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254)

영단이 소유주를 바꾼다는 말은 현 주인인 신영보다 그녀의 영력과 운용 방식이 뛰어날 수 있다는 의미를 품고 있었다.

오만한 그 말에 연회의 처음과 비견될 만한, 무시무시한 정적이 공간을 휩쓸고 지나갔다.

숨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모두가 경악을 담아 세화를, 또 이 불충한 말에 이어질 노인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저, 아가씨가 살고 싶지 않은 것인가.’

‘대체 어쩌려고 신영께 저런 질문을…….’

‘지금이라도 어서 무릎을 꿇고 사죄드리라고 누군가 알려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노인이 이 말엔 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뱀이 쉭쉭거리는 것처럼 여기저기가 갈라진 목소리를 음산하게 뱉어냈다.

“너, 지금 뭐라 하였느냐.”

“세화야!!”

그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주명윤이 뛰쳐나왔다.

세화의 머리를 눌러 고두시키고 그 옆에 그 역시 꿇어앉았다.

“송구합니다, 신영. 아직 어린아이가 아무것도 모르고 한 말입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너 무엇 하느냐! 어서 신영께 죄를 빌지 않고!”

“아니, 명윤. 가만히 있어 보아라. 내 저 어린것이 무어라 대답하는지 들어 보아야겠으니.”

노인의 시선이 세화에게 이어졌다.

“말해 보아라. 무슨 의미로 한 말이냐.”

“송구합니다, 신영. 제가 아무리 어리고 지혜가 없다고는 하나 어찌 신룡의 영단이 신영께만 귀속되는 귀물이라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감히 저 같은 것에게 잠시나마 쥐여 주시는 것마저 일생에 기록될 영광이라는 것을요.”

세화가 아버지에게 머리가 눌린 채 제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하지만 짧은 지식으로 그런 귀물들은 소유자의 영향을 받아 감정을 품게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물며 신영께서는 역대 위대했던 신영 중에서도 비교할 수 없게 자비로우시고 늘 혈족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주시고, 환계의 고충을 위해 밤낮으로 고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그런 분께 이리 오랜 시간 머물러 있었던 귀물이라면 분명 신영의 인품이 그대로 녹아 있을 텐데.”

주세화가 잠시 침통함을 삼키듯 말을 끊었다.

“육가 연합에 둘러싸인 절 신영의 자비심 넘치는 마음으로 비호해 주고자, 위급한 순간에 제게 귀속되는 일이 생기기라도 할까 봐. 그리하여 저를 생각하여 내려 주신 신영의 결정을 제가 목숨으로도 갚을 수 없는 그런 순간이 올까 봐. 그것이 염려되어 여쭤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하, 이년 봐라?’

노인의 턱이 얼마나 떨리건 간에, 연회장 안의 이들의 시선은 경악에서 호의로 천천히 바뀌어 갔다.

‘아, 저런 생각이었다면 물어볼 만했네요.’

‘저도 처음엔 놀랐지만 어린 아가씨니까요. 그런 걱정을 할 만하지요.’

‘맞아요. 연회에도 잘 나오지 않던 아가씨니까요. 귀물이 영력의 크기로 주인을 결정한다는 건 몰랐을 테지요.’

‘하하. 신수인 백가주를 제외한다면 영력이 제일 큰 분이 우리 신영이실 텐데 귀여운 걱정을 하고 있네요.’

하지만 그 시선들이 전부는 아니었다.

저 말이 가져올 결과를 짐작한 이들은 저 어린 아가씨가 보통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저렇게 구구절절 신영의 자비를 칭송해 놓았으니.’

저 말을 듣고는 결코 귀속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어진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귀속이 걱정된다고 빼앗을 수도 없고.

만약 그렇게 된다 해도 할 수 없다는 대답밖에는 내놓을 수 없는 것이다.

노인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세화를 내려다보았으나 거기엔 떨고 있는 어린아이만 있을 뿐이었다.

노인이 적룡의 영단을 잠시 세화에게 넘기겠다고 한 데도 이유가 있었다.

치이익―.

검을 쥐고 있는 노인의 손바닥이 여전히 뜨겁게 절절 끓고 있었다.

‘당장 이 자리에서 쳐 죽여도 시원치 않을 저 어린것이…….’

저 작은 것이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사실 벌써 이 영단이 저 어린것에게 귀속이 되어 버린 것이다.

육가 연합을 상대로 뭔가를 결정하려면 종종 이 신검을 꺼내 들어야 할 텐데 그때마다 지금처럼 제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누구라도 눈치챌 것이다.

그가 이미 이 영단의 소유권을 빼앗겼다는 것을.

어차피 저 어린것의 영력은 제가 흡수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영단의 귀속도 풀릴 것이다.

때문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잠시 저 어린것을 위해 영단을 내어 준다는 핑계를 꺼내어 놓았는데.

‘그런데 뭐가 어쩌고 어째?’

더 미칠 것 같은 것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들을 데려가겠다고 이 먼 곳까지 찾아온 백가주의 앞에서 저 어린것을 희생양으로 보내면서.

자비로운 신영의 모습으로 괜찮다고 대답하는 것 외에는 어떠한 선택지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노인이 혀끝을 물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참아 냈다.

빠르게 대답해야 했다.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좋은 대답을 내놓고도 본전도 찾을 수 없을테니.

노인이 간신히 부드러운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그런 종류의 의문이었구나. 네 고민이 그럴듯하다.”

“신영. 황당하다 꾸짖지 않으시고 그리 보아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마음 같아선 닥치라고 병사들을 동원해 뺨이라도 치고 싶었으나, 이 어린것은 이미 인의 있고 충심 있는 주가의 인재가 되어 버려 그럴 수도 없었다.

그래. 바로 제가 했던 말이 아니던가.

조금 전에 뱉었던 말을 혀를 잘라서라도 도로 삼키고 싶은 노인이 떨리는 손을 감추며 대답했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네게 귀속된다 한들, 신룡의 영단이 자비심에 그리 결정한 걸 어찌 네게 책임을 묻겠느냐. 그럴 때도 두려움 없이 내게 보고하면 된다. 알았느냐.”

“황공하고 또 황공합니다. 허나 신영, 혹 귀속된 귀물이 제게서 떨어지지 않고 흡수되면 그때는 어찌해야 하는 것입니까?”

……흡수?

눈에서 실핏줄이 서며 뒷목이 뜨끈히 달아올랐다.

참을 수가 없어 화를 내려 했으나 그보다 한발 앞서 작은 것이 눈물을 바닥에 뚝뚝 떨어뜨렸다.

떨리는 목소리로 읍소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저는 죽어서도 신영의 발치에 엎드릴 수 없을 텐데. 그때 저는 어찌 사죄드려야 하는 것입니까? 가족들만이라도…….”

주세화가 혼탁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가, 가족들의 목숨만이라도 살려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러며 울기 시작하는데 이게 환장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지금 모두가 그를 보고 있었다.

저 백기하까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제 몸을 간신히 다스리며 노인이 대답했다.

“만약 그렇게 되더라도. 너에게도-.”

차마 말이 잘 나오지 않긴 했다.

“네 가족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

“헉. 정말이십니까?”

주세화가 흠뻑 젖은 얼굴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정말, 정말로요?”

‘……이년이.’

아이처럼 묻는 그녀를 보며 노인이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닦아 낸 주세화가 신영의 앞에 고두했다.

“황감합니다, 신영. 송구하고 또 송구합니다. 신영의 치세가 영원토록 빛이 나시길.”

그 말 속에 들어 있는 진짜 즐거움을 읽어 낸 것은 백기하뿐이었다.

결국 원하는 것을 가져가는 그녀를 보며 백기하의 초조하던 마음도 한층 안정되고 있었다.

염려와 걱정이 섞여 있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입꼬리가 피식 위로 솟았다.

그녀는 그녀였다고.

그가 제 앞에 있는 여자를 언제까지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 * *

노인은 그 대화를 끝으로 연회에서 물러났다.

말은 모두가 더 편히 연회를 즐길 수 있도록 자신은 들어가 보겠다 하였으나 그가 무엇 때문에 들어가는 것인지 세화가 보통이 아니라 짐작했던 이들은 다 알아차렸다.

주경현에게 자리를 맡기고 돌아서는 노인의 안색은 짧은 사이 파리해져 있었다.

하나 노인의 상태가 어쨌건 간에 그가 사라진 연회장은 조금 전보다 훨씬 더 활기가 넘쳤다.

조금 전, 저 어린 아가씨를 끌어안았을 때 단단한 팔에서 느껴지던 감정도 그렇고.

긴장된 순간들이 지나가고 나자 완벽한 성장 차림으로 자리하고 있는 백기하가 대체 저 아가씨와 어떤 관계인지. 홀로 마음을 준 것인지, 아니면 저 아가씨도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닌지 등이 몹시 신경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연회에서는 보통 다들 편안한 자세를 하기 마련이건만 백기하는 홀로 허리를 세운 채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

신영이 연회장을 나가며 악사들의 연주도 다시 시작되었고 아름다운 무희들 역시 화려한 춤 솜씨를 뽐내고 있었건만 조금도 눈길 주는 법이 없었다.

때때로 시선을 들어 올려 그가 바라보는 곳은 주명윤의 옆에서 무희들을 바라보고 있는 주세화였다.

그 노골적인 시선을 몰라볼 수가 없었다.

‘어쩜. 저 백가주께서 아가씨의 탈피를 도와줬다는 얘기가 있던데, 그때도 혹시 첫눈에 반해 그리하기라도 한 걸까요?’

‘그러게요. 갑자기 탈피를 백가주가 도와줬다 하여 그게 무슨 소린가 했더니, 지금 보니 탈피보다 더한 것을 도와줬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겠어요.’

그 열렬한 시선을 알아차린 이가 또 있었다. 주경현이었다.

소가주의 단단한 주먹은 이미 보이지 않는 소매 안쪽에서 손톱을 박을 듯 틀어 쥐어진 지 오래였다.

그는 기실 조금 전 백가주가 주세화를 끌어안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그저 탈피를 도와주고, 도움을 받은 그 정도의 관계가 아니었어.’

그러자 며칠 전 주명윤의 저택을 방문했을 때 세화가 했던 말이 기억이 났다.

“백가주께선 제 탈피를 도와주시느라 피로하시어 쉬시는 중입니다. 전 그분을 간호하는 중이고요.”

‘저자가 세화 저 아이를 곁에 두기 위해 아픈 척을 하기라도 한 건가?’

주경현의 시선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앉아 있는 백기하에게로 향했다.

‘아니, 당연히 그랬겠지. 신수가 고작 그 정도로 피로를 느낀다니 말이 되지 않으니까! 저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걸려들어서.’

그때는 달라진 세화의 모습에 놀라 깊이 생각하지 못했지만 다시 떠올릴수록 속이 진탕된 듯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지만 울화가 난장을 치고 있음에도 주경현은 세화에게 선뜻 다가설 수가 없었다.

이 많은 이들 앞에서 또 저 아이가 제게 냉랭하고 차가운 태도를 보일까 봐.

그래서 제가 그녀를 처벌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라도 할까 봐. 섣불리 다가갈 수 없었던 것이다.

‘네가 이런 내 자비로운 마음을 알아야 할 텐데. 넌 그런 것은 도무지 헤아릴 줄도 모르고.’

탓하는 듯한 주경현의 시선이 주세화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또 막상 젖어 있는 얼굴을 보고 나면 그런 마음조차 사그라드는 것이다.

‘솔직히 다가와 용서를 구하고 속엣말을 털어놓으면 내가 도와줄 텐데 저리 고집만 부리니.’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그들과 가까운 벽에 붙어,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세화의 사촌 동생, 사가 계집이 눈에 띄었다.

‘그래. 저 아이를 활용해 볼까.’

주경현의 얼굴이 처음으로 조금 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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