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254)

세화가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뭐, 라고요?”

“혹시 그대에게 지금 입 맞춰도 되느냐고.”

“…….”

지금 들은 말을 하도 믿을 수가 없어서 그녀가 그를 잠시 가만히 바라봤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람.

입을 맞춰도 되느냐니.

그야 당연히.

‘……너무, ……싫어.’

그냥 싫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 최악으로 너무 싫었다.

그녀가 있는 힘껏 주먹을 움켜쥐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당신은 지금 빈틈없이 묶어 장식한 머리에.

오늘 하루 내내 입고 다녔음에도 한 치의 구김도 없는 비단 예복에.

향유조차 이제 막 바른 듯 청량한 향취를 풍기고 있으면서.

‘……나는 소복 같은 잠옷에, 머리는 풀어헤치고, 맨발에다 얼굴엔 온통 미친년처럼 풀칠을 하고 있는 상태인데. 이러고 지금 입을 맞추자고? 제정신이야?’

“안, 돼?”

“…….”

그녀는 무섭도록 굳어진 얼굴로 침묵했다.

흔들리는 시선으로 그녀를 보고 있던 그가 애써 미소를 끌어 올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렇군. 내가 앞으로 그대에게 더 잘할게.”

그녀가 무릎 위에서 움켜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장난해? 꼭 지금 물어봤어야 했어? 이따 물어보면 안 되는 거였어? 이런 꼴을 하고 있는 나한테 꼭 그런 걸 물어봐야 했어?’

헌데.

“그대가 싫다고 하면 계속 기다릴 거야. 절대 억지로 하는 일 없을 거야. 그러니 화 풀어. 내가 조금 급했어.”

이 남자. 이딴 눈치 없는 말이나 덧붙인다.

‘저렇게 상황 파악을 못 하면서 대체 가주 노릇은 어떻게 하는 거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내리누르며,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소셋물 이리 줘요.”

목소리가 얼마나 낮아졌던지 듣는 그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

“소셋물은 왜. 가려고? 아니야. 그거 일각은 바르고 있어야-.”

“이리 달라고요.”

“기분, 풀어. 더는 아무 말도 안 할게. 내일 돼서 얼굴이 아프면 안 되니까 그것만 하고 가.”

“달라는 말 안 들려요?”

“……그럼 잠시 기다려 줘. 데워 줄게.”

“그냥 줘요.”

그녀의 기세에 그가 들고 온 소셋물을 할 수 없이 내밀었다.

그걸 받아 이불 위에 아무렇게나 놓은 그녀가 세안을 하며 얼굴에 묻은 풀물을 닦아 냈다.

물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가관이었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놓았었음에도 물이 튀며 젖은 머리카락이 마치 실뱀처럼 얼굴 가장자리에 엉켜 있었다.

화장도 하지 못한 맨얼굴이 선명했다.

그래도 처음 물에 비쳤던, 제가 봐도 끔찍했던 귀신같은 얼굴보단 낫긴 했다.

“……자, 이걸로 닦아.”

풀죽은 목소리가 그녀의 눈앞에 흰 명주 수건을 조심히 들이밀었다.

눈살을 찌푸린 그녀가 수건이 아닌 그걸 내민 손목을 잡아챘다.

“어어?”

제게로 가까워지는 그 짧은 사이도 조급해, 남자의 예복 목깃을 움켜쥔 세화가 그를 조금 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

놀라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를 볼 수가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입술을 부딪쳤다.

* * *

그녀도 이런 식으로 그의 멱살을 잡고 강제로 뭔가를 할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좀 전에 말하는 걸 들어보니.

‘오늘 내가 먼저 시작하지 않으면 분명 이 남자는 이대로 침묵하다 머나먼 후일에나 같은 질문을 하겠지.’

막 찬물로 세안해 온도가 낮아진 그녀의 입술과 남자의 뜨거운 입술이 맞물리던 그 순간.

둘의 몸이 일제히 파르르 떨렸다.

가까워진 몸과 서로의 것에 짓눌려진 입술 덕분에, 세차게 달음박질치기 시작한 상대의 고동이 손에 잡힐 듯 생생히 느껴졌다.

‘뭐지, 이 느낌은.’

그의 체온을 입술을 통해 알게 된 세화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전생엔 주경현과 혼약하자마자 백가에 가느라, 돌아와서는 내내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느라 뭘 해 볼 새가 없었으니.

이렇게 누군가와 입술을 맞댄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저 입술일 뿐인데.’

손을 잡는 것처럼. 어깨동무를 하는 것처럼.

서로의 피부 한 부분이 맞닿은 것뿐인데도 그 어떤 접촉과도 느낌이 달랐다.

맹렬히 뛰는 심장 박동에서 알 수 있는 뜨거운 감정. 호흡에서 전해지는 애절한 마음.

이 짧은 접촉만으로도 어쩌면 이렇게도 많은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은지.

넘쳐 나는 정보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당황한 그녀가 움켜쥐었던 그의 목깃을 놓고 뒤로 물러나려 할 때였다.

단단하고 큰 손이 그녀의 몸을 그물처럼 옭아맸다.

여유 없고 조급한 입술이 세차게 엉켜든다 싶더니, 축축하게 젖은 혀가 성마르게 그녀의 입술을 쓸었다.

“!”

깜짝 놀란 그녀가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세차게 그녀를 끌어안은 손은 한 치의 틈도 허용치 않았다.

투명한 타액이 그녀의 입술에 비벼질수록 세화의 입술도 젖어 갔다. 그 순간이었다.

입술 위를 맴돌던 살덩이가 그녀의 붉은 입술과 하얀 치아 사이를 헤치고 입안으로 파고든 것은.

“!!”

너무 놀란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가, 백기하의 진한 검은 눈과 아주 가까이에서 마주쳤다.

태울 듯 뜨거운 감정이 그 안에서 들끓고 있었다.

탐욕의 열망이 어찌나 선명한지, 그녀는 그 시선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듯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입속을 휘젓는 축축한 것과 바짝 굳어진 그녀의 등 뒤를 더듬는 단단한 손 역시 여유라곤 조금도 없었다.

혀뿌리와 치아 곳곳을 끈적끈적하게 더듬고 파고든 그의 혀가 입천장을 긁어내렸다.

순식간에 그녀의 살갗이 예민해지고 소름이 돋았다.

“……흐읍. 흡.”

그는 작은 숨 자락도 아쉬운 것처럼 그녀의 호흡을 빨아 제 입안으로 가져갔다.

뾰족하게 세워진 혀가 더 깊은 곳까지 미끄러지자 그녀가 퍼뜩 몸을 떨었다.

“흡, ……읏!”

하지만 억눌린 신음 역시도 타액과 함께 순식간에 그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흐으. ……으.”

젖은 숨들이 단번에 밀도를 높였다. 오랜 기간 응축된 열망이 겹쳐진 입술 사이에서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아니, 떨리는 건 그녀의 손이었다.

숨이 막히는 것이 떨리는 가슴 때문인지 그가 제 호흡을 모두 받아 마시고 있기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흐. 읏.”

제어를 모르는 혀가 끈적끈적한 점막을 꼼꼼히 쓸어내리는 감각이 선명했다. 허리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터질 것 같은 심장 박동이 감당하기 힘들어질 때쯤, 그의 혀가 아쉽게 아쉽게 치열을 훑으며 빠져나갔다.

여전히 입술이 마주 닿은 채였다.

그 아주 좁은 공간 사이로 세차게 고동치는 서로의 숨이 엮였다.

잔뜩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가 흐트러진 호흡을 흩뿌리며 물었다.

“싫지는 않은 거지? 내가 싫지는 않은 거지? 그대도.”

이런 바보 같은 남자를 봤나.

그간 그렇게 오래 나를 보아 왔다면서. 내가 싫은 이와 이런 일을 벌일 성격으로 보였나.

돌아서야 하는데.

돌아설 건데.

뜨거운 팔이 자신을 감싸 안자 그냥 마주 끌어안고 싶어진다.

‘아니, 당신을 위한다는 말은 다 핑계고. 사실 난 그저 복수하는 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르지.’

사실…… 그랬다.

“응? 말해 봐. 대답해 줘.”

긍정의 대답을 조르는 남자의 뜨거운 눈이 그녀를 향해 빛나고 있었다.

‘이것만은 절대로 잃고 싶지 않아.’

무서운 것이다.

마음이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이니까.

지금은 이렇게 열렬할지 몰라도 앞으로도 계속 그럴까? 대체 언제까지? 영원까지? 그때가 언젠데?

그랬기에 제가 뒤에서 누구를 죽이든. 얼마나 악독한 모습을 보이든. 무슨 잔인한 짓을 저지르든.

가족들과 이 남자의 앞에서만은 그런 제 밑바닥을 세세하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혹여 그런 모습에 이 남자의 열기 어린 눈이 식어 버리기라도 할까 봐.

“제발.”

그래. 그래서 지금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이 남자는 분명 그녀의 복수를 제 일처럼 여기며 함께 해 줄 테니까.

입을 열 수 없는 그녀가 그의 목을 잡아 다시 끌어당겼다.

이 눈치 없는 남자가 이 행동에서나마 그녀가 하지 못하는 대답을 짐작할 수 있도록.

맞닿은 입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가 그녀의 작은 몸을 제게로 힘껏 붙이며 바투 끌어안았다.

말로 하지 못한 대답을 그가 알아준 것 같아서, 그녀의 코끝도 시큰거렸다.

* * *

주명윤의 심기는 아침부터 대단히 불편했다.

어제 연회장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 때문은 아니었다.

아니, 그것도 원인이긴 했다.

제가 붙여 둔 말동무가 딸아이에게 그런 식으로 독이 되고 있었을 줄이야.

그 미안함을 딸에게 어찌 다 갚아야 할지.

한데 지금의 불쾌감은 그 일과는 조금 궤가 달랐다.

“앗.”

“먼저 들어요.”

“아니야. 그대가 먼저 먹어.”

젓가락이 부딪친 것 정도로 서로 눈에 띄게 어색하게 굴고 있는 백기하와 딸의 모습 때문이었다.

“…….”

연회에선 둘 다 아무 말도 없었는데. 둘 사이의 이 어색한 공기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어젯밤인가? 힘들었을 세화가 푹 잘 수 있도록 일부러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거늘 그때 뭔가 있었던 건가?’

주명윤이 매서운 무장의 눈으로 무수한 추측을 하고 있던 그때.

‘……나 자꾸 왜 이러지?’

슬쩍 백기하를 올려다보다 눈이 마주친 세화는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어젯밤의 입맞춤 이후 그의 입술이 지나칠 정도로 의식되고 있는 것이다.

붉어진 혀가 제 것을 휘감던 감촉. 호흡이 얽히던 그 뜨거운 순간까지.

‘나 미쳤나 봐. 여기가 어디라고 이걸 자꾸 떠올리고.’

아버지도 옆에 계시는데, 이러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들키겠다고.

일단 셋이 모인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야겠다고.

머리가 복잡해진 세화가 식사 속도를 높일 때였다.

서두르는 발소리가 복도를 빠르게 걸어오는가 싶더니 시종 하나가 급히 나타났다.

뭔가를 고하는 시종의 목소리에 먼저 반응한 건 백기하였다.

“……지금, 뭐라고?”

“신영께서 보내신 적룡의 영단과 백가 기마단이 마당에 도착해 있습니다. 특히 기마단의 수장인 백가 재상이라는 자가 주인어른을 급히 뵙고자 합니다만.”

자연스럽게 백기하에게로 향해진 세 쌍의 시선 속에서, 그가 젓가락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삽시간에 입맛이 뚝 떨어진 듯한 그의 얼굴이 잔뜩 어둡게 가라앉았다.

한숨 같은 신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우리 만용이가 또.”

만용이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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