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254)

풍성한 예복은 벽에 기대 서 있기에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특히나 길게 늘어져 넓게 퍼진 치마는 주위 시종들이 움직일 때마다 한 번씩 밟히곤 했다.

곱디고운 치마가 지저분해지지 않도록 제 쪽으로 연신 끌어당기면서, 사연주는 비참한 심정을 애써 표정에서 숨겼다.

허나 원망의 감정을 눈 속에서 모두 지워 내지는 못했다.

비단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연주의 마음속에선 항상 다스려지지 않는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 들끓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히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게 문제였다.

오늘 그녀를 벽에 세운 것은 주경현이었지만, 그는 제가 남편으로 맞아 사랑해야 할 이였다.

그러면 괜시리 자신을 이 주가의 권역으로 데려와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경험하게 한 주명윤을 원망해야 할까?

아니면 제가 감히 원로의 저택을 넘보도록, 자신의 딸조차 방치한 채 전장의 식구들을 보살피러 나간 장부인을 원망해야 하는가?

화살은 늘 자신과 함께 있는 주세화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가장 부러웠으니까.

자신의 세상에서 가장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여자아이.

‘오늘도 그렇게 다른 이들의 주목을 받고. 신영께도 칭찬을 받고. 주가의 신물까지 넘겨받고. 게다가.’

그녀의 시선이 흘끔 백가주에게로 향했다.

‘저 백가주도 언니를 좋아하는 듯 보였지?’

힘주어 쥔 주먹 안쪽으로 손톱이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막 탈피한 제 언니가 저 정도로 아름답다면 저 가면 속, 백가주는 대체 얼마나 수려한 것일까.

게다가 어쩐지 주가와 그토록 오래 전쟁을 한 이 치고 주가에 그다지 원한도 없어 보이고, 오히려 더없이 다정한 성품으로 느껴지기까지 한 것이다.

‘그런 남자인 줄 알았다면 내가 간다고 할 것을 그랬어.’

허나 그랬더라도 육가에서 거절했을 것이다. 그녀는 신영의 핏줄을 이은 이가 아니니까.

‘난 대체 왜 사씨로 태어난 걸까. 내가 저 볼품없는 주씨들보다 못한 게 대체 뭐길래.’

또다시 제 예복을 밟고 지나가는 시종의 모습에 어찌할 수 없는 노기가 치솟을 무렵이었다.

‘응?’

그녀가 제 눈을 의심하며 다시 확인했다.

믿어지지 않게도.

‘헉! 소가주님이 나를.’

주명윤도 주세화도 외면한 자신을 주경현이 부르고 있었다.

거기다 그가 오라 하는 자리는 그의 옆자리, 그러니까 주가 소가주의 혼약자의 자리였다.

그 나직한 턱짓에 조금 전까지 가득했던 원망의 마음이 싹 사라졌다. 코끝이 시큰거리기까지 했다.

너무 기뻐서, 사연주가 나는 듯 그를 향해 걸어갔다.

* * *

“소가주님. 부르시었어요.”

주경현의 시선이 사연주를 향했다.

그를 향한 호의가 가늘어진 사씨의 눈 안에서 노골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앉아라.”

“네.”

제가 불러 준 것이 너무 좋아 표정을 감출 수 없는 듯 보였다.

목소리는 이슬이 풀잎 위를 구르는 듯 맑고 부드러웠고, 늘 사근사근한 성품 역시도 나쁘지 않았다.

‘얼굴도 뭐. 이 정도면 반반하고. 먼저 첩으로 들어 앉힌 서월이와도 그리 사이가 나쁘지 않으니.’

호위인 천령에게야 종년과 혼인하는 주인이 있더냐고 호통을 치긴 했었지만.

사실 이 사가 아이는 세화와 혼인을 한 다음 첩으로 들일 생각도 했었다.

물론 그때야 주세화가 이 사촌 동생을 꽤나 아끼는 듯해 그런 마음을 먹었던 것이지만.

“어찌 주안상을 하나도 손대지 않으셨습니까. 혹 술만 드신 것입니까? 그러면 속 버리셔요.”

사연주가 그의 빈 술잔에 다시 한번 술을 따라 채우며 덧붙였다.

“제가 안주를 집어 드릴게요. 자, 어서 드세요.”

주경현의 시선이 슬쩍 주세화에게로 향했다.

헌데 놀랍게도 세화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투기가 아니겠습니까.”

‘허. 과연. 정말로 이 아이를 신경 쓰고 있었구나.’

주경현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살짝 새어 나왔다.

뭐야. 결국 투기였던 건가.

‘하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오라버니, 오라버니 하며 뒤를 따르던 아이였으니.’

생각해 보면 명윤 원로를 닮아 그를 위해선 죽는시늉도 할 수 있을 듯 굴었던 아이가 고작 백가에 가는 일로 그리 나왔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앞뒤 사정이 파악되면서 주경현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술을 들이켜고 나자 사연주가 기쁜 얼굴로 다시금 잔을 채웠다. 그런 후 안주를 집어 그의 앞에 놓인 접시 위에 올려 두었다.

“이것도 좀 드셔 보세요.”

사실 이 사가 계집아이는 주세화의 앞에서 종으로서 하대하는 모습을 보여 주려 데려온 것이긴 했는데…….

“어서요.”

자신은 인자하고 품성이 선한 이로 칭송받고 있지 않나. 원인도 파악 되었는데 다른 이들의 앞에서 굳이 그런 모습을 보여야 할까.

‘뭐 투기 정도라면 구슬리기도 어렵지 않을 테고. 게다가…….’

백가주가 세화에게 무슨 마음을 품고 있든, 현명한 신영께서 이미 저 아이를 제 혼약자로 공표하시지 않았는가.

‘그래. 이 모든 혈족들 앞에서 공표된 것을, 그 누가 감히 거역할 수 있겠어?’

주경현이 시선을 들어 세화와 마주했다. 그 순간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대단한 영력으로 이름을 떨친, 기록 속 어떤 신수가 이곳에 온다 해도. 혹은 저 백기하가 가면을 벗어던진다 해도, 저 아이의 아름다움엔 비견되지 못할 것이라고.

‘저 아이가 내 부인이 된다니.’

그래. 무어라 해도 이렇게 될 운명인 것이다.

저 아이가 제게 날 선 반응을 보이며 위아래를 모르고 함부로 굴었던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주명윤도 장부인도 계속 저택에 없었으니 몸가짐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겠지. 그 정도야 혼인 후 내가 잘 가르치면 될 것이고.’

혼례복을 입고, 붉은 연지를 바른 주세화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주경현의 울대가 바싹 마르는 듯 했다.

아무리 신영의 말씀이라 해도 정말 싫었다면 그런 티를 냈을 텐데.

‘그런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가만히 듣기만 하고 있었으니.’

아닌 척하면서도 속으론 신영께서 뜻을 확실히 해 주기만을 기다렸던 건가 생각하니 제법 귀엽기도 했다.

여하튼 신영이 공포한 이상 감히 거역할 수 있는 이가 없으니 이제 저 아이는 제 부인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혼인 전에 마음을 좀 풀어 주긴 해야 할 텐데, 어찌한다.’

따로 자리를 마련하는 편이 나을까. 다른 이들 앞에서 괜히 체면이 깎이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는 않은데.

그가 그렇게 방법을 고심할 때였다.

맑은 목소리가 그들에게 날아왔다.

“혼인은 언제 하시나요?”

주경현에게 안주를 집어 주고 있던 사연주 역시도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세화가 그들을 향해 차분히 미소짓고 있었다.

‘혼, 혼인을 언제 하냐니.’

깜짝 놀란 주경현의 입가가 허물어졌다.

‘저 아이도 참. 신영의 명이 내려온 것이 바로 조금 전이건만 어찌 이리 많은 이들 앞에서 조급하게 혼인을 재촉해.’

흠흠. 목을 고른 주경현이 입을 열었다.

“네가 주가로 떠나기 전에는 해야지. 네 혼인이니 네가 정해 보아라. 언제가 좋으냐. 다만 시일이 촉박하니 준비가 조금 소홀하더라도-.”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제가 소가주님과 혼인을 왜 합니까. 전, 연주 그 아이와 소가주님의 혼사를 여쭤본 것을요.”

“뭐? 그게 무슨 말이냐. 아까 너를 내 혼약자로 신영께서 공표하신 것을 못 들었어? 지금 신영의 명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소가주님께선 저를 죽이실 생각이십니까?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제가 신영의 명을 거역하다니요.”

“? 그럼 그게 무슨 말이냐. 왜 나와 혼인을 하냐니.”

“신영께서는 단지 백가로 갈 제가 불쌍하고 가엾어 자비를 베푸신 것뿐이죠. 그저 제가 백가에서 조금이라도 더 대우받게 해 주시려 그리 말씀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세화가 탄복해 마지않는다는, 감동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허나 백가로 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몸으로 어찌 소가주님과 혼약을 할 수 있을까요. 하여 이미 소가주님과는 혼인하지 않겠다고 청을 올렸습니다. 신영께서도 허락하셨고요.”

‘?!’

몰래, 이쪽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이들이 이 대목에서 깜짝 놀랐다.

‘뭐라고? 벌써 신영이 허락을 하셨다고?’

‘그럼 아까 말씀하신 건 뭐지?’

“저를 생각해 주신 신영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사할 뿐이지만, 소가주님까지 희생하시게 할 수 없어 제가 이 자리에서 솔직히 말씀을 드리는 것뿐이랍니다.”

“…….”

주경현이 기가 막혀 입만 뻐끔거리다가 상을 탕 내리쳤다.

“그게 무슨 궤변이냐! 신영께서 네가 내 혼약자라 하셨으면 그리 알고 있을 것이지. 언제 신영께서 그런 걸 허가하셨다더냐. 누가 그러더냐. 증인이 있느냐?”

세화가 너무 놀라 말을 이을 수 없다는 듯 제 가슴께를 눌렀다.

“어,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소가주님께서도 알고 계셨잖아요. 제 인계의 저택에 오셨을 때 ‘나와의 혼인이 무산되어 그리 슬퍼 보이냐’고 하신 말씀을 저희 저택의 시종들이 모두 들었습니다.”

아차.

그러고 보니 그 소식을 들은 날 저 아이의 저택에 갔었는데 너무 화가 나 그것을 잠시 잊었다.

세화가 억울함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말을 전할 새도 없이 당장 이곳으로 아무나 한 명씩 데려와 확인하셔도 모두 똑같은 대답을 할 터인데. 소가주님께선 당신께서 직접 하신 말씀도 기억하시지 못하십니까?”

“세화야, 그건…….”

“저는 하나부터 열까지 소가주님을 생각하여, 백가행에 대신 가기로 결정하기도 하고. 저를 길바닥에서 탈피하게 내버려 두신 채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셔도 이해하고.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에 감히 소가주님의 옆에 설 수 없다 하여 혼인마저도 먼저 없던 일로 해 주실 것을 청하였건만. 소가주님께서는 계속 저를 오해하시며 고귀한 신영의 존재를 계속 언급하시니 그 압박에 저는 도저히 심장이 떨려 더 이상 살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

‘이, 이 아이가. 이렇게 듣는 이가 많은 곳에서 저런 망발을…….’

대답할 말을 제대로 찾지 못한 주경현의 심장이야말로 터질 것 같았다.

헌데 한마디를 했다가 백 마디를 돌려받은 듯한 주경현이 뭐라 하기도 전이었다.

미려한 눈꼬리가 아래로 가엾게 휘어지고 그 사이에서 맑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나직이 혀를 차는 소리.

아가씨가 가엾다는 속삭임.

그런 많은 일들이 있었던 거냐고 묻는 의심 어린 목소리.

타인의 시선에 민감한 주경현인 만큼, 이 연회장 안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쏠려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너무 기가 막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순간 생각이 나지 않아 망설일 때였다.

“언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는 건가요. 언니야말로 다른 분들이 소가주님을 오해하시게 말씀하고 계신걸요.”

떨리고 안쓰러운 목소리가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사연주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