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254)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뭘 오해하게 말씀드리고 있다는 거지?”

그렇게 묻자마자 사연주가 세화의 것보다 더 가냘픈 목소리로 목을 떨며 대답했다.

“언니가 행수들에게 이미 언니 입으로 얘기했었잖아요. 소가주님께서 언니의 탈피를 일부러 방치하신 것이 아니라, 그때 소가주님께서는 신영께서 내리신 중요한 명을 수행하시던 중이셨다고요.”

“…….”

“헌데 지금은 그 부분은 쏙 빼놓고 마치 소가주님께서 일부러 언니를 놓고 간 것처럼 얘기하고 계시잖아요? 그 부분만 들었을 때 다른 이들이 소가주님을 어떻게 오해할지 뻔히 알면서 어떻게 그렇게 교묘하게 상황을 한 부분만 언급할 수 있죠?”

“…….”

“게다가 주가의 혈족 중 누가 소가주님을 위해 희생하는 일을 마다하겠어요. 만약 제가 언니의 입장이라면 저 역시 쌍수를 들고 자원하여 백가로 떠났을 거예요. 헌데 전 자격이 되지 않는걸요.”

그것이 못내 슬프고 애석하다는 투로 사연주가 덧붙였다.

“헌데도 소가주님께서는 주가 혈족이라면 누구나 했을 법한 그 일조차도 어찌나 마음을 쓰시는지. 언니에게 두 번은 받지 못할 큰 선물까지 내려 주시지 않았습니까. 저택의 마당에 가득 찬 선물을 정리하느라 하인들이 모두 고생했다 들었는데.”

세화를 힐끔 바라본 사연주가 여전히 그녀가 침묵하며 대답할 생각이 없는 것을 보고 말을 이었다.

“그런 말들은 모두 쏙 빼놓고 얘기하시니, 이는 마치 소가주님께서 인의도 모르고 신의도 모르는 이처럼 보이게 만드시려는 것 아니겠어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녀의 입술 사이로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침통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언니께서 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이시는지는 모르겠으나, 오늘 언니의 모습은 정말 언니답지 않게 느껴지네요. 사람들이 오해하게끔 소가주님을 모함하는 언니의 모습이 무서울 정도예요.”

일장 연설을 통해 사연주는, 주가 일원이라면 누구나 자원했을 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선 안 된다고 세화의 백가행을 깎아내리고.

이미 선물도 잔뜩 받은 주제에 세화가 교묘한 화법으로 소가주님을 모략하는 파렴치한인 양 몰아갔다.

그리고는 애처로운 표정 속에 기세등등한 시선을 감춘 채 세화를 응시했다.

‘왜? 할 말 있으면 더 해 봐. 내가 다시 꺾어 줄 테니.’

뭐라고 변명할지 한번 들어나 볼 생각이었는데 세화의 입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 지가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더러운 속셈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활짝 까발려졌으니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겠지.’

소리높여 웃고 싶은 것을 참아 낸 사연주가 여기서 쐐기를 박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눈썹을 아래로 꺾으며 가련하게 입꼬리를 떨었다.

“그리고. 말을 하는 김에 하나 더 해야겠네요. 이 기회가 아니라면 언니는 나를 제대로 만나주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녀의 얼굴 위로 안쓰러운 눈물이 뚝뚝 흘렀다.

“대체 요즘 제게도 왜 그렇게 잔인하게 구시는 건가요? 소가주님께서 불쌍한 저를 조금 챙겨주시는 것마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러시는 건가요?”

그 말에 노래를 듣는 척, 무희들의 춤에 집중하는 척하며 곁눈질로 이쪽 상황에 집중하던 이들이 또 한 번 놀랐다.

‘음? 아니, 이건 또 무슨 전개람?’

‘갑자기 소가주님이 저 사씨를 왜 부르시나 했더니.’

‘백가주와 소가주님, 그리고 원로 아가씨의 삼각관계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어?’

‘사실은 방계 사씨까지 포함돼 사각 관계가 벌어지고 있었단 말이야?’

아예 대놓고 시선들이 모이기 시작하자, 그것을 눈치챈 사연주는 제 얼굴 위로 흐르는 눈물이 멀리 떨어진 이들에겐 제대로 보이지 않을까 봐 연신 손으로 닦아 냈다.

여기 눈물 있다고. 지금 이렇게 내가 서럽게 울고 있다고.

“정신을 잃고 앓아누운 언니를 밤새 간호했건만. 그런 나를 일어나자마자 흠씬 때리지를 않나. 이유조차 말해 주지 않고 가진 것을 다 빼앗아서 집에서 내쫓지를 않나.”

사연주가 그간의 설움을 폭발시키듯 떨리는 목소리를 쏟아 냈다.

“게다가 언니는 제게 다른 것도 실수하셨어요. 언니께서는 연회에서 제가 언니에게 독을 썼다고 오해하셨는데, 제 해명도 듣지 않으셨지요.”

‘헉, 독? 지금 독이라고 했나요?’

‘이건 또 무슨 말이죠?’

대체 이야기가 어디까지 가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은침으로 검사하셨지만 그건 독이 아니에요. 그건 산부들 가루였어요. 산부들 가루는 안에 든 성분때문에 은침에 반응하지만, 독은커녕 몸을 보호하는 효능을 발휘하죠.”

사연주가 제 소매에서 꺼낸 것을 세화의 앞으로 툭 던졌다.

“그래도 의심이 난다면 자, 다시 검사해 보세요. 저는 그냥 언니가 백가에 가는 일이 무서워서 앓아누운 것이 안쓰럽기만 해, 저를 때리고 미워했음에도 좋은 약초를 구해 왔던 것인데 언니는 내 말 따윈 하나도 들어주지 않았죠. 우리가 그간 나눠 온 정이 있음에도 말이에요.”

연주는 도무지 제가 왜 이런 처지에 놓여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처럼 울먹였다.

“어서 이게 독인지 검사해 보시라고요. 나는 맨몸으로 쫓겨났음에도 그간 날 키워 주신 은혜를 생각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언니가 소가주님께도 이러는 것만은 정말로 참을 수가 없네요. 어떻게 고귀하신 차기 신영께 그런 막말을 쏟아 낼 수 있는 거지요?”

그 말로 그간의 상황을 알게 된 소가주 주경현의 눈에 연민이 어렸다.

‘그간 그런 고충이 있었구나. 헌데 홀로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침묵한 채 참고 있었다니.’

사연주는 그 시선을 느끼고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소가주님께서 날 보고 계셔.’

한층 더 기세등등해진 사연주가 마지막 쐐기를 박듯 의기양양하게 주세화를 공격했다.

“소가주님이 이토록 자비롭지 않으셨다면 언니는 이 자리에서 몇 번이고 죽어도 모자란다는 걸 알기나 하는 거예요? 언니는 그렇다 쳐요. 언니 가족들은요? 그분들은 왜 언니의 못된 심보에 희생되셔야 하지요? 무슨 잘못이 있으셔서?”

못된 심보라는 말에, 아이들의 일에 선뜻 나설 수 없어 침묵하고 있던 주명윤이 폭발했다.

“그 입 다물어라! 그게 지금 무슨 망발이냐!”

헌데 사연주가 그런 주명윤을 보며 더욱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원로 어르신께선 늘 이러시죠. 언니의 잘못이 명백한데도 늘 저만 혼내셨어요. 대체 제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저를 이리 무섭게 질책하시는 건데요?”

“뭐라?!”

“아버지, 그만 하세요.”

“세화야. 하지만 저 아이가 지금-.”

“연주에겐 제가 설명할게요.”

침착한 목소리로 제 아버지를 말린 주세화가 시작부터 눈물을 떨어뜨렸다.

사연주가 다른 이들에게 보일 제 모습을 신경 쓰느라 그저 조금 표정을 꾸며 내며 눈물을 쏟았던 것과 달리 주세화는 얼굴을 아끼지 않았다.

온통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투명한 눈물방울을 쏟아 내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얼마나 서럽게 제 감정을 참아 내는 듯 보이던지.

사연주가 조금 전 보였던 모습보다 훨씬 더 가련하고 애처로웠다.

세화가 그 상태로 제 소매 속에 들어 있던 것을 꺼내 조금 전 사연주가 했듯이 툭, 앞으로 던졌다.

모두의 시선이 작게 둘둘 말린 천 뭉치로 향해졌다.

“내가 그날 사용한 침이야. 네가 그리 억울하다 하니 이걸로 다시 네가 사용했다는 산부들을 검사해 볼까?”

“뭐라고요?”

“누가 저걸 한번 열어 봐 주세요. 내 손으로 했다가 또 뭘 바꿔치기했다는 오해를 받긴 싫으니까.”

그 말에 환족들의 시선을 받은 시종 하나가 황급히 다가가 두루마리처럼 말린 천 뭉치를 펼쳐 열었다.

“그걸 모두에게 보여 주세요.”

“용, 용의 비늘로 만든 침입니다.”

“!”

“헉, 용비늘침이라니. 그걸로 검사했는데 독이 나왔던 거라고요?”

주변이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신수인 용의 비늘에는 옛 주가의 권능인 천리안이 녹아 있어, 침으로 만들어 독을 감별하는 데 주로 쓰였다.

종류와 상관없이 악의를 감별하여 섭취하는 자에게 해가 되는 것들을 모두 구별할 수 있었으니까.

“말도 안 돼요!”

사연주가 급히 부인했다.

“그땐, 그땐 분명 그냥 은침이었어요. 그땐 그냥 은침으로 검사했다고요!”

“비늘의 겉 부분을 깎아 내고 나면 반투명한 보신만 남게 되니 네가 그걸 은침으로 오해한 것도 무리가 아니지.”

“아니에요! 은침이 아니었다고요!”

“그럼 그 이후 일주일이나 탈피 후유증으로 앓아누웠던 내가 갑자기 용비늘침을 구해서 바꿔 가지고 왔다고? 오늘 네가 이 말을 할지 안 할지 어떻게 알고서? 그리고 주가의 저택에서 만난 이들은 모두 출입을 기록하게 되어 있으니, 내가 어디선가 급히 용비늘침을 구했다고 의심된다면 그걸 모두 조사해 보지 그래?”

세화가 눈물을 닦아 내며 덧붙였다.

“아, 그래 행수들. 그래. 내가 그 사이 뭔가를 샀다면 행수들을 통하는 길밖에 없었을 테니 그들을 조사해 보든지.”

사연주를 바라보는 세화의 얼굴이 처연하게 일그러졌다.

“대체 네가 내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내가 백가로 가기 전, 오늘 연회에서 혹 너와 친한 이를 만난다면 너에게 전해 달라 부탁하기 위해 이 문서들을 가지고 왔길래 망정이지.”

그런 말을 하며 세화가 제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내 놓았다.

“모두 잘 처리됐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얘기해 주려던 문서를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이야.”

주경현의 호위가 사연주를 인계에서 데리고 왔다는 걸 알고 일부러 챙긴 문서들이었다.

보기에는 고작 얇은 종이 몇 장일뿐이었으나, 거기 적힌 내용은 보이는 것만큼 가볍지 않았다.

각기 다른 도박관의 문서들이 사람들 앞에 펼쳐졌다.

주가윤과 주가한의 이름으로 발행된 문서들이었기에 사람들이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이 아버지인 주명윤을 따라 십 년 전 전선으로 떠난 후, 집에 돌아온 것이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란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오라버니들의 명패를 훔쳐 들락거린 도박관의 빚들을 내가 모두 상환해 주었다는 증서란다. 그리고 이건…….”

세화가 얇은 종이 몇 장을 더 꺼내 놓았다.

“네가 내 어머니의 패물들을 훔쳐다 판 전당포에서, 내가 그것들을 모두 찾아왔음을 증명하는 증서이고.”

“!!”

“헉!”

“패, 패물을 전당포에요?”

“그것도 장부인의 패물을?”

“모함이에요!”

사연주가 벌떡 일어섰다.

“또, 또 모함이에요! 또! 속으시면 안 돼요. 이게 언니의 수법이라고요! 게다가 제게 전해 주려고 이 서류들을 가져왔다는 게 말이 되나요? 그렇게 주고 싶었다면 서신으로 보내 주면 되었을걸. 이건 분명 이런 상황을 만들어 저를 모함하기 위해 준비한-.”

“모함이라 말하고 싶다면 같이 이 전당포에 가 볼까?”

세화가 그렇게 묻자 사연주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사람을 써야 했는데. 부린 이가 혹 패물의 값을 속이거나 떼어먹기라도 할까 봐 믿지 못해 직접 움직였던 것이다.

변장을 하긴 했으나 전당포 주인이 자신을 못 알아볼 것이라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순간 말문이 막히는 모습이 지켜보던 이들에게는 대답이 되고 있었다.

“이건, 네가 내 명패를 훔쳐 저속한 연회에 들락거렸던 것에 대해, 알면서도 묵인했음을 시인하는 연회장 시종들의 자백문이고. 이건 또 내 장신구들을 훔치고는 한 시녀에게 발각되자 그 시녀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내쫓았었지. 그 사건을 내가 비밀리에 조사했었는데 그 결과에 관한 문서란다.”

“…….”

“이건 네가 부리던 인간 사내의 자백문인데-.”

더 들을 수가 없던 사연주가 문서들에 달려들었다.

종이를 온통 구기고 찢으며 소리쳤다.

“모함이야! 더 들을 필요도 없어요. 이건 모함이라고요!”

그런 사연주의 모습을 보며 세화가 안타깝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찢도록 해. 혹, 제대로 전해지지 않기라도 할까 봐 어차피 열 장씩 받아 왔거든. 저택에 넉넉히 보관해 두었지.”

“뭐, 뭐라고요?”

“벌써 그렇게 흥분하면 안 될 텐데 큰일이구나. 실컷 찢었으면 다시 앉아 보렴.”

아직 눈물에 젖었으나 날카로운 세화의 시선이 사연주를 향해 번뜩였다.

“난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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