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주가 더는 연기를 할 정신도 없다는 듯 다급하게 소리쳤다.
“저걸 검사해요, 저걸!”
사연주의 울부짖음에 의원들의 당황한 시선이 일제히 주경현에게로 향했다.
그 사이 세화가 먼저 나섰다.
“그럼 나도 검사를 받을게. 나도 저 문서를 만졌으니 저게 문제였다면 내 몸에서도 독이 나오겠지.”
“꺼져! 넌 이미 해독제를 먹었을 것 아냐!”
사연주가 소가주를 향해 빌었다.
“소가주님, 제발 저것들을 검사해 주세요. 저 문서가 아니고서야 제게서 독이 나올 이유가 없다고요!”
“너야말로 꺼져라!”
“소가주님!”
엉엉 울면서도 소가주에겐 통하지 않을 것 같자 사연주가 연회장에 있는 이들을 향해 꿇어앉았다.
“제발,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전 정말 아니에요. 제가 미리 소사를 먹었다면 그리 당당히 검사를 받았겠어요? 저 문서에 문제가 있었던 게 분명해요. 제발 저 서류를 검사하게 해 주세요. 제발요.”
“…….”
“…….”
대다수가 싸늘하게 침묵했으나 이 난장이 재미있던 몇몇이 사연주의 애원에 호응했다.
“까짓거 해 줍시다.”
“그래요.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진위를 밝혀야 누구도 더 억울하고 덜 억울한 것이 없죠.”
“맞아요. 이렇게 끝냈다가 한쪽을 편들기 위해 제대로 검사를 안 했네, 뭐네. 뒷말이라도 나오면 어떡하나요?”
그들의 얼굴에 그득히 퍼져 있는 감정은 그저 흥미뿐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사연주는 희망을 보는 것 같았다.
그녀가 소가주를 돌아보았다.
추잡하게 얽힌 상황에 머리가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주경현은 다른 이들의 반응에 할 수 없이 의원들에게 턱짓했다. 저 문서를 검사하라는 의미였다.
할 수 없이 다가간 의원들이 종이 위로 용비늘침을 눌렀다.
하지만 침은 그대로였다.
“그렇게 해서 뭐가 나오겠어요?! 몸에 들어가야 독이 된다잖아요! 그러니 만져요! 당신들도 만지라고요! 먹든지!”
“…….”
사연주의 고함에 주경현도 그렇게 하라는 의미인 듯 한숨과 함께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의원들은 조금 망설였다. 소사가 아니라면 무슨 독일지도 모르는데 누가 섣불리 이것을 만지고 싶겠는가.
그들은 신영과 소가주의 건강을 책임지는 의당의 일원이었다. 신영과 소가주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무슨 위험이든 감수하겠지만 저 사가 계집을 위해서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가?
주씨 혈족만 되었어도 할 수 없이 실행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사씨를 위해?
게다가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뭐가 됐든 나쁜 것은 저 머리 검은 짐승인 사가 계집인 듯한데?
의원들이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누군가 벌떡 일어났다.
커다란 손이 바닥에 떨어진 조각들을 주워 모으더니 제 손에 마구잡이로 비볐다.
이내 그 종잇조각들을 망설임 없이 입안에 쑤셔 넣고는 거칠게 씹어 삼켰다.
주명윤이었다.
“뭐가 되었든 우리 집안의 일이니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자 이제 절 검사하시지요.”
주명윤의 형형한 눈빛이 사연주에게 향해졌다.
“네 말마따나 만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먹기까지 하였다. 아주 적은 양이라도 독이 묻어 있었다면 분명 반응이 오겠지. 허나.”
주명윤이 이를 사리물었다.
“만약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면 넌 더 이상 내 조카가 아니다. 알겠느냐!”
“원, 원로 어른.”
“세화가 아니어도 내가 널 내쫓을 것이다. 우리 집안에서 네게 허락했던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네 것이 아니고 그 어떤 장소에도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이건 나 주명윤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다!”
“!!”
“!”
이름을 걸고 하는 절연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동정심을 보이지 않겠다는. 설사 죽어 가는 모습을 보아도 돕지 않고 지나치겠다는 완벽한 절연을 뜻했다.
지금 상황에 대한 주명윤의 분노를 짐작할 수 있는 말이었다.
숨을 삼킨 사람들이 일제히 의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대체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게 될지 궁금했던 것이다.
의원이 사연주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주명윤의 손가락에 상처를 내고 용비늘침을 찔렀다.
침은 깨끗했다.
“아니야!!!!!!”
사연주가 몸부림쳤다.
“해독제! 해독제를 미리 먹었을 수 있잖아요!”
의원들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독이 해독되는 데 시간이 걸리니 침에는 반드시 검출돼 나올 겁니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다고!”
사연주의 비명을 차마 들을 수 없다는 듯 속눈썹을 잘게 떤 세화가 고개를 돌렸다.
가려진 그 안쪽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어느 날의 기억으로 날아갔다.
“바싹 말려야 해. 조금이라도 수분이 남아 있지 않게.”
“헌데 이게, 정말 그런 효과가 있다고요? 그런 게 알려졌다면 벌써 다들 영목의 잎을 모두 떼어 갔을 거예요.”
“다른 영목은 안 돼. 그 영목이어야 해.”
“일단 가지고 있어. 내 보답이니까. 위급한 상황에 조금씩 먹고.”
영선과 함께 초소에서 영목의 이파리들을 떼어 왔었다.
치유력을 가진 푸른 거북이의 영단에서 흘러나온 영력이 아주 오랜 시간 담뿍 배어든 이파리들을.
전생에서 이 잎의 가루를 사용해 백기하가 새롭게 실종되었다가 구출된 아이들을 살려 내는 것을 보았었다.
지금은 오랜 전쟁 때문인지 새로 실종되는 아이들이 없고, 오래전에 실종되었던 아이들은 이미 사망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때문에 어떤 독도 즉각 해독하고 빈사의 상태에서도 살려 내는 가루는 제가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게다가 두고 봐요. 이게 아주 재미있는 일로 이어질 테니까.”
“재미있는 일이라니. 그게 뭔데?”
“저 소가주가 머리가 조금이라도 있거나. 그렇지 않다고 해도 주변 호위들이 머리가 있다면 아마 내 사촌 동생이 고초를 겪겠죠.”
소가주가 저 동생을 데려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리고 오늘, 연회장에 입장하며 사연주가 벽에 기대 서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 순간 그녀는 소매 안에서 가루를 담아 둔 종잇조각을 조심히 끄집어냈다.
손안에 보이지 않게 끼우고 술병을 집는 척 병목을 잡으며 술병 안에 털어 넣었다.
그 이후 언제 일이 벌어질지 몰라 자리에 앉고 나서부터 계속 술을 마셨던 것이다.
‘명경을 소사로 혼동하게 하는 것 하나로는 부족해. 의원들도 이곳에 있는 주가들도 바보가 아니니 나중에 혹 누군가 소사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고 떠올릴지도 몰라.’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예 더 이상 생각할 가치가 없다고 느끼게 만들면 된다.
그래서 공방이 오고 갈 때 내리깐 척하고 있던 시선을 살짝 들었다.
사연주와 눈이 마주친 순간, 마치 서둘러 눈빛을 숨기듯 고개를 찢어진 종이를 향해 돌렸다. 이제 이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을 사연주가 문서를 물고 늘어지도록.
주씨들의 냉정함을 이곳에서 세화보다 더 잘 아는 이는 없었다. 오 년간 계속된 고문으로 뼈에 새길 정도로 잘 알게 된 것이다.
아무도 사씨를 위해 제 몸을 희생하여 문서를 직접 검사를 하지 않을 거라고.
다만 제 아버지는 다를 터였다. 세화 그녀를 위해 기꺼이 직접 손을 대실 터였다.
“아버지. 제가 술을 따라 드릴게요.”
“아니다. 아비는 입맛이 없구나. 향이 좋던데 술은 네가 마시거라.”
“그래도요. 제가 신영께 불경하여 깜짝 놀라셨지요? 얼마나 철렁하셨을까. 너무 죄송하여 그러니 받아 주세요. 게다가 제가 이대로 백가에 가고 나면 또 언제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네가 백가행에 대해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오늘에서야 알아 그렇단다. 그렇게 겁먹고 울 정도로 두려워하는 것을 몰라줘 미안해서 그렇고.”
“괜찮아요. 백가주도 나쁜 분이 아니시니, 무사히 잘 다녀올 것입니다.”
“백가주는……. 아니다. 그래, 그럼 술이나 한잔 따라 주거라. 분위기도 좋지 않은데 우리 딸이 주는 술이나 몇 잔 마셔야겠다.”
비록 아버지까지 끌어들이게 되어 죄송했으나 세화는 일단 눈앞의 사연주에게 주목했다.
“아니야! 아니라고!!”
비명을 지른 사연주가 주경현에게 매달리려 했다.
“소가주님! 소가주님, 저는 아니에요! 아니에요!”
“시끄럽다!”
주경현에게 닿기도 전에 호위들이 달려와 사연주를 강하게 억압했다.
“감히 신영을 뵙는 자리에 독을 들고 들어온 년이다! 지하 밀실에 처넣어라!”
“아니에요! 모함이야. 이건 모함이라고요!”
“너희를! 꼭 죽일 거다. 너희가 내 가족에게 그러했듯 이 혈족들 중 누구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
“누가 저 입을 막아라!”
“누가 저 입을 막아라!”
그 말에 호위 중 하나가 사연주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
입안이 찢어졌는지 붉게 연지를 칠한 입술 사이로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난생처음 겪어 보는 격통에 사연주가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을 껌벅댔다.
“끌고 나가라!”
“소, 소가주님! 소가주님! 소가주님!!!!”
사연주가 악을 쓰며 발버둥 쳤지만 호위들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팔을 붙잡힌 사연주가 연회장 바닥에 질질 끌려나갔다.
“소가주님!! 여러분!! 여러분 절 좀 살려 주세요! 여러분!”
처참한 모습으로 끌려나갔지만 연회장 안의 이들 모두 언제 편을 들었냐는 듯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사실이 사연주를 더욱 비참하게 했다.
결국 그녀와 연회장 사이로 두꺼운 나무 문이 소리도 없이 닫혔다. 끝까지 이어지는 고함 소리만이 멀어지는 거리를 알 수 있게 했다.
소가주 주경현이 초조한 모습으로 상황을 마무리했다.
“저 아이가 내 술을 따르기도 했으니 나도 가서 치료를, 아니 검사를 받아야겠네. 연회는 명윤, 자네가 맡아 주면 좋겠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백가주. 어지러운 모습을 보이고 이렇게 자리를 뜨게 되어 죄송합니다. 허나 저는 의원의 진료를 받아야 하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백가주가 알겠으니 어서 가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주경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의원들과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제 술에 아주 약간의 독이라도 들어갔을까 봐, 그래서 제 몸이 상할까 봐 전전긍긍한 눈치였다.
‘자기 몸은 여전히 끔찍이 여기고 있구나.’
그런 주제에 다른 이에게 손을 대는 데는 한 점 거리낌이 없지.
사연주의 모습을 보니, 아주 오래전 마지막으로 제 볼에 내리쳐지던 그 격통이 떠올랐다.
아련하게 젖은 세화의 시선이 주경현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그래. 건강을 잘 챙기고 있어. 그래야 내가 무너뜨리는 보람이 있지.’
물기 어린 속눈썹 아래에서 세화의 시선이 사납게 번뜩였다.
‘다음은 네 차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