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254)

* * *

너른 마당이 많은 인원으로 복작복작했다.

신룡의 영단을 포장한 목함과 그것을 나르는 시종들. 또, 그것을 지키는 호위가 서른 명쯤. 그리고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백가의 무인들이 쉰 명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각 맞춰 열을 지은 백가 무인들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마치 목숨을 내놓고 적진에 비밀리에 침투해 막다른 곳에서 적들과 마주친 양 비장해 보이기도 했고.

“……?”

아무리 십 년이나 전투를 벌였다고는 해도, 자기들이 압승하여 막대한 배상 영력과 인질까지 요구한 상황에.

부르지도 않았는데 넘어와 놓고 왜 저런 표정들이지?

‘다들 기세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데 혹, 다시 전쟁을 발발시킬 목적은 아니겠지?’

그들의 그런 모습을 확인하는 주명윤의 표정도 덩달아 제법 심각하게 가라앉았다.

‘긴 전쟁에 희생자는 많았으나 그만큼 우리 주가에게 배상의 책임을 요구하며 얻어 간 것도 많았으니 혹 또 전쟁 장사를 하려는 것일지도…….’

백가주만 보아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었으나 누가 또 알겠는가.

주가 같은 경우만 해도 각기 다른 속셈과 계산들이 모여 의견이 합치되는 일이 거의 없었으니.

여섯 가문이 합쳐진 연합군에서 다른 마음을 먹는 이가 나온다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때 다가오는 주명윤을 발견한 누군가가 기마단 쪽에서 나섰다.

“주가의 명윤 원로님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긍정의 대답이 떨어지자 그 누군가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준수한 얼굴의 제법 젊은 사내였다.

체구도 작지 않았던 데다가 이마에 두르고 있는 건으로 인해 문사보다는 무인의 인상이 강한 이였다.

호감 가는 미형의 얼굴이 선명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백가 재상 백만용이라 합니다.”

“주가 원로 주명윤입니다.”

사실 주명윤이 이곳으로 서둘러 나온 것은 오전부터 우르르 쏟아지듯 들어온 불청객들을 맞을 생각이기도 했지만.

‘백가주의 표정이 하도 좋지 않아, 백가 재상이 대체 어떤 이길래 능구렁이 같은 백가주가 저리도 질색 팔색을 하는 건가 했는데. 너무 정상이잖아?’

길에서 우연히 만났어도 그 청량하고 깨끗한 생김에 한 번 돌아볼 만한 이였다.

“저희 가주께서 이곳에 머물고 계신다는 얘길 듣고 성급히 방문 드리게 되었습니다. 연통도 없이 이리 실례되는 일을 하여 정말 죄송합니다. 갑자기 많은 일행을 부탁드리게 되어 더욱 면목 없습니다.”

‘……게다가 성격도 괜찮은 것 같고?’

“저희는 건량을 따로 챙겨 왔으니, 마구간이든 헛간이든 비를 피할 수 있게만 도와주신다면 그 외의 일들은 저희가 다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게다가 백가주와 다르게 예의도 있는 것 같고. 헌데 왜 그렇게 학을 떼는 것처럼 보였던 거지? 막무가내 같은 자기 성격이 통하지 않는 이라 그런 건가?’

“왜 그러십니까? 제 얼굴에 뭔가 묻었습니까?”

“아뇨. 아닙니다. 백가주께 재상에 대해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직접 뵙는 것이 신기해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그러자 백가 재상의 얼굴이 갑자기 확 펴졌다.

“가주께서 저에 대한 언급을 하셨단 말씀입니까?”

조금 전의 미소도 싱그러웠으나 지금과 비교하자면 아까는 마치 가짜 표정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

그것은 무인의 감과 같은 것이었다.

재상에 대해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까지는 그저 인사치레였으나.

‘……뭔가 이상해. 위험해.’

“아, 네. 재상께서 계셔서 안심하고 늘 가문을 비우신다며 대단하고 믿음직한 분이시라 말씀하셨습니다.”

왠지 이 칭찬을 하지 않는다면 뭔가 시작될 것 같았던 것이다.

‘이상하군. 뭐가 이리 쭈뼛하지?’

“일단 이쪽으로 오시지요. 외당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헌데 저희 가주께선 혹 지금 이곳에 안 계시는 것입니까?”

그 말에 주명윤이 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어라? 아까 분명 내가 일어날 때 따라 일어나는 것을 보았는데.’

혹시나 해서 신영의 호위와 시종들이 있는 곳을 확인했지만, 딸이 신영께서 내리신 목함을 받아 들고 있을 뿐. 거기에도 백가주는 없었다.

‘함께 온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이 자가 어딜 간 거지?’

주명윤이 대답을 기다리는 재상에게 서둘러 대답했다.

“아닙니다. 잠시 어디를 가신 듯한데, 저택 안에 계시니 곧 만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허면 저 무사들은 말씀하신 외당으로 보내고 저는 저희 가주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기다려도 되겠습니까?”

“아무리 제집이라고는 하나 그곳은 이미 백가주께 내어 드렸기에. 그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군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옆방에 묵으시도록 해 드릴 순 있습니다.”

그 말에 아래로 쳐지는 듯하던 백가 재상의 눈이 휙 제자리로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그럼 그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허면 지금 안내해 주시지요.”

* * *

“소유자의 영력을 증진시켜 주는 효과가 있으니 되도록 몸 가까운 곳에 두실 것. 목숨보다 귀중한 신물을 특별히 신중하게 관리하실 것을 몹시 당부하셨습니다.”

“세심하게 지침을 내려 주시고 신경 써 주셔서 황송할 뿐입니다. 신영의 치세 가득 영광과 복락 가득하기를.”

“그럼 전달했으니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인사하고 일어선 세화의 손짓에 영채가 다가왔다.

“아가씨. 제가 그걸 방에 가져다 둘까요?”

“그러렴. 내 침상 머리맡에 놓아 줘.”

“예.”

영채가 목함을 가지고 떠난 이후 세화는 마당 끝에 세워진 작은 별당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전각 기둥 뒤에서 상황을 보고 있던 백기하가 물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

“마당의 상황이 한눈에 보이면서 사각이 생기는 곳은 여기 밖에는 없거든요. 헌데 왜 이러고 있어요? 재상과 마주치고 싶지 않으면 그들을 다른 곳에 묵게 할까요?”

“아니야. 미장 어른이 계신 곳에서 갑자기 마주치게 되면 일이 생길까 봐 그래. 일단 저들은 외당으로 안내될 테니, 그럼 내가 그사이 잠깐 미장 어른을 뵌 뒤에-.”

“응? 대화 제대로 못 들었어요? 아버지께서 백가 재상을 당신 옆방으로 안내하러 가신 거잖아요. 거기 머무르겠다 하여-.”

“내 옆방?!”

그 말에 백기하는 완전히 당황했다.

얼마나 당황했느냐면 제 몸이 곧장 신수로 변했는데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순식간에 덩치를 불린 백호가 하얀 털을 휘날리며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

서둘러 자신의 방을 향해 달려가는 그의 모습을 세화가 멍하니 응시했다.

‘뭐지? 셋이 마주치는 순간을 피하겠다는 것 아니었나? 갑자기 왜 저러지?’

그가 저리 당황하고 급해진 이유를 몰라 세화도 급히 그의 방을 향해 움직였다.

* * *

그사이 주명윤은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중이었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수려한 사내의 얼굴 중에서 색이 옅은 입술이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나뭇결이 일정하지 않고 유약은 발랐으되 홍약은 아니고 접합부의 무늬가 연결되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오류 지방 칠십이 장인 중 누구도 해당되지 않을 테고, 그렇다면 가격은 대략 백삼십 량에서 백오십 량 사이. 이불은 여가의 낙종 지방에서 나는 오사천이었군요. 가격은 한 마당 사십이 량. 자수의 솜씨를 보니 그 지방 관원들이 직접 운영하는 장인관에서 만들어졌겠고, 쓰인 수실의 색상이 다양하진 않은 것으로 보아 특상품은 아니고 그저 상품. 구름, 노을, 사방신수의 모양이 포함되지 않았으니 상품 중 삼 급. 가격은 팔십팔 량. 저희 가주를 백사십 량짜리 침상에서 잠을 자게 하고 팔십팔 량짜리 삼 급 상품을 덮으라고 내어 주셨다니. 이것이 환계를 덕으로 아우른다는 주가의 손님 대접입니까?”

떨리는 손이 이번엔 침상 머리맡에 있는 찻잔을 집어 들었다.

코끝에 가만히 가져다 댔던 재상이 입술을 꾹 물었다.

“천가 계산 지방에서 만들어진 찻잔이군요. 좁은 면을 섬세하게 채운 그림들이 선명하고, 그 위를 매끄럽게 덮은 황동의 유약에선 과실주의 농익은 향이 흐르는 것을 보아하니 상등품 중에서도 최상품. 가격은 이백팔십 량. 허나 그 안을 채웠던 차는 주가 유상 지방 특산품 화란차인데, 꽃잎이 작고 성근 모양새를 보니 이것도 특상품은 아니고 그저 상등품. 꽃잎의 색이 옅고 끝에 보랏빛 낙적이 희미할뿐더러 말려진 꽃술에서 나오는 기름기가 많지 않은 것을 보아하니 상품 중에서도 약 오 급. 가격은 저울당 이십 량. 아무리 저희 주군께서 합의도 없이 방문하셨다고는 하나 백가의 가주 위는 현재 육가 연합의 맹주로 모든 가문의 일원을 대표하는 자리인데 그런 분께 한갓 이십 량짜리 차를 내어 주시다니 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이것이 주가가 보일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손님 대접이었나. 물론 주가의 명윤 원로님께서 전장의 상황을 지원하느라 청빈하게 지내심은 알고 있지만, 주가의 관행 자체가 연회가 많고 혈족들의 왕래가 빈번한 만큼 어떤 경우에도 손님을 대접하기 위한 질 좋은 물품들을 구비하여 놓는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이런 물품들을 제공하셨다는 건 혹 저희 가주께서 어떤 일행도 동행하지 않은 것을 보고 속으로는 그를 낮잡아 보신 것은 아닌가. 허면 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공정한 태도를 보여야 하는 원로 자리에 앉아 계시는 분께서 보이셔야 할 행동 같지 않은, 너무나도 계산적이고 악의적인-.”

“…….”

‘……대체 뭐지. 이 상또라이 미친놈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한 주명윤이 눈만 껌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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