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후의 연회는 별일 없이 흘러갔다.
신영과 소가주도 돌아갔겠다.
백가주는 내도록 가면을 벗지 않은 채 누가 무엇을 물어도 제대로 대답하는 법이 없었으니.
그것은 여전히 처량한 얼굴로 앉아 있는 세화나 무섭도록 표정이 굳어진 주명윤도 마찬가지였다.
하여 재미있는 일은 다 끝났구나 하는 마음에 참석했던 이들이 하나둘씩 일어나며 빠르게 정리된 것이다.
연회를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오는 내내 주명윤은 딸을 향해 무어라 말하고 싶은 기색이긴 했다.
하지만 내일 하자며 오늘은 그만 쉬라고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그녀도 아버지의 말씀처럼 일찌감치 잘 준비를 마치고 침상에 누웠고 말이다.
한데 왜일까.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하지?’
세 자매가 다 잠든 이후에도 세화는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기만 했다.
‘사연주를 너무 가볍게 보내서 그런가. 아니야. 이대로 끝낼 것도 아닌데.’
아무리 자려고 애를 써도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한 것이…….
늦도록 뭔지 모를 감정으로 머리만 복잡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눈이라도 감고 있어야 잠이 들 것 같아, 침상의 나뭇결을 세다 말고 눈꺼풀을 닫아걸던 그때였다.
톡. 톡톡.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톡. 톡.
아주 작은 소리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이건 또 뭐야.’
눈살을 찌푸린 세화가 혹 곁방의 세 자매를 깨울까 봐 신경 쓰며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창 너머로 어떤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뭐지?’
조심히 창가로 다가간 그녀가 창을 벌컥 열어젖혔다.
발톱을 들어 올린 백호의 거대한 푸른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
다행히 전생에 이 모습을 미리 봤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그대로 졸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너무 놀라 뒤로 넘어갈 뻔하다가 간신히 몸을 지탱한 그녀가 목소리를 죽인 채 다그쳤다.
“이 밤에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커다란 백호가 한 개만 삐죽 내밀었던 발톱을 서둘러 숨긴 뒤 제가 물고 있는 이불을 툭툭 발로 건드렸다.
“이불? 이불이 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 바꿔 줘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백호가 다시금 물고 있는 이불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저 이불이 뭐가 어떻다는 거지?’
가만히 보니 이불의 두 귀퉁이를 대각선끼리 맞닿게 삼각형 모양으로 접어 야무지게 입에 물고 있다.
‘뭐지? 저 아기 바구니 같은 모양은.’
“혹시 그 안에 올라타라고요?”
드디어 말이 통했다는 듯이 커다란 짐승의 머리가 위아래로 격하게 움직였다. 달빛에 비친 새하얀 털이 부드럽게 출렁였다.
“왜요.”
두툼한 짐승의 발이 이번엔 창틀을 툭툭 건드렸다.
마치 그만 물어보고 얼른 이걸 넘어오라는 것처럼.
“밤에 이렇게 찾아오고 그러면 안 돼요. 아버지께서 아시면 큰일이에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벌써 그녀는 창틀을 넘고 있었다.
마침 자신도 묻고 싶은 게 있기 때문이라고. 그것 때문에 가는 거라고. 듣는 이도 없는 곳에 변명을 흘려 놓으며.
“헌데 등에 타면 안 돼요? 왜 이불 속이에요?”
접힌 이불 사이로 발을 집어넣다 말고 묻자 백호가 커다란 발을 들어 그녀의 몸을 슥슥 이불 안으로 밀었다.
“아, 알겠어요. 잠깐만요. 밀지 말아요. 가요. 간다고요.”
그녀가 이불 가운데에 안전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갑자기 백호의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그릉그릉그릉그릉그릉그릉그릉.
‘뭐지, 이 소리는?’
그릉그릉그릉그릉그릉그릉그릉.
마치 쇠구슬을 굴리는 듯한 낯선 소리였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지 확인하려 그녀가 고개를 길게 뺐을 때였다.
‘꺄악!’
이불을 문 채로 백호의 거대한 몸이 단번에 위로 솟았다.
땅을 박차는 기색도 느끼지 못했는데 이미 그녀는 허공에 있었다.
깜짝 놀라 제 시야 아래로 펼쳐지는 광경을 내려다보던 순간이었다.
“!”
이번엔 그녀의 몸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전각의 지붕에 소리조차 내지 않고 사뿐히 내려앉은 백호의 거대한 몸은 다시금 어디가를 향해 뛰어올랐다.
놀라운 것은 이 거대한 짐승이 있는 힘껏 지붕을 박차는 데도 전각들은 어떤 타격도 입지 않는 듯 보였다는 것이다.
마치 하늘을 나는 듯 거대한 주가의 저택을 훌쩍 뛰어넘은 백호가 잠시 후 안착한 곳은 저택 뒤에 있는 작은 동산이었다.
동산 주변엔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어 외부에서 보면 그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 도착해서야 백호는 조심히 그녀가 들어 있는 이불을 땅에 내려놓았다.
이불이 펼쳐지며 그 안에서 어질어질한 머리를 지그시 누른 채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왜 이불 속에 있으라고 했는지 알겠네요.”
등에 탔다면 그가 위로 뛰었다가 내려앉을 때마다 번번이 등에서 떨어졌을 것이다.
아니면 아래로 떨어져 내릴 때마다 부여잡은 등의 털들을 쥐어뜯다 못해 다 뽑아 버렸거나.
따뜻한 달빛이 키 큰 나무들로 가려진 작은 동산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여긴 또 어떻게 안 거람? 대체 남의 집을 어디까지 휘젓고 다닌 거야?’
그사이 어느새 모습을 변용한 백기하가 그녀의 눈앞에 서 있었다.
“여긴 왜 온 거예요, 이 밤에?”
이곳을 미리 몇 번 오가며 뭔가를 준비했는지, 어디론가 빠르게 사라졌던 그는 이내 커다란 봇짐 같은 것을 들고 나타났다.
그 안에서 꺼낸 작은 사발에 뭔가를 집어넣은 백기하가 그것을 빠르게 갈았다. 이내 질척해진 것을 들고 바짝 다가왔다.
“뭐, 뭐예요?”
“가만있어 봐.”
백기하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졌다.
수려한 턱선이.
남자 치고 붉은 입술과 높은 콧대를 따라 위로 솟은 코끝이.
지금은 음영 져 검게만 보이지만 빛이 비치면 마치 별이 반짝이는, 새벽하늘처럼 푸르게도 보이는 눈동자가 차례로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붉어진 얼굴로 물러서는 그녀를 그가 끝까지 따라왔다.
“뭔데요. 뭐 하려고요.”
“이거 발라 주려고.”
그가 그릇을 내밀며 안에 든 것을 내보였다.
“아까 그대가 너무 울어서. 피부가 틀지도 몰라. 그래서 내가 약초랑 약수를 가져왔지.”
“어디서요?”
“응?”
“어디서 가져왔냐고요.”
“…….”
“…….”
“……신영의, 의당에서.”
화가 난 그녀가 그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또 저택을 뒤지고 다녔어요? 그것도 신영의 저택을?”
“…….”
“차라리 우리 집을 뒤져요! 그래야 들켜도 감싸 주기라도 하지. 이제 불사도 아니면서 왜 자꾸 그렇게 목숨을 내놓고 다니는 거예요?!”
“……잘못했어. 이제 안 그럴게.”
“한 번만 더 위험한 짓 해 봐요. 그러다 들키면 다신……!”
“…….”
“…….”
“……다신?”
세화가 낭패한 표정으로 슬쩍 얼굴을 찡그렸다.
다신 당신을 안 볼 거라고.
다신 당신과 말도 안 할 거라고.
다신 식사도 같이 안 할 거라고.
자신도 모르게 ‘다시는’이라는 단어가 나오긴 했는데, 그 뒤에 붙을 수 있는 어떤 말도 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그러지 말아요. 정말요.”
“그래도 이건 발라 줄게. 이거 눈 밑에 바르면 트지도 않고 좋대.”
좋대?
가만히 보니 사기그릇 안에 짓이겨져 있는 것은 부이초였다.
살에 비늘 성분이 있는 주가 여성들이 미용을 목적으로 많이 쓰는 약초였다.
다시 말해, 주가에서는 흔히 사용하지만 다른 이들은 잘 모르는 약초라는 뜻이었다.
“…….”
세화가 침묵을 지킨 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자 기하가 약초를 천에 묻혀 내밀다 말고 물었다.
“왜?”
“누구한테 들었어요?”
“응?”
“누구, 또 이렇게 부이초를 찾아다 줬던 이가 있었어요?”
“이거? 아니야. 의당에서 약서를 훔쳤어. 거기 적혀 있길래 알았고.”
‘위급할 때 그대를 더 잘 치료해 주려면 주가에서 사용하는 약초를 잘 알면 좋으니까.’라고 덧붙이며 백기하가 쑥스럽게 웃었다.
“…….”
감동은커녕 이 위기의식이라고는 없는 남자를 세화는 진심으로 한 번 더 흠씬 때려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신영의 저택에서 약초를 훔쳐 온 것도 불안한데 약서까지 훔치다니.
혹 범인을 찾는다 어쩐다 난리가 나서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니 얼굴 내밀어 봐. 내가 발라 줄게.”
“싫어요. 내 얼굴에 그런 초록색 진흙 같은 거 발라 놓을 생각 하지도 말아요.”
뭘 하느라 바쁘셨는지 이 남자는 아직 오늘 연회를 위해 치장했던 예복 차림 그대로였다.
‘그런데 나는 그런 당신 앞에서 잠옷 차림에 맨 얼굴에 머리도 풀었는데 얼굴에 풀칠까지 하란 말이야?’
“하지만 이걸 발라야 좋다는데?”
“그, 그럼 내가 이따 방에 가서 바를게요. 날 줘요. 그럼 되죠?”
“…….”
“왜요. 또.”
“내가 발라 주려고 저기 소셋물도 미리 데워서 여기까지 가져다 놨는데.”
“…….”
“……내가 발라 주려고 여기 수건도 미리 가져다 놓고, 기름도 미리 챙겨 뒀는데.”
“아, 알았어요. 그럼 그거 바르고 이상하다고 웃기 없기예요.”
“응.”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짓이겨진 약초의 진액을 듬뿍 흡수한 부드러운 천이 그녀의 눈가와 볼을 세심하게 토독 토독 두드렸다.
그가 잘 칠할 수 있게 눈을 감고 있던 그녀는 그 느낌에 괜히 피식 웃음이 났다.
아까 창문 밖에서 거대한 백호가 솥뚜껑만 한 발을 들어 올리고 있던 모습이 생각난 것이다.
한 개 삐죽 내민 발톱으로 혹 창틀이 망가지기라도 할까 봐 토도로도독 살살 두드리던 그 모습이.
“다 됐다. 이대로 일각 정도 놔두었다가 씻어 내면 된대.”
그런 후 백기하는 재빨리 어디선가 그녀가 쓰는 세안통을 가져왔다.
따로 챙겨 둔 짐에는 그의 말처럼 그녀가 사용하는 수건과 세안 후 바를 산기름까지 들어 있었다.
그가 자신을 위해 챙긴 것들을 본 그녀는 오늘 연회에서 돌아온 뒤로 제 기분이 왜 그리 좋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창피했던 것이다.
사연주를 몰아세우기 위해 눈물을 쥐어짜며 연기를 하고. 아버지까지 위험에 끌어들이고.
제가 한 일에 대해서는 한 점 후회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 벌어진 일의 모든 진실을 알면서 내내 그녀가 하는 일을 지켜봤던 그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너무 악독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복수에 눈이 먼 그녀의 행동에 실망한 건 아닌지.
돌아갈 길도 없고, 있어도 돌아갈 생각도 없는 주제에, 그의 평가만은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물이 좀 식은 것 같은데 다시 데워 올까? 그러면 일각 후엔 딱 알맞은 온도가 되겠지?”
그리하여 오늘 보인 눈물 때문에 그녀의 눈가가 터서 아프기라도 할까 봐 이 모든 걸 준비했다고.
산기름을 미리 천에 적셔 두니 어쩌니. 물을 데워 두니 어쩌니 하면서 부산을 떠는 남자의 모습에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슬픈 것도 없는데 울고 싶어지기도 하고, 혼자 바쁜 남자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리고 싶어지기도 했다.
그런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 살짝 입술을 깨물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백기하가 행동을 멈추고, 하얀 이에 짓눌린 빨간 입술을 목이 바짝 타는 듯한 시선으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른침을 삼킨 그가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불쑥 물었다.
“입 맞춰도 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