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도 뜰 수 없는 빛의 한가운데.
그 새하얀 세상에서 그녀가 몸부림쳤다.
그녀의 사지 곳곳에서 거대한 영력이 한 번에 관통되며 생기는 끔찍한 고통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래도, 그때보단.’
하지만 아무리 괴롭다 한들 천신주를 마셨을 때보다 아프진 않았다.
가족들의 목이 비참하게 누군가의 발에 걷어차이는 장면을 볼 때보다 힘겹진 않았다.
‘절대로 그렇게 만들 수 없어. 절대로 그렇게 만들지 않을 거야.’
손안의 검이 활활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저를 놓으라고 발버둥을 치는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검이 아니지.’
이를 악문 그녀가 감았던 눈을 부릅뜨며 손잡이 위에 박힌 작고 붉은 구슬을 노려보았다.
태초부터 내려온 주가의 신물.
신룡의 영단이었다.
신영의 권위의 상징이자, 신영으로 오르는 즉위식에 반드시 필요한 이것이 주경현의 손에 들어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다른 영력을 덧씌워 망가뜨려서라도.
그녀의 몸에서 들끓던 영력이 터져 나오자 신룡의 영단도 거세게 저항했다.
그녀가 저를 복종시키려 함을 알고 있음이었다.
손안에서 시작된 불이 이제 온몸을 태우기 시작했다.
배 속이 진탕되고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았으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신룡의 영단에만 집중했다.
‘나도 신영의 핏줄이야. 나도 주가의 혈손이야!’
지위에 상관없이, 내 영력에 복종하라고!
그녀가 소리치듯 영력을 다시금 폭발시켰다.
그때였다.
이 공간 어디에선가 거대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커헝―!”
거대한 사자후는 집중을 깨기 충분했으나 그녀는 오히려 그 소리에 안도감을 느꼈다.
바람처럼 어디선가 달려온 백호가 그녀의 몸을 통과했다.
그 순간 활활 타는 듯 뜨겁던 몸의 열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막막했던 호흡 역시도 조금은 정상적으로 흘러나왔다.
그녀가 다시금 힘을 쏟아 냈다.
‘내게 복종해!’
그 말과 함께 검이 손안에서 빠져나갔다. 거대한 적룡의 모습으로 바뀌며 그녀의 앞에 섰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그녀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 *
분명 의식이 없었는데도 무언가를 본 것 같았다.
어떤 중요한 얘기들을 누군가와 나눈 것 같았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누군가가 다독이는 듯도 했는데.
“……화.”
어둠을 뚫고 누군가 그녀를 부르고 있어서.
“……세화.”
어느 순간에도 부름에 대답해 주고 싶던 이가 그녀를 부르고 있어서, 그녀는 필사적으로 혼미한 어둠 속을 빠져나왔다.
“주세화.”
나비 날개 같은 기다란 속눈썹이 잔뜩 흔들리다가 애처로운 검자줏빛 눈동자를 드러냈다.
우미한 눈썹과 미려한 눈동자가. 백기하의 염려가 가득한 시선이 가면 안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기하.”
잔뜩 잠긴 목소리가 그를 부르자 길게 뻗은 그의 눈꼬리가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입술을 꾹 물어 삼킨 그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가면의 안쪽을 채운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어깨 위로 뚝뚝 떨어졌다.
“다행이야.”
신수인 그가.
이 환계에서 무서울 것이 없는 그가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며 몸을 떨었다.
다행이라는 억눌린 목소리 안에 스며든 그 뜨거운 감정을 몰라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눈시울도 뜨거워지는 듯했지만.
“세화, 너…….”
주경현의 목소리가 끼어들며 이곳이 어디인지를 알아차렸다.
연회장이다.
하얗게 질린 그녀가 백기하의 몸을 조금 밀어냈다.
“이따 밤에 얘기해요.”
밤이고 뭐고. 그의 시선엔, 더 이상 그녀에게 이런 일을 시키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세화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올려다보자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물러났다.
자리로 돌아가는 그를 보며 그녀도 몸을 일으켰다.
한데 제 손에 여전히 신검이 쥐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처음에 이 검을 감싸고 있던 주황색 영력 대신 진한 적보라색 영력이 신검을 온통 뒤덮은 채였다.
그 의미를 이 자리에서 그녀와 신영이 가장 먼저 알아차렸으리라.
믿을 수가 없어서 그녀가 다시금 들고 있던 신검의 위로 영력을 흘려보냈다.
검기가 불꽃처럼 일렁이고, 노래 같은 검명이 웅웅 흘러나왔다.
신룡의 영단이 이제는 그녀의 영력을 전혀 거부하지 않았다.
그 순간의 환희를 누가 알까.
뜨거운 감정이 울컥 솟아났으나 무슨 감정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울고 싶기도 했고, 웃고 싶기도 했다.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것을 애써 누르며 세화가 조금 더 영력을 폭발시켰다.
그리고 천천히 가는 팔을 휘둘러 보았다.
적보라색 불꽃이 허공을 가르는 모습은 마치 꽃이 피어나는 장면 같았다.
좌로 위로. 다시 횡으로.
검을 쓸 수 없는 그녀는 그저 영력의 길을 따라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하지만 부드럽게 귀를 울리는 검명과,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펼쳐지는 새하얀 예복과 적보라색 치마는 마치 춤을 추는 듯 보이게 했다.
“그만!”
“!”
모두가 숨죽이고 바라보는 그 춤을, 노인의 일갈이 멈춰 세웠다.
그제야 노인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처럼, 세화가 깜짝 놀란 얼굴을 꾸며 내며 노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다행히 연회장은 노인과 영력 이 강한 이들이 결계를 쳐 막았는지 그 커다란 충격파에도 조금도 어지러워지지 않았다.
누구도 다치지 않았고 연회장 역시 이리 완벽하게 보존된 만큼, 노기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미세하게 떨리는 노인의 몸을 누군가는 분명 이상하게 여길 터였다.
겁을 먹은 듯 세화가 시선을 내리깔고 가만히 서 있었다.
무섭도록 고요하게 침묵하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검을 이리 가져오거라.”
그녀가 두 손으로 검을 받쳐 노인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치이익-.
노인이 검을 받아들던 순간의 작은 소리를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신룡의 영단이 노인의 영력을 거부하며 내는 소리였다.
표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일그러진 노인의 턱이 잘게 진동했다.
하지만 그는 노련하게도 그 감정을 재빨리 갈무리했다.
뱀 같은 눈동자가 눈꼬리를 휘며 덧붙였다.
“대단하구나. 주가에서 아주 대단한 아이가 태어났어.”
그 목소리엔 이미 조금 전 보였던 분노의 기색이 씻은 듯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탈피를 축하하기 위해 선물을 내리려 하는데 무엇이 좋을까. 아이야, 너는 뭐가 좋으냐.”
“선물이라니요. 말씀만으로도 황송합니다.”
세화가 거부하자 노인의 시선이 조금 더 휘었다.
“그런 말 말아라. 명윤은 주가의 중요한 인재이고 이미 주가를 위해 많은 일을 해 왔지. 그 아들들 역시 변방을 훌륭히 지켜 왔으며 너 역시 탈피하자마자 큰 임무를 수행하게 되지 않았느냐.”
“…….”
“허니, 줄 것이라면 아주 큰 상을 주는 게 좋겠군. 여봐라, 명윤 원로의 여식에게 주가 신룡의 영단을 내린다!”
그 말에 결계가 막아 주었다고는 하나 충격파의 여파로 어안이 벙벙하던 이들이 일제히 숨을 삼켰다.
“!!”
“방금 뭐, 뭐라고요?”
“……맙소사. 신물을 저리 어린 아가씨에게?”
세화도 당황한 듯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조금의 떨림도 없었다.
“신영. 신룡의 영단은 주가의 신물이 아닙니까. 신영의 등극식에 필요한 보물이고요. 어찌 그런 귀한 것을 제 보잘것없는 손 위에 놓는다고 하십니까.”
“완전히 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 너의 안위를 보장해 주려 하는 것일 뿐.”
노인은 이내 연회장에 모인 이들을 향해 선포했다.
“들어라. 오늘에서야 공표하지만, 이 아이는 소가주를 대신하여 실종 사건의 책임자 역할을 맡아 백가로 가겠다 자원하였다. 어린 나이에도 인의를 알고 충심이 지극한 인재가 아닌가. 나도 그 마음을 기특히 여겨 이 아이에게 신물을 내려 함께 보내니.”
낮은 목소리가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는 위엄을 담아 연회장 전체로 퍼져 나갔다.
“주가의 신물은 주가 신영의 권위 그 자체이다. 이 어린 아가씨가 신영의 대리로서 백가에 가는 것임을 신물이 명증할 것이며, 또한 이는 육가에서 요구한 실종 사건의 해결에 주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임을 알리는 포고이다.”
노인의 예리한 시선이 미소와 함께 백가주를 향했다.
“이 아이야말로, 여섯 가문의 요구 조건에 부합하는 신영의 혈통임을 이 자리에서 확실히 하니. 주가 장로 명윤의 여식은 주가의 딸이자 소가주의 혼약자로서 소임을 다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지켜보는 이들의 시선이 그 선포에 허공에서 열렬히 부딪쳤다.
‘헉. 혼약이요? 우리가 분명히 보았는데. 조금 전 그 장면. 백가주의 모습이 분명……. 백가주가 저 아가씨에게 가진 마음이 범상치 않아 보였는데.’
‘아, 아니. 그런데 혼인은 우리 소가주와 하실 거란 말인가? 하긴 저 정도의 영력이라면 절대 다른 가문에 넘길 수 없긴 하지만.’
그 사이 노인이 말을 이었다.
“허나 급하게 결정된 만큼 저 아이가 백가에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준비를 도와주고 싶군. 허니 백가주 자네는 먼저 돌아가는 것이 어떠한가. 자네도 이제 막 탈피를 마친 여아를 당장 단신으로 끌고 갈 만큼 모진 성정은 아니지 않나.”
“…….”
“오래지 않아 보낼 것이네. 약조는 꼭 지킬 터이니 염려 말고.”
백기하가 신영을 바라본 채 한마디도 하지 않자 노인의 미소가 한층 더 깊어졌다.
사람들은 아무리 그렇다 해도 신영께서 굉장한 선물을 내려 주신다며 부러움에 찬 신음들을 흘렸다.
주가 신룡의 영단이라 하면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영력이 증진되는 환계 신물 중의 신물이 아닌가.
역대 신영 밖에 만지지 못하는 그 귀물을 어찌 저런 어린 아가씨에게 내려 주실 생각을 하셨는지.
역시 신영은 신영이라고, 그들이 신영의 자비에 찬탄하며 감탄했다.
그때였다. 우아하면서도 유려한 목소리가 이어진 것은.
“헌데 신영. 허락하신다면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무어냐.”
“제게 임시로 내려 주신 신룡의 귀물이 감히 제게 귀속되면 어찌해야 합니까.”
“……뭐?”
“그 검에 박힌 영단이 혹 제게 귀속된다면 말입니다.”