꼭 헤아려 주셨으면…….”

그때 사뿐한 발소리가 복도를 걸어 나타났다.

“아닙니다. 재상의 말씀이 구구절절 옳습니다.”

아름다운 얼굴에 온통 안타까운 표정을 띄운 채, 급히 다가온 세화가 슬픈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무리 저희 집안이 전쟁 물자를 공급하며 수준을 잃어 갔다고는 해도 그것은 저희의 사정일 뿐. 손님맞이가 부족했던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재상께서 불쾌해하시는 것도 백번 이해할 수 있습니다.”

“……?”

“……?”

주명윤뿐 아니라 백기하마저도 갑자기 나타나 떨리는 목소리를 꺼내 놓는 세화를 의문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백가주님, 괜찮으시다면 그 손을 잠시 떼어 주시겠습니까.”

“……아. 네.”

백기하가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고 한 발 뒤로 물러서 몸을 일으켰다.

세화가 여전히 꿇어앉은 채 그녀를 의아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재상을 손수 일으켜 세웠다.

사실 심적으로는 ‘너는 그렇게 손님맞이에 대해 잘 알고 경우가 발라서 내가 백가에 가 있는 동안 쉰밥이 나오게 하고 혈족들이 나를 괴롭히는데도 가만히 있었냐.

네 바른 경우는 본인이 아쉬울 때나 쓰이는 거고 남에게 행해지는 불의를 볼 때는 반영되지 않는 것이냐.

그런 기회주의자적인 사고를 가진 주제에 감히 입이 터졌다고 내 아버지에게 계산적이고 악의적이라는 비난을 쏟아 내?’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별수 있는가.

이 재상이 이래 봬도 꽤나 기하의 귀여움을 받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고.

‘나중에 내가 혹시, 아주 혹시 만에 하나라도 백가의 가, ……가모가 되면 중용해야 할 이일 뿐이니.’

가모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세화의 눈 끝이 슬쩍 붉게 물들었다.

‘죽일 수는 없으니 할 수 없지. 얼러 보고 달래 보고 안 되면 죽기 전까지 패서라도 사람 만드는 수밖에. 게다가 이 지치지 않는 입으로 해 줄 일도 하나 있고.’

“부끄럽게도 저희 집안에서 사용하는 물품 중 이미 최고로 좋은 것들만 모아 백가주께 올린 것이랍니다.”

세화가 젖지도 않은 눈가를 소매로 닦아 내며 제 생각이 짧았음을 사과했다.

“허나 아무리 재상께서 생전 초면인 저희 집에 연통 하나 없이 오전부터 급히 방문하셨다 해도 그 부분부터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도착하신 지 일각이나 되셨음에도 미리 저희의 가계 사정을 설명하지 못해 마치 백가주를 저희가 박대하고 있기라도 한 듯 재상께서 오해하시게 한 점. 거기다 응당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다면 얼마 남지 않은 저희 어머니의 패물들을 팔아서라도 손님께서 사용하실 물품들을 최고급품으로 준비해야 했는데, 어머니께서 말로는 괜찮다고 하시면서도 뒤에서 눈물지으실까 봐 차마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속만 끓이다 미처 실행에 옮기지 못한 점. 손님을 맞이할 물품은커녕 저희가 사용할 물품들마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아 방문객을 받지 않기 위해 대문을 닫아걸었는데, 그 부분을 조금 더 명확히 알리지 못해 이렇듯 재상께서 쉰두 명이나 되는 기마단과 함께 불쑥 나타나 준비되지도 않은 저희 집에서 숙식을 하겠다는 성급하고 잘못된 결정을 내리시게 한 점에 대해 몹시 반성하고 깊이 사죄드립니다. 그리하여 청빈하고 올곧으신 제 아버지가 악의적이고 계산적이라는, 말도 안 되게 편협하고 단편적이고 불쾌한 평가를 받게 되셨지만, 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오해이고 그저 모두 저희의 잘못일 뿐입니다.”

“…….”

이 모든 말들이 눈을 한번 깜빡일 정도의 시간 사이에 쏟아져 내렸다.

‘……지금 뭐가 지나갔나.’

제 것보다 두 배는 더 빠르게 뭔가를 나불대는 입은 또 처음이라…….

얼떨떨한 얼굴의 백가 재상이 그런 세화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하여 이제 와 제가 이런저런 설명을 드려 보았자 믿어지지 않으실지 모르니, 저희의 진심을 확인시켜 드리기 위해 재상께서 아예 제 방에 묵으실 수 있도록 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 제 방에 있는 집기들을 보시고 나면 백가주께 저희가 가진 중 최상품들만을 골라 올렸다는 말이 거짓으로 들리지 않으실 겁니다.”

“…….”

……어째서일까.

말투는 사근사근했고, 그녀가 느끼고 있을 안타까움이 담뿍 배어 있었으며 깊은 죄책감까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는데.

제 앞에서 붉어진 눈가를 애써 접고 미소 짓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며, 백만용이 조심히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왜지. 왜 저 적자줏빛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배를 보이며 드러누워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지?’

바싹 말라오는 입술을 핥은 백만용이 표정을 관리하며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 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객이 되어서 어찌 아가씨의 별당을 빼앗을 수 있겠-.”

“그렇게 하시지요.”

“네?”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하시라고요.”

“…….”

“하실 거지요? 방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아, 아닙…….”

“그러면 저는 이른 시간부터 생전 초면에 연통도 없이 쉰두 명이나 되는 일행을 끌고 재상께서 도착하신 지 일각이나 되셨음에도, 식사를 하다가 급히 손님을 맞은 탓에 정신도 없고 경황도 없어 제대로 사정을 설명드리지 못해 아버지의 체면도 잃게 만들었는데. 육가 연합에까지 이 일이 알려져 모든 분들의 심기를 상하게 하는 죄까지 저질러야 하는 것입니까?”

누군가를 어르고 달랜다는 건 참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세화가 안타까운 얼굴로 다시금 눈가를 소매로 누르며 권했다.

“그러니 제 말대로 해 주시지요.”

“…….”

“아직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시지요, 대답.”

“…….”

답변을 재촉함에도 재상의 입이 쉬이 열리지 않자 세화의 목소리가 단번에 낮아졌다.

“이만큼 성심과 성의를 다해 사정을 말씀드리고 잘못을 빌었으면, 불쑥 나타나 숙식을 요구하셨음에도 기꺼이 여러분들을 책임져 드리기로 한 집주인의 체면을 조금이나마 살려 주기 위해서라도 긍정의 대답을 주실 만도 한데. 아직도 제 설명이 부족하십니까?”

“…….”

재상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방 안의 분위기에 긴장이 섞여들었다.

한참 만에야 재상의 색이 옅은 입술이 어떤 소리를 꺼내 놓으며 달싹였다.

모두의 시선이 재상의 입으로 향했다.

“……ㄲ.”

“?”

“……딸꾹.”

* * *

다행히 더 어르고 달래기 전에 재상이 알아들은 듯하자 세화가 잠시만 기다리시라고 인사하고 돌아섰다.

제 방에 있는 물건들을 그대로 둔 상태로 새로운 물품들을 챙겨 넣으라 세 자매에게 지시하기 위해서였다.

서둘러 그녀의 뒤를 쫓아온 백기하가 투명할 정도로 하얗고 얇은 세화의 손목을 잡아챘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그의 길고 단단한 손가락은 손끝까지 창백해진 상태였다.

“화났어?”

“네?”

“화, 많이 났어?”

“……?”

백기하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세화가 대답 대신 침묵을 지켰다.

‘갑자기 달려와서 이게 무슨 뜬금없는 말이람?’

“미안해. 내가 일단 저 녀석을 데리고 나가서-.”

“나가긴 어딜 가요. 지금 저 재상을 내 방에 묵게 할 거란 말 못 들었어요?”

“그러지 않아도 돼. 내가 잘못했어.”

그 말을 내뱉는 백기하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더 핏기가 없었다.

그녀가 화가 많이 났을까 봐 진심으로 염려하고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그 표정에 서린 긴장감을 읽어 낸 세화가 제 손목을 잡은 단단한 손을 떼어 냈다.

“!”

그리고 놀란 그가 다시 그녀를 잡기 전에 손마디가 굵은 그 차가운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나 화 안 났어요.”

“……거짓말.”

“진짜예요. 내가 당신한테 화를 왜 내요?”

“……안 났다고?”

“당연하죠. 저 재상이 한 말을 당신이 시킨 것도 아닌데 왜 당신에게 화를 내겠어요.”

“……정말 화가 안 났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방은, 왜 방까지 내주는데? 그러지 마. 내가 잘 설명할 테니.”

“아니에요.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어요.”

“이유?”

“네. 그럼 당신도 도와줄래요?”

“도와줘? 뭘? 말만 해.”

“일단 그럼 같이 내 방으로 가요. 나한테 좋은 게 있는데 그거 당신 줄게요.”

부드러운 얼굴로 복도를 종종거리고 걸어가던 세화가 영문 모르는 얼굴로 천천히 뒤를 따르는 백기하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 참. 그런데 저 재상, 혹시 자기 몸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무력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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