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254)

젖은 얼굴은 여전히 가련하기 이를 데 없었고, 턱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마저 애처로워 보였건만.

눈물이 맺힌 긴 속눈썹 사이로 비치는 눈빛은 어찌나 섬뜩하던지.

사연주의 턱이 순간 잘게 떨렸다.

“어, 언니.”

“앉아.”

사연주가 쉽사리 앉지 못하고 망설이자 주명윤이 호통을 쳤다.

“당장 앉지 못하겠느냐!”

“워, 원로 어른.”

“나 역시 지금까지 네가 벌이는 방만한 짓거리를 몰라서 그냥 넘긴 줄 아느냐?! 네가 그래도 안쓰러운 네 언니는 잘 챙겨 주는 듯하여 보고도 못 본 척 잘못을 덮어 주었거늘.”

무장의 노기는 본신의 영력이 많지 않은 사연주가 버텨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걸 모르고 감히 모함이니 뭐니 소리쳐? 어서 네 언니의 말을 따라 그 앞에 꿇어앉거라! 나 역시 네 언니와는 별개로 네가 지금까지 벌였던 모든 일의 증좌들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감히 모함이란 말을 입에 올리며 발뺌할 생각이냐!”

주명윤의 호통에 사연주가 벌벌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르자 세화가 그런 제 아버지를 부드럽게 말렸다.

“아버지, 그러지 마세요. 저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은 언니인 제 잘못입니다.”

세화가 처연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슬처럼 투명하고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물이 쉴 새 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저는 저 아이가 혹 쫓겨나기라도 할까 봐, 아버지와 어머니 모르시게 도박 빚을 갚아 주려 가진 돈을 다 쓴 것은 물론, 모자란 부분을 영력으로 내어 주느라 본신이 다 상했건만…….”

“무어라? 너 그래서 그리 전조도 없이 탈피를 했던 것이냐?”

“네. 신영을 뵙고 온 뒤 몸이 너무 좋지 않아 계속 쓰러져 있었습니다. 헌데 달래도 안 되고 타일러도 안 되니, 언니 된 마음으로 가슴이 아프지만 저 아이를 혼을 내게 되었지 뭡니까.”

헉.

듣기로는 백가로 가게 된 게 너무 무섭고 놀라워 충격을 받아 쓰러졌다고 하더니, 사촌 동생의 도박 빚을 갚아 주려다 그렇게 되었다고?

듣는 이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사연주를 향했다.

주명윤이 전쟁 중 군자금과 군수품을 보태느라 청빈하게 살아온 것은 주가 혈족들이 다 아는 얘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저렇게 많은 빚을 갚으려면 실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고.

어린 아가씨가 부모에게 얘기해도 될 것을 혼자 전전긍긍하면서 얼마나 속을 끓였겠냐며.

저 문서들을 보고 나니 충분히 그럴 만했겠다고 혀를 찼다.

“헌데 저 아이는 그에 앙심을 품고 집을 나가서는 제게 먹일 독을 사지 않나. 제가 그날 또 도박관에 가는 것인 줄 알고 뒤따르지 않았다면 독인 줄도 모르고 먹었을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하였습니다.”

“!”

당연한 일로 그 정도 혼이 났다고 독을 샀다니.

“…….”

주명윤의 주먹이 무릎 위에서 힘껏 움켜쥐어졌다.

부르르 떨던 그가 물었다.

“그래서 용비늘침을 들고 다니게 된 것이냐.”

“네. 약방 주인의 말을 듣고도 차마 믿을 수가 없어서요. 혹 약초를 산 것인데 오해가 있을 수도 있으니 악의를 감별하려 한 것인데. 정말로 용비늘침이 모두 다 변색이 되어…….”

세화가 제 눈가를 꾹꾹 눌러 닦았다. 붉어진 눈가가 어찌나 안쓰럽던지 보는 이들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일단 다른 나쁜 짓을 못 하게 자금이 될 만한 것을 수거하였더니 저 아이가 그것에 또 앙심을 품고 사사건건 저를…….”

와. 사연주가 기가 막혀 입을 뻐끔거리다 간신히 말을 이었다.

“어, 언니 정말 무섭네요. 내 얼굴이 찢어질 정도로 때리고 머리카락을 죄 뽑았으면서, 그걸 그렇게 억울한 얼굴로 혼을 냈다고 표현해요? 내게 이런, 이런 모함들을 덮어씌우면서?”

“내가 언제?”

“뭐, 뭐라고요?”

“난 도무지 네가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는지 이해가……. 혹 혼인도 치르지 않은 네 몸에 자그마한 생채기라도 날까 봐 장난으로라도 널 치거나 때린 적이 없는데, 대체 어떻게 그런 식으로 없는 말을 지어낼 수가 있어?”

“무, 무슨 말이에요?! 언니가 내가 가진 걸 죄다 빼앗아 가고 가문에서 내쫓으면서 얼굴을 다 잡아 뜯어 놨잖아요!”

“그럼 네 얼굴이 왜 그렇게 멀쩡한데.”

“그야 내가 환계의 약들을 들이부어 간신히 낫게 된 거죠!”

“조금 전엔 내가 가진 걸 죄다 빼앗았다며. 그 약은 어디서 났는데? 앞뒤가 안 맞잖아.”

“!”

당황한 사연주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 그건 그러니까. 일단 날 때려서, 내가 치료를 하고 그다음에 언니가 내 물건들을 빼앗아서-.”

“그만 좀 하거라!”

주명윤이 다시금 호통을 치자 얇고 작은 어깨가 움찔했다.

“내가 말했지. 내게도 증좌들이 있다고! 그 말을 듣고도 아직도 이리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이냐!”

침통한 눈빛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주경현이 주명윤을 만류했다.

“자네도 그만하게. 어찌 아이들의 일에 직접 나서려 하는가.”

하지만 말을 보태면서도 입이 썼다.

평소라면 밀리는 쪽에는 절대로 끼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이미 승기를 잃은 듯한 사씨 아이가 여기서 끝장나고 나면 다음엔 제 차례라고.

‘아까 쓸데없이 내 이야기를 저 계집이 꺼내 들어서는. ……분명 세화가 그것도 해명하니 뭐니 하면서 다시 언급할 텐데.’

못마땅한 그의 시선이 사연주를 향했다.

세화가 소가주를 보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럼 소가주님께서 지금 저희의 말 중 어느 쪽이 진실인지 판별해 주시는 건 어떠실까요.”

“뭐? 내가?”

“네. 신영께서 계시지 않으니 이곳에서 가장 고귀한 분은 소가주님이 아니십니까. 그러니 소가주님이 판결해 주시지요.”

“…….”

“물론, 소가주님을 이런 작은 일로 머리 아프게 해 드리진 않을 겁니다. 저는 제가 지금 한 말들이 다 진짜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걸 확인해 주시면 됩니다.”

“그게 무어냐.”

“저 아이가 지금 독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을 해 주십시오.”

“!”

“헉! 여기까지 독을 가져왔다고요?”

“신, 신영께서 주관하시는 연회에 독을?”

세화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불안한 얼굴로 보고 있던 사연주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거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오늘 입은 예장은 서월이 준비해 준 것이다.

제가 입고 온 것, 가지고 온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니 뭐가 나온다 한들, 혹 나오지 않는다 한들 제게는 한 점의 책임도 없는 것이다.

혹시 몰라 가져왔던 산부들 가루마저 처음부터 내던졌으니 이젠 더 거리낄 것이 없었다.

“독이라니. 그럼 주가의 시녀를 불러 저 아이의 몸수색을 하면 되는 것이냐?”

“아니요. 의원을 불러 저 아이의 피를 검사해 주십시오.”

“!”

“!?”

주경현이 눈살을 찌푸리다 되물었다.

“피?”

“네. 저 아이가 독을 사 갔다는 약방 주인이 자백한 바에 의하면, 소사라는 약초는 섭취하면 몸속에서 독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예를 들어 저 아이가 소사를 산 것이 맞다면 직접 먹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몸에 들어간 약초가 저 아이의 피에 스며들며 독으로 변했을 것이고, 저 아이는 언제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는 독을 가지고 다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럼 네게 독을 쓰기 위해 자신마저 위험하게 했다는 말이냐?”

“아닙니다. 소사가 섭취자의 몸에 해를 끼치는 것은 혈액에 스며든 독이 살 속으로 파고드는 사흘 이후의 일이고, 그 안에 해독제를 섭취하면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허어. 넌 그래서 저 아이가 그 소사를 섭취했을 거라 여기는 거고?”

“네. 이제 저와 마주칠 기회가 많지 않은데, 신영의 연회에는 제가 참석할 것을 알고 있었을 테니 반드시 섭취했을 거라 여깁니다.”

세화가 젖은 얼굴을 닦아 내며 연회장에 모인 이들을 향해 안타깝게 입을 열었다.

“부끄러운 가족의 일을 이리 드러내어 여러분들의 귀를 어지럽힌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허나 제 능력이 부족하여 이 아이의 행동이 이미 언니인 제가 다스리기에는 무리인 상황이 되었으니, 여러분들께서도 상황을 지켜보신 후 제 말의 진위여부와 일의 전말을 파악하고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그녀는 속이 상해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들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를 꺼내 놓고는 고개를 숙였다.

“우리는 모두 한 혈족이 아닙니까. 여러분들의 누이라고 여겨 주시고 부디 함께 이 아이를 바로잡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어쩜.

누군가 고개를 나직이 흔들었다.

‘저 어린 아가씨가 얼마나 속을 끓였으면 저런 말을 할까.’

‘역시 원로가의 아가씨네요.’

‘세상에 저 사촌이란 아이는 어쩌면 저리 악독한 심성을 가져서.’

‘쉿. 아직 독이 나온 게 아니잖아요. 일단 지켜봅시다.’

사연주는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약한 척을 하고 있었던 것도 잊고 웃음을 터뜨렸다.

“언니, 잘 생각해야 할 거예요. 이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 내게 뭘 먹이려 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아무것도 먹은 게 없거든요. 그러니 이 자신만만한 태도야말로 언니에게 독이 될 거예요.”

“아직도 그런 말을 하다니…….”

세화가 또다시 애처롭게 울기 시작하자 아직 독이 나오지 않았음에도 지켜보는 이들의 눈이 세모꼴로 떠졌다.

사연주가 그 시선을 느끼고 이를 악물었다.

‘좋아. 얼마든지 검사하라지. 뭘 보고 와서 혼자 망상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소사라면 반드시 입으로 섭취해야 하는 독이잖아? 먹은 게 없으니 전혀 상관없지!’

그녀는 홀로 인계에 남겨졌을 때부터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고 원한을 불태우느라 물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한 것이다.

주세화가 제게 소사를 몰래 먹이려 했어도 기회가 없었을 거라 장담할 수 있었다.

‘지 계획이 실패한 줄도 모르고선. 망신을 크게 당해 봐야 저년도 수치를 알겠지.’

“사연주. 너도 세화의 말에 동의해 검사를 받겠느냐?”

“예!”

그리고 그 대답이 있자마자 주경현에 의해 빠르게 의원 둘이 소환되었다.

사연주가 피검사를 하라며 자신만만하게 손을 내밀었다.

“이걸로 하시지요.”

세화가 가져온 용비늘침을 내밀었다.

의원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받아들더니 살짝 피를 낸 사연주의 상처 위로 용비늘침을 가져다 댔다.

“헉!”

“!!”

그 순간 연회장이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피가 닿은 부분이 새까맣게 변색된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요!”

주경현이 이를 물었다.

“이, 발칙한 년이 감히 신영께서 머무시는 연회에 독을 가지고 와?”

“아니에요! 이, 이건 분명! 이건 분명 저년이, 아니 언니가. 언니가 내게 소사가 든 뭔가를 먹인 게 분명해요! 틀림없다고요!”

사색이 된 사연주가 손을 내저었으나 경황이 없는 중에 자신도 모르게 ‘저년이,’라는 말을 뱉고 말았다. 그 소리까지 들은 이상 그녀의 말을 믿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세화가 쐐기를 박았다.

“네 입으로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다며. 그럼 내가 주는 것도 먹지 않았을 텐데, 앞뒤가 맞는 말을 해야지.”

“시끄러워! 뭐가 됐든 난 아니라고! 정말이에요. 모두 믿어 주세요. 난 아니에요! 소사 따위 알지도 못해요! 아니라고요!”

가슴이 아파 차마 바라볼 수가 없다는 듯 세화가 시선을 내렸다.

바닥으로 향한 그녀의 눈에 사연주에 의해 갈가리 찢긴 채 흐트러진 문서들이 놓여 있었다.

‘당연히 소사를 모르겠지. 그건 먹어서 독으로 바꾸는 소사가 아니라 만져서 흡수해 독으로 바꾸는 명경이란 약초니까.’

세화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렸다.

저 문서를 사연주 앞에서 꺼냈을 때 그녀가 반드시 잡아 찢을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문서에 피부로 흡수되어 독이 되는 명경을 발라 두었던 것이다.

소사는 혹시 문서로 쏠릴 수 있는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일부러 꺼낸 말이었고.

그 순간 표독스러운 사연주의 시선이 세화에게로 돌아왔다가 세화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쫓았다.

사연주의 시선 또한 바닥에 널브러진 종잇조각들로 향했다.

“저, 저 종이들! 저거예요. 저것에 독이 묻어 있었던 게 분명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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